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꽃을 품은 용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 정도가 지나고, 계연이 시커먼 탕약 한 그릇을 내어왔다. 그는 여우의 위가 작은 것을 고려해, 일부러 약을 진하게 달였다.
끼잉…….
약 냄새가 역했지만, 계연이 지켜보고 있으니, 붉은 여우는 하는 수 없이 탕약을 할짝거렸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윤청은 웬만한 강아지보다 착한 여우의 모습에 푹 빠져 버렸다.
탕약에는 약간의 영기가 깃들어 있었다. 영기가 사라지기 전에 여우가 탕약을 들이켜면, 약의 효력도 배가 될 것이다.
대견하게도 녀석은 더는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제때 치료한 데다가 영기까지 받고 나니, 붉은 여우는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았다.
때마침 식사 시간이 되었다. 떠나기를 아쉬워하던 윤청을 억지로 돌려보낸 뒤에야, 계연은 오늘의 첫 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외출한 김에, 여우에게 먹일 고기를 사오기로 했다.
한편, 붉은 여우가 살려달라며 두 발로 싹싹 빌고, 누런 개가 경고 한 마디에 물러났다는 기이한 소문은 영안현 백성들에게 재미난 안주거리가 되어 주었다.
* * *
붉은 여우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솔솔 부는 맑은 바람을 따라 녀석의 털이 나부꼈다. 여우는 제 몸을 덮을 만큼 커다란 꼬리를 이따금 살랑이기도 했다.
계연은 여우의 피로 얼룩진 장포를 벗고, 비슷한 모양의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그의 앞에는 이러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추나무 아래 붉은 여우가 웅크리고 자는, 고요하고 아늑한 광경 말이다.
계연이 방에서 나오자, 곤히 자고 있던 여우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집에서 잠깐 쉬고 있어. 난 저잣거리에 가서 네가 먹을 것 좀 사올게.”
대문을 열던 그가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여우를 바라보았다.
“네가 거안소각에서 지내는 동안, 갑자기 어느 집 닭이나 오리가 영문도 없이 사라지면 알아서 해!”
계연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지만, 잔잔하고 희뿌연 눈으로 저리 말하니, 붉은 여우는 괜스레 마음이 켕겼다.
끼잉…….
“그래, 알아들었다고 안다!”
그 말을 끝으로, 계연은 대문을 나서 저잣거리로 향했다.
오늘도 그는 손기의 노점을 찾았다. 노점 손님들이 아침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아이고, 계 선생님 오셨어요!”
손 영감이 제일 먼저 계연을 발견했다. 대화 소리로 가득했던 노점이 삽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연이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식사하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예전부터 계연과 알고 지내던 단골이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덩달아 인사를 건네던 계연이 차양 아래로 들어왔다. 손 노인은 남은 한 자리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이리 앉으세요. 계 선생님 드리려고 특별히 양 내장을 남겨두었어요!”
“감사해요. 그럼 매번 먹던 대로, 국수 한 그릇에 내장 한 그릇 주세요!”
계연이 소매를 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주문을 받은 손 노인이 조그맣게 물었다.
“계 선생님, 사람들이 그러는데, 선생께서 낮에 여우 한 마리를 구하셨다면서요?”
익숙한 사람들은 천우방의 계 선생님이 얼마나 겸허하고 예의가 바른지, 얼마나 도량이 넓은지 알고 있었다. 계연과 알고 지내던 손 노인은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궁금하기에 물어볼 뿐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심지어 국수를 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계연은 웃음이 나왔다. 시대는 달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소문을 좋아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죠.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개들한테 물리고, 사람들한테 맞고 있던 여우 한 마리가 갑자기 제 앞으로 도망쳐 오더라고요.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측은지심에 결국 구해주었습니다.”
이건 사실 어느 부잣집에서 젊은 소첩(小妾)을 들였다는 등의 이야기처럼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를 오르내리다 사라질 만한 화제였다. 여우가 비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이 일로 인해, 천우방 계 선생님을 조금 특별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계연은 아침의 일을 얼렁뚱땅 설명했다. 여우가 사람에게 빌었다는 둥, 개가 제 발로 물러났다는 둥의 신기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계 선생님은 참 선량하신 분이군요!”
장사를 해야 하기에 더는 한담을 나눌 수 없었던 손 노인은 칭찬을 건넨 뒤 일을 하러 떠났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계연이 기인이라는 확신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찼다. 손 노인은 어쩌면 그에게 해몽을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계연은 천천히 꼭꼭 씹는 습관을 잠시 접어두고,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비웠다. 이내 저잣거리에서 암탉 한 마리와 죽은 닭 한 마리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연의 손에 거꾸로 들려 있던 암탉은 겁에 질린 듯 찍 소리도 내질 못했다.
잠시 후, 거안소각의 대문이 열리고 닭과 여우가 마주했다.
꼬끼오! 꼬꼬! 꼬꼬꼬!
겁에 질린 암탉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더니,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여우 또한 돌탁자에서 내려와, 으르렁대며 날카롭고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었다.
계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재빨리 대문을 닫고 붉은 여우를 향해 죽은 닭을 휘둘러 보였다.
“오늘 네가 먹을 건 여기 있어. 쟤는 몸이 좀 괜찮아지면 먹어.”
이윽고 계연은 오랫동안 주방 한쪽에 방치되었던 낡은 닭장에 암탉을 집어넣고, 주방으로 들어가 솥에 물을 끓였다.
그는 요리할 줄을 몰랐다. 애를 먹어가며 닭을 손질한 계연은, 끓는 물에 닭을 푹 삶기로 했다.
겉보기엔 여우의 상태가 많이 회복한 듯했지만, 오늘 아침 여우의 몰골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면, 우선 잘 익힌 화식(火食)으로 속을 채우는 편이 나았다.
* * *
서서히 땅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잘 삶은 닭고기를 솥째로 돌탁자에 올려둔 계연은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검의첩을 살펴보았다.
지난 생에서 계연은 서도(書道)는 검법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검의첩을 본 이상,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계연이 가볍게 손짓하자, 발치에 떨어져 있던 얇은 나뭇가지 하나가 계연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수선자들도 이런 술법을 닦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은 내공이 높은 자들만 다룰 수 있다는 ‘격공취물(隔空取物)’ 기술이었다. 계연이 영기를 펼치면,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쉬릭! 휘이…… 우웅.
계연은 얇은 나뭇가지를 펜 삼아 마치 검처럼 휘둘렀다. 검법을 잘 모르는 계연은 자유로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잠시 기예에 빠져들었다.
계연은 영민한 감각으로 서툰 부분을 메워가며, 낚기, 걸기, 찍기, 들추기, 찌르기, 올리기, 찌르기까지, 손이 가는 대로 나뭇가지로 검술을 다루었다.
서서히 검술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구체적인 초식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계연은 지금, 마치 글을 연습하는 기분이었다. 서도(書道)는 검법과 같다더니,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 그려졌다.
이번 생의 계연은 서예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계연은 마치 검무를 추듯, 검의첩을 따라 글을 썼다.
거안소각에 일렁이는 바람은 나뭇가지의 기세를 따라 서서히 회전했다. 나뭇가지가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면, 맑은 바람 또한 덩달아 기복을 이루었다. 얼마나 신비로운 광경이란 말인가!
계연은 점점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얇은 나뭇가지는 풀로 붙여놓기라도 한 듯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계연의 손짓에 따라 정원에 불던 맑은 바람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대추나무 꽃잎을 품은 채, 서서히 정원 밖으로 흘러나갔다. 바람은 단아한 노란색 꽃잎을 두른 용처럼 천우방의 하늘을 날더니, 끝내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진한 꽃 내음에 고개를 든 영안현 사람들은 바람결이 불어온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한참 뒤에야 정원은 잠잠해지고, 어느덧 반짝이는 별들이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계연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좀 전의 그 감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통쾌하고 후련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방금 제 모습이 한눈에 반할 만큼 멋있고 대범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이 검의첩의 출처가 뭐든 간에, 방금 그 기술엔 《승천하는 용》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야겠어!”
수십 년 전, 강호의 절세 고수라 불리던 좌광도는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의 무덤 속 진귀한 비적이 계연에겐 계륵만도 못한 존재이고, 외려 자신이 임종 전 적은 검의첩이 계연에게 보물과도 같이 여겨지리란 것을 말이다.
여우는 어느새 닭고기를 먹어치우고, 멍하니 정원에서 용 한 마리를 만들어 조종하는 계연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을 따라 용처럼 날아오르는 광경은 마치 도에 통달한 것 같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붉은 여우는 강렬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 * *
평온한 생활이 다친 여우 한 마리 때문에 무너질 리 없었다. 거안소각에서 수양한 덕분에, 붉은 여우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유일하게 계연을 귀찮게 하는 건, 바로 탕약을 달이는 일이었다. 게다가 부상을 회복한 여우는 매일 같이 닭이나 오리를 한 마리씩 먹어 치우곤 했다.
처음에는 고기를 삶아주었지만, 녀석을 자연으로 방생하려면 더는 여우의 야생성을 훼손시켜선 안 됐다. 그래서 계연은 저잣거리에서 살아 있는 닭이나 오리를 사와 정원에 풀어둔 뒤, 여우가 직접 사냥해 먹도록 했다.
매일 오후, 거안소각 뒤들에선 여우가 닭을 쫓는 광경이 펼쳐졌다. 가끔 서당이 쉬는 날이면, 윤청 또한 놀러와 이를 구경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는 법이었다. 계연은 붉은 여우를 반려동물 삼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은 평범한 개가 아니라, 엄연히 영지를 지닌 여우였다. 계연은 붉은 여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규산을 바라보는 광경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
여우는 넓은 산에서 자유로이 생활하던 동물이다. 거안소각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여러 가지 규칙과 제약이 있었다. 광활한 우규산과는 비할 바가 안 되는 곳이었다.
* * *
4월 23일, 인적이 드문 깊은 밤.
붉은 여우는 정원으로 나왔다.
맑은 밤하늘 아래, 여우는 있는 힘껏 대추나무 위로 올라갔다. 녀석은 나뭇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익숙하게 지붕 위로 올라섰다.
조용히 지붕 위에 앉은 여우는 멀리 서북면에 위치한 산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돌아가고 싶구나?”
담백한 음성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란 여우가 펄쩍 뛰었다. 언제 올라온 것인지, 계연이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달은 밝은데 별은 없고, 둥지 찾는 까치들은 남쪽으로 가는구나! 너는 본디 산의 백성이니, 좁은 성곽에 갇혀 지낼 필요 없다. 내일 내가 너를 집으로 데려다주마!”
끼잉…….
붉은 여우는 계연과 헤어지기 아쉬웠다. 다정한 계연도 좋았지만, 거안소각은 수련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매일 계연이 천지의 영기를 퍼뜨릴 때마다, 녀석은 단시간 내에 영기를 흡수하며 더욱더 강해질 수 있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여우를 보니, 계연은 녀석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탐욕을 버려야 하고, 여우와 요괴도 마찬가지야. 나 계연의 자유와 여우인 네 자유는 매우 달라. 너는 이곳보다, 넓은 들판과 산속에서 뛰노는 걸 더 좋아할 거야.”
계연은 육 산군처럼 조예가 깊은 요괴에 비하면, 이 여우는 영지를 지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요괴나 인간보다 야생성이 더 짙어서, 작은 울타리에 갇혀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버리는 게 있어야 얻는 것도 있는 법이지. 나조차도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떻겠어?”
그 말을 마친 계연은 마치 버드나무 잎처럼 지붕 아래로 풀쩍 내려가, 이만 잠을 청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