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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34화 (34/892)

34화. 마을에 퍼진 소문

대략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 정도 지나자, 동 의원과 계연이 함께 치료실에서 걸어 나왔다. 계연의 품에는 핏자국이 묻어난 흰 천으로 돌돌 말린 여우가 안겨있었다.

동 의원은 직접 서랍으로 가 약재를 꺼내어 약을 지었다. 잠깐 사이에 약을 모두 지은 그가 계연에게 약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제가 방금 말한 대로 약을 달이시면 되오. 한데 탕약이 꽤 써서, 녀석이 약을 먹을지는 저도 모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정말 감사하다는 말밖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진료비와 약값은 얼마죠?”

계산대로 돌아온 동 의원이 다소 지친 듯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진료비는 안 받을 터이니, 약값만 30문 주시오. 내 제자에게 주시면 되오!”

붉은 여우를 안고 있어 손이 불편했던 계연은 동 의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전낭에서 동전을 꺼냈다.

“여기요. 의원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계연은 오른 소매로 품 안의 여우를 감싼 다음, 빠른 걸음으로 제인당을 벗어났다. 또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골목을 지나 거안소각으로 돌아왔다.

한편, 제인당 안에선 땀에 흠뻑 젖은 동 의원이 겨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그러게요. 사부님, 방금 안에서 나던 소리는 그 여우가 낸 겁니까? 정말 무섭습니다!”

천천히 숨을 고른 동 의원이 계산대 뒤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내가 안 무서운 줄 아느냐? 그게 어디 평범한 여우더냐? 완전 요괴가 다 되었더구먼! 쓰읍…… 후…….”

* * *

계연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집으로 향했다. 경공을 발휘하니, 속도는 빠르지만, 흔들림은 줄어들었다.

계연은 그 와중에도 지속해서 붉은 여우의 체내에 영기를 적게나마 주입했다.

조금 전 동 의원은 여우의 생명력에 의문을 품었다. 본디 여우의 체력이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계연이 계속해서 영기를 주입한 것도 한몫했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멀리서 대추꽃 향기가 은근하게 풍겼다. 계연의 품에 안겨있던 붉은 여우가 꽃 내음에 살며시 눈을 떴다. 계연이 보기에는 무척 안심한 눈치였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그는 옷소매를 툴툴 털었다. 그는 안 그래도 깨끗한 돌탁자를 소매로 스윽 닦은 다음, 방에서 이불을 하나 꺼내 곱게 접어 탁자에 올렸다.

계연이 붉은 여우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내보다는 여기가 더 마음에 들 거야!”

붉은 여우가 아직 의아해하는 사이, 말을 마친 계연은 소매에 숨겨 놓았던 오른손을 꺼내 집자식 자세를 취했다.

거안소각 위에서부터 정원까지, 서서히 들어찬 맑은 바람은 붉은 여우에게 비할 수 없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곧이어 붉은 여우가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이 바람에는 천지의 영기가 담겨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산속에서 알음알음 수련할 때보다 백 배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원 안의 대추나무가 가지를 마구 흔들자, 연둣빛 대추꽃이 하나둘 떨어졌다.

하얀 천을 칭칭 감은 여우가 천천히 호흡하며 영기를 마시자, 계연은 겨우 시름을 놓았다.

‘이제 죽진 않겠지?’

조금 전 의원 치료실에서 무의식중에 본 것을 떠올리던 계연의 입가에서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우 요괴야, 여우 요괴야. 네가 수컷인 줄은 또 몰랐다!’

여우를 치료하는 일이 일단락되자, 잠시 틈이 생긴 계연은 품에 챙겨두었던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었다. 육 산군이 이 여우를 통해 보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여우의 피에 물든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치자, 올곧고 힘찬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필이다! 잠깐만! 이거……?’

글씨가 크진 않았지만, 수백 개의 글자는 서로 각기 다른 형태를 뽐내며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부드럽고, 날아오르는 기러기처럼 경쾌하였으며, 살기와 맹렬함을 동시에 품은, 고귀함과 유유자적함까지 지닌 게 아니겠는가…….

근래 무술을 수련하고 도를 닦는 계연의 눈에는 이것이 단순한 글자가 아닌, 순식간에 움직이는 검법으로 보였다.

이 두루마리를 대하는 계연과 육 산군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계연은 두루마리를 보자마자 그 속에 푹 빠져 버렸다.

검의첩에 적힌 모든 글자는 날카로운 필획과 각기 다른 기풍을 드러내었지만, 전체적으로 일관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수백 개의 정적인 글자들이 춤을 추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계연은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은 채,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원 안의 영기가 서서히 옅어졌지만, 여우는 두루마리에 푹 빠져있는 계연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하늘색이 어두워진 뒤에야 두루마리에서 시선을 뗀 계연이 감탄을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다! 무술과 검법이 이런 경지에 도달해야 도가 텄다고 하는 거구나!”

이 두루마리는 신선이 되려고 수행하는 한낱 도인이 쓴 게 아니었다. 계연은 두루마리를 손에 쥐는 순간부터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아무런 영기도, 도인의 현묘한 술법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루마리에 적힌 것은 단순히 검처럼 힘찬 필체를 지닌 문자에 불과했다. 물에 젖으면 속수무책으로 망가질 그런 문자 말이다. 하물며 계연이 읽던 죽간도 물이나 불에 쉽게 훼손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두루마리에는 무림의 검법, 즉 도인은 쉬이 볼 수 없는 속세의 잡기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검의 경지가 만들어낸 기세는 계연이 보았던 바둑판처럼, 계연의 머릿속에 새겨져 지혜가 되고, 계연에게 강한 의지를 불어 넣었다.

‘이 두루마리를 쓴 무인은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자가 틀림없어. 아직 살아 있을까?’

생각에 잠겨있던 계연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잠깐, 나 왜 옛날 사람처럼 생각하는 거야? 젠장, 어이없어!’

계연은 머리를 살짝 흔들며 생각을 툴툴 털어 넘겼다. 계연이 고개를 돌리자, 탁자에서 곤히 자고 있던 여우가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하하하……. 미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 약 달여줄게! 아, 근데 약을 달일 솥이랑 그릇이 없는데…….”

계연은 집안 살림을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집안 어디에도 약풍로(藥風爐)와 약탕관(藥湯罐)은 없었다. 그렇다면 윤 훈장의 집으로 가서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 얼른 나갔다가 올게!”

그의 말에 얌전히 앉아있는 여우를 본 계연은 곧장 대문을 나섰다.

계연이 윤재성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윤청의 흥분된 목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오늘 아버지랑 돌아오는 길에 계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늘 아침 저잣거리에 붉은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커다란 개한테 물리고, 사람들한테 몽둥이질을 당하기도 했대요. 근데 막 도망치던 여우가 지나가던 계 선생님 앞에 바짝 엎드리더니, 앞발을 비비면서 빌더래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다소 놀란 듯 되묻던 윤청의 어머니는 한쪽에 앉아 촛불을 켜는 윤재성에게 말했다.

“상공, 청이 말이 사실이에요?”

촛불에 불을 붙이던 윤재성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오늘따라 계 선생님에 관해 묻는 자가 많더군. 그 붉은 여우가 피범벅이 된 채로 도망치더니, 계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앞발을 싹싹 빌었다고 하네. 주변의 개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더구나…….”

“맞아요, 맞아요! 어머니, 계 선생님께서 딱 한 말씀을 하셨는데 개들이 도망쳤대요. 계 선생님께서 여우를 때린 사람들한테 돈도 주시면서 여우를 놓아달라 하셨대요. 쳇, 돈은 왜 주신 거래요!”

윤청의 말에는 아이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말이다.

“음, 제인당에 여우를 데려가 치료까지 해주셨다더군.”

정원 밖에서 윤씨 가족의 이야기를 듣던 계연은 살며시 실소를 터뜨리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훈장님, 부인. 댁에 계십니까? 계연입니다!”

계연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창 계연에 관해 이야기하던 윤씨 가족이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윤재성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고, 윤청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대문 밖에는 계연이 서 있었다. 그의 소매와 가슴팍에는 아직도 붉은 혈흔이 묻어 있었다.

“윤 훈장님!”

계연이 가볍게 공수했다.

“계 선생님 오셨소이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청아, 네 어머니한테 차를 내어오라 하여라!”

“아니에요. 뭐 좀 빌리러 잠시 온 겁니다. 혹시 훈장님 댁에 약풍로와 약탕관이 있나요?”

오늘 저잣거리에서 들은 소문을 떠올린 윤재성이 재빠르게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금방 가져다드리겠소!”

“아버지, 약풍로 여기 있어요!”

윤재성이 나서기도 전에, 윤청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약풍로와 약탕관을 가져와 계연에게 건네었다.

“계 선생님, 여기요!”

“그래, 고마워 윤청아!”

계연이 웃으며 물건을 건네받았다. 약풍로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으로 미루어 보니 거친 토기 같았고, 약간의 숯 냄새도 맡아졌다. 약풍로와 약탕관 모두 그리 크진 않았다.

“훈장님. 제가 집에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른 가보시죠.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편하게 찾아주시오. 언제든 도와드리겠소이다!”

윤재성이 계연을 향해 공수했다. 그때, 대문을 폴짝 넘어 문밖으로 나간 윤청이 계연의 뒤에 섰다.

“청아, 뭐 하는 게냐, 어서 들어와!”

“계 선생님, 저도 갈래요. 저도 가서 여우 보고 싶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여우를 본 적이 없어요. 제발 가서 보게 해주세요. 절대 말썽 안 피울게요!”

“윤청아!”

“하하하, 훈장님 괜찮아요. 한창 천진난만할 때잖아요. 호기심이 많은 거야 당연하지요. 그럼 이렇게 하시죠. 청이를 저희 집에 데리고 가서 여우를 보여주고, 저녁 식사 전에 돌려보낼게요!”

“으하하, 좋아요!”

윤청이 신이 나 깡충깡충 뛰었고, 윤재성은 난처한 듯이 웃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선생.”

‘이 녀석아! 왜 이 아비에겐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안 하는 거야! 이 아비도 보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체면도 있고 계연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니, 윤재성은 그저 속으로만 생각하며 아쉽고도 부러운 눈빛으로 계연과 윤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거안소각 정원.

돌 탁자 위에 앉아있던 여우는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여우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윤청의 낭랑한 목소리에 경계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잠시 후, 약풍로와 약탕관을 손에 든 계연과 상기된 얼굴의 윤청이 정원에 들어섰다.

“어라, 이제 서네?”

계연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 윤청을 경계하는 여우의 표정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우야, 얘는 내 친구의 아들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윤청아, 얘가 바로 붉은 여우야. 많이 다쳐서 몸이 안 좋으니까, 최대한 방해하지 말고, 만져서도 안 돼, 알았지?”

“네, 알겠어요!”

윤청은 털이 복슬복슬한 붉은 여우 앞에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얀 천을 칭칭 감고 있는 모습에서는 산짐승의 무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윤청은 여우를 만지지만 않았지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피며, 여우의 온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시종일관 윤청을 노려보던 여우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이는 여우에게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가, 여우의 으르렁 소리에 놀라 뒷걸음치기도 했다. 한편, 천적이라도 만난 듯 경계하던 붉은 여우는 코웃음을 치며 아이를 무시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의 태도에 계연은 배꼽을 잡고 웃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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