소설리스트

난가기연-32화 (32/892)

32화. 세련된 선물

구절강편은 여전히 기다란 막대와 독사처럼 쉼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검은 옷의 사내는 식은땀이 흘렀다.

“헛!”

검은 옷의 사내가 온 힘을 짜내며 미친 것처럼 칼을 휘둘렀다.

파바바바박…….

검은 옷을 입은 항봉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휘두르는 칼날 끝에서 수많은 나뭇가지가 잘려나갔다. 발을 뻗어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뒤로 차낸 그는 더 이상의 엄호를 멈추고,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검의첩을 훔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번(樊)씨 가문의 그 망할 노인은 나이가 지긋한데도 여전히 원기가 왕성했다. 이 노인을 처리하기 위해, 13인의 연지(燕地) 도적 중 둘이나 희생되어야 했다.

살아남은 나머지 11인은 검의첩을 손에 넣은 뒤 재빨리 달아났다. 도적의 손에 목숨을 잃은 노인을 발견한 번씨 가문은, 마치 미쳐버린 사람들처럼 정원부에 있는 무림 전체에 호소했다.

도적들을 찔러 죽이는 자에겐 검의첩과 번씨 가문에서 수년간 고심해 얻은 깨달음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고 말이다.

순식간에 정원부 무림이 들썩이고, 각지의 고수들이 한데 모였다. 오로지 도적들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검의첩>은 과거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절세 고수 좌광도(左狂徒)가 임종 전에 남긴 것으로, 좌광도의 일부 검술과 검의를 담고 있으며, 검선과 그의 검이 묻혀있는 장소 또한 적혀 있었다. 무림에서 떠도는 풍문은 이러했다.

검의첩을 깨닫는 자는 좌광도의 무덤을 찾을 수 있으며, 절세 무공의 비결과 신비로운 힘을 지닌 장검의 맑은 자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무림에 피바람을 불어왔던 <검의첩>이 줄곧 정원부의 번씨 가문에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번씨 가문이 복수를 위해 이 사실을 무림에 알린 것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강호의 실력자들이 모여 앞다퉈 경쟁했다. 이들은 나머지 11인의 도적을 찾아낸 뒤, 이미 도적들과 여러 차례 교전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4명을 제거했다.

이들은 다른 부(府)나 다른 주(州)의 고수들이 검의첩을 쟁탈하러 찾아오기 전까지, 남은 7인의 도적을 처리하자는 묵언의 약조를 했다.

* * *

검은 옷의 사람들은 도망칠수록 초조해졌다. 원래 복잡한 산림의 구조를 틈타 적을 따돌릴 계획이었지만, 이들을 쫓는 십수 명의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턱 끝까지 쫓아온 적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중 여럿이 부상을 입었다. 현재 무리를 이끄는 항봉 또한 어깨에 표창을 맞아, 상황이 위급해졌다.

“형님, 이대로는 내려가지 못합니다. 저희는 저들을 떼어낼 수 없을 겁니다!”

“젠장, 망할 번동(樊同), 죽어서까지 방해를 하다니! 정 안 되면, 앞에서 버티는 수밖에!”

무리를 이끄는 검은 옷의 사내가 거세게 화를 내더니, 품에서 빠르게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전방의 넓은 바위 위로 뛰어오른 그가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높이 들어 보였다.

나머지 일행은 그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희 미친개들이 원하는 검의첩은 바로 여기 있다. 이 이상 우리를 쫓아온다면, 내 이 거지 같은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이내 항봉이 말려있던 두루마리를 활짝 펼쳤다.

뒤에서 추격하던 고수들이 검은 옷의 일행과 두 장(*二丈: 약 6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하얀 옷의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니, 두렵기는 한가 보구나. 좌검선께서 남기신 묵보(*墨寶: 보배가 될 만한 글씨)가 망가지면 어떤가, 수년의 고행을 거친 번씨 가문의 깨달음도 그와 같은 것을!”

“하하하! 강숭리(江崇離), 너는 그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까? 번씨 가문의 그깟 깨달음이 진정 유용하다면, 저들이 이미 좌광도의 절세 검법과 무기를 찾았겠지.”

검은 옷의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조롱했다. 이윽고 짧은 적막이 흘렀다.

항봉은 사실 검의첩을 가져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말을 덧붙이려던 그때, 갑자기 거센 산바람이 몰아쳤다.

휘이— 휘이—.

거친 바람에 나뭇잎과 흙먼지가 회오리를 만들었고, 어두운 밤을 더 흐리게 만들었다. 그때, 항봉의 손에 힘이 확 풀리더니, 두루마리가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젠장!”

“검의첩이……!”

“저거 잡아!”

곧바로 추격자들이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그들은 화려한 경공을 펼치며, 검의첩을 낚아채려고 애썼다.

한편, 몰래 근심에 시달리던 항봉은 돌연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도적들을 데리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추격자들이 거친 바람 사이로 치솟은 검의첩에 한눈을 판 사이, 그들은 도망치기로 했다.

수많은 고수가 검의첩을 손에 쥐기 위해 나무 사이로 뛰어올랐다. 심지어 어떤 이는 검의첩을 쟁탈하려고 다른 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바람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하얀 옷의 사내가 검의첩을 향해 손을 뻗은 바로 그때, 검의첩은 하늘 높이 올라가더니, 그대로 바람을 따라 먼 하늘가로 날아가 버렸다.

휘익— 휘이이—!

낙엽과 마른 가지, 흙먼지가 매섭게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더는 경공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무림인들은 하나둘씩 땅으로 착지했다. 그들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두루마리는 이미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땅 위 그 어디에서도 도적들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괘씸한 놈들!”

“아, 거의 다 왔는데!”

“바람이 영 이상하오!”

“계속 쫓을 거요?”

“쳇, 일단 검의첩부터 찾아야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무림인들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두 무리로 나뉘어 자신들이 쫓고자 하는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우규산의 한 이름 없는 봉우리 위, 동굴에 엎드린 육 산군은 몸집에 비해 한없이 조그만 두루마리를 발에 쥐고 있었다. 조금 전 산길을 지날 때, 우연히 주운 검의첩이었다.

육 산군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펼치자, 누런 종이 위에 적힌 수백 개의 글자가 굳세고 힘찬 모습을 드러냈다.

“명필이네! 흔한 필체긴 하지만.”

필체에선 위엄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영기를 느낄 수 없었다. 과연 속세의 무술인에게 소위 ‘검선’이라 불리는 자가 남긴 글다웠다. 대수롭지 않게 두루마리를 삼키려던 맹호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글은 명필이잖아!’

이내 거대한 맹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엷은 바람을 일으키며 숲으로 들어갔다.

* * *

한 시진(*一時辰: 약 2시간) 후, 영안현 부근 협곡.

붉은 여우 한 마리가 제 몸통만한 범 발바닥에 꼬리를 밟혔다.

끼잉…… 낑…….

붉은 여우가 빳빳하게 굳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도망칠 생각도 못 하던 녀석은 사람처럼 조심스레 몸을 돌리더니, 앞발을 모아 맹호를 향해 절하고 비는 시늉을 했다.

육 산군이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올리며, 이빨을 무섭게 드러냈다.

“하하, 네 여우 놈에게 영지가 생겼을 줄 알았다. 물론 네가 영안현에 내려가 몰래 농가의 가축을 잡아먹은 것도 알고 있지. 너, 산신당에 사는 눈이 먼 고인을 본 적이 있느냐?”

아우우…….

여우가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다. 나 대신 네가 나서줘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맹호의 입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휙 떨어졌다. 육 산군은 제 털을 꼬아 만든 줄을 두루마리에 칭칭 감아 붉은 여우의 등에 묶은 다음, 두루마리를 여우의 털 속에 꽁꽁 숨겼다.

“나 대신 수선진과 영안현에 가서 계 선생님을 찾아. 선생을 찾으면, 이 두루마리를 주도록 해. 네 몸에 내 털이 엮여 있으니, 선생이 너를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선생님의 휴식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여우를 시켜 계 선생님의 거처를 찾아 이 두루마리를 주면 되었다. 계 선생님은 맹인이지만, 속세를 벗어난 고인인지라 여우를 보낸 게 자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터였다.

아우우!

붉은 여우가 살며시 대답했다.

흉악한 눈빛을 거두고, 흡족한 미소를 드러낸 육 산군이 드디어 여우를 놓아주었다.

“좋아, 네 운명이 달린 일이다. 선생을 찾든 찾지 못하든, 허투루 행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만 가보거라!”

붉은 여우는 떨리는 네 다리를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산중의 맹호를 올려다본 여우는 재빨리 속도를 높여, 나무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붉은 여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육 산군은 생각했다.

‘서화(書畵)를 선물하는 게 진부하진 않겠지?’

* * *

아침 햇살이 거안소각을 적시고, 대추나무에는 연두색 대추꽃이 활짝 피었다. 온 정원을 물들인 향긋한 꽃향기는 거안소각 바깥의 천우방까지 널리 퍼졌다.

천우방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에겐 대추꽃 향기도, 거안소각의 새 주인도,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 까닭이야 알 수 없었다.

거안소각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지만, 거안소각은 예전의 무서운 이미지를 벗은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새 입주자가 두 달 동안 무사히 지내고 있는 데다가, 종종 거안소각을 찾아가는 윤 훈장에게도 아직 별 탈이 없었으니 말이다.

계연이 방문을 열고 나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처럼 직업도 없고, 당분간은 돈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나 지금까지 늘어지게 잘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곤 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는 건 나뿐일 텐데, 애석하게도 나는 신선이 아니구나!”

서투른 실력으로 엉터리 시를 한 구절 읊은 계연이 천천히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주방 옆에서 어제 따온 얇은 버들가지 하나를 쥐어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휙 움직이자, 물독에서 물줄기가 저절로 올라왔다.

손끝을 살짝 흔드니, 내공 기법으로 약간의 영기를 주입한 버들가지가 빳빳하게 펴지면서, 흐르는 물과 함께 입속 구석구석을 닦아주었다. 20초 정도가 지나자, 양치질이 끝났다.

“으우우……. 퉤!”

계연이 혼탁한 물을 뱉고 나니, 드디어 정신이 말똥해졌다!

지금 계연은 예전보다 손쉽게 양치질을 했다. 게다가 매일 치석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양치질을 아예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선인이 되어 씻을 필요도 없고, 양치질할 필요도 없는 날이 오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거웠지만, 허기를 못 느끼는 날이 오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계연은 절대, 절대 음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지루한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인가.

죽간을 쥐어 든 계연은 대문을 닫고 유유자적하게 집을 나섰다.

최근 들어 자신의 실력이 대폭 늘었다고 생각한 계연은 언제 바깥세상을 살펴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계연은 이미 수행에 관련된 책 두 권을 완전히 통달하였고, 무공 비결이 적힌 책 두 권도 어느 정도 연마했다. 다만, <철형전첩>에서 말하는 소위 ‘진기(眞氣)의 일곱 경지’ 중, 자신의 상태를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선천진기(先天眞氣)’ 단계로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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