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6화 (36/892)

36화. 이름을 지어주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무렵이 되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다.

계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 관아에서 멀지 않은 영안서당에 도착했다.

백 평 정도 되는 크기의 서당은 담벼락에 빙 둘러 있었다. 정원 안에는 새하얀 벽에 검은 지붕을 한 2층짜리 누각이 하나 서 있었다. 대나무로 장식된 조경 또한 썩 괜찮았다. 영안현 관아와 향신들이 서당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계연은 윤청을 데리러 서당을 찾았다. 아이는 붉은 여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계연은 여우를 산으로 방생할 때, 윤청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재성이 동의한다면, 윤청을 데리고 교외로 나갔다 올 계획이었다.

“효도가 으뜸이고, 신뢰가 다음이다. 부모의 부름에는 게을리하지 않고, 부모의 가르침은 순종하며 따른다…….”

멀리서 학동(學童)들의 낭독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과거 계연이 알고 있던 고대 시대가 아니었지만, 문화적인 배경이 십분 닮아 있었다. 일부 문학서적은 달라도, 가르치고자 하는 소양이 같고, 내용 또한 엇비슷했다.

서당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대부분 점심시간을 맞아 어린 영식(令息)을 데리러 온 대갓집 하인들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는 학동들은 점심거리를 싸서 오곤 했다.

이 서당에 아이를 보내는 정도라면, 집안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도 차이는 있었다.

계연은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했다. 그가 가까워지자, 서당 안에서 들려오던 낭독 소리가 뚝 멈추었다. 서당의 학동들이 차례대로 문을 나오더니, 서당으로 향하는 계연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몇몇 학동들은 조그만 소리로 수군대며 계연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계 선생님!”

윤재성과 함께 걸어 나오던 윤청이 계연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윤재성 또한 계연과 마주하며 서로 공수했다.

“훈장님. 붉은 여우의 상태가 많이 회복해서, 곧 녀석을 산에 방생할 계획입니다. 윤청도 함께 데려가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한나절 만에 돌아올 겁니다.”

‘방생?’

윤재성도 그 여우를 본 적이 있었다. 어찌나 대단한 영물이던지, 곧 있으면 요괴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아들이 계연과 동행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석 달 동안 봐온 결과, 계연은 뛰어난 인품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자였다. 다만 자신도 그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윤재성은 서당의 훈장인데, 학동들을 내팽개치고 뛰쳐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선생님의 부탁인데, 당연히 괜찮지요!”

“앗싸!”

윤재성의 승낙을 들은 윤청은 하마터면 신이 나 펄쩍펄쩍 뛸 뻔했다.

안 그래도 계연의 물음에 들떠있던 윤청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얌전한 척을 했다. 만일 아버지가 ‘안 돼’라고 말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즐거워하는 아들을 보니, 윤재성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점잖지 못한 윤청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윤청에게 영기가 있다는 계연의 말을 듣고 나니,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포용하기로 했다.

* * *

그 무렵 서당 옆에서는 영안현 현승이 사람 셋을 데리고 현 관아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관아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짧은 수염에 비쩍 마른 몸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바로 현승이었다. 지금 그는 관복이 아닌, 장포에 유관(*儒冠: 유생들이 쓰던 예관)을 쓰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선 두 사람은 비단으로 만든 경장(勁裝) 차림을 하였고, 살짝 퉁퉁한 체격의 사람은 펑퍼짐한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묘외루에 술상을 차려두라 하였습니다. 마차에 타시지요!”

“예, 고맙습니다 현승 어르신!”

“아닙니다!”

퉁퉁한 체격의 사내와 인사치레를 나누던 현승은 멀리서 윤재성과 공수하는 계연을 발견했다.

얼마 전 현을 장악했던 기이한 소문의 주인공인 계연을 현승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계연은 거안소각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고 있지 않던가.

현승은 저도 모르게 한참 동안 계연을 지켜보았다.

“현승 어른, 어디를 그리 보십니까? 저 두 사람을 보십니까?”

퉁퉁한 체격의 사내가 현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서당 앞을 바라보았다.

“아, 별일 아닙니다. 하얀 장포에 유관을 쓴 자가 저희 현에 있는 서당의 윤 훈장입니다. 학문이 상당히 깊지요. 저기 푸른 장포를 입은 자는 저의 현의 기인입니다.”

퉁퉁한 체격의 사내가 현승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기인이요?”

현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기인이요!”

곧이어 현승이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현승이 퉁퉁한 체격의 사내에게 붉은 여우가 앞발을 싹싹 빌었던 일을 대강 설명하자, 퉁퉁한 체격의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여우가 사람에게 목숨을 빌고, 개는 사람의 경고에 물러났다고요? 정녕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하하하,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마도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요. 다만, 현령께서 계 선생이라는 자는 절대 범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서당 앞에 서 있던 계연은 한창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곧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계연은 대수롭지 않게 윤청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얼빠진 듯 서 있던 현승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위(魏) 가주(家主), 이만 묘외루로 가시죠!”

“아, 예. 현승께서 앞장서시지요!”

* * *

영안현에서 우규산과 가까운 곳은 수선진과 산기슭의 촌락 몇 군데가 전부였다.

이번에 계연은 윤청과 여우를 데리고 좁은 길을 따라, 산촌에서부터 우규산으로 향했다.

계연과 함께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친 윤청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들뜬 걸음으로 계연을 따라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계연의 품에 숨어있던 붉은 여우는 마을을 벗어난 뒤에야 땅으로 내려와 계연을 따라 걸어갔다.

영안현에서 우규산 산기슭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십수 리(*약 3~7km) 정도로, 현재 계연의 속도라면 일각(*一刻: 약 15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우와 윤청이 있으니, 슬슬 주변을 구경하며 걸어가기로 했다.

이 시대의 어린이, 특히 윤청 같은 학자 집안의 자제들은 먼길을 떠날 기회가 드물었다. 다 같은 영안현이었지만, 윤청에게 산촌의 풍경은 유난히도 매력적이었다.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체력이 바닥나질 않았다. 힘이 들어도 약간의 휴식이면 또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더군다나 타고난 체질이 특별한 윤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레를 보며 헤실헤실 웃다가, 밭에 달려들어 닭과 벌레를 잡아 여우에게 알랑거리기도 하고, 또 촌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강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게다가 간혹 광활한 밭과 숲을 향해 큰 소리로 ‘야호’ 소리치기도 했다.

계연은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윤청이 아무 걱정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간식거리도 아낌없이 준비했다.

먹고 마실 게 충분하고, 개까지…… 아니, 여우까지 있으니 더 바랄 게 어디 있겠는가!

놀며 걷다 보니, 한 시진 반(*一時辰半: 약 3시간) 정도가 지났다. 두 사람과 여우는 드디어 우규산 산기슭에 도착했다. 산행가가 내놓은 산길을 따라 또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정도를 오르자,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나타났다.

산에 오른 계연은 윤청을 뛰어다니지 못하게 했다. 만에 하나 독충이나 독사에 물리면, 윤재성을 볼 면목이 없을 테니 말이다.

산에서는 촌락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언덕이 높진 않았지만, 수많은 나무와 커다란 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계연은 한참 전부터 흥분 상태였던 붉은 여우를 보며 깊숙한 숲속을 가리켰다.

“이제 가봐. 앞으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여우야, 나를 절대 잊으면 안 돼! 절대로!”

감정을 꾹꾹 참아왔던 윤청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청이도 잊으면 안 돼.”

생긋 웃음 짓던 계연은 만감이 교차했다. 윤청의 모습을 보니,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손에서 키워지다 죽어버린 거북이 세 마리와 토끼 두 마리, 그리고 앵무새 한 마리가 떠올랐다.

대답하듯 울음소리를 내던 붉은 여우는, 계연의 옆을 지나서 폴짝폴짝 바위 위로 올라섰다. 이윽고 뒤를 돌아 계연과 윤청을 한참 바라보던 녀석의 눈에는 사람의 감정을 쏙 닮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계연과 윤청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여우와 시선을 맞추었지만, 여우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여우가 떠나기 싫은가 봐요!”

“우리를 먼저 보내려는 걸지도 모르지.”

계연은 긴 설명 없이, 연신 뒤를 돌아보는 윤청을 데리고 산길을 내려왔다.

몇 걸음 나아가던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 여우는 여전히 바위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내가 선물을 하나 더 줄게…….”

하늘에 뭉게뭉게 뜬 구름을 보던 계연이 붉은 여우에게 말했다.

“레벨업을 한 것 같으니, 더는 우둔한 짐승이라 할 수 없겠지. 다른 건 몰라도, 네게 이름만큼은 꼭 있어야 해.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 너를 호운(胡雲)이라고 부르마!”

계연의 말에 붉은 여우의 눈이 번뜩였다. 녀석은 앞서 계연이 당부했던 것도 잊은 채, 윤청이 보는 앞에서 계연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게 아니겠는가!

“와! 계 선생님, 여우가 진짜 절하네요! 우와아!”

계연의 말투가 어째 희한하다고 생각하던 윤청은 붉은 여우가 절하는 모습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하하, 이만 돌아가자!”

계연은 윤청의 등을 토닥이며, 놀라움에 슬픔을 잊은 아이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계연도 윤청만큼이나 여우의 감사하는 모습에 뿌듯하긴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미소짓는 것 이상으로 기뻤다.

그리고 살짝 아리송하긴 했지만, 조금 전 소매 속에 가려진 팔에 또다시 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바둑알 하나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 것 같았다.

* * *

힘들었던 것인지, 돌아오는 길에 윤청은 계연의 등에 업힌 채로 곯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계연은 마을로 돌아오는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었다. 계연은 영기를 사용해, 순식간에 영안현 안으로 들어왔다.

윤청을 제집에 돌려보냈을 땐, 식사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정말로 한나절도 되지 않아 돌아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계연은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평상복인 푸른 장복 대신 소매통이 좁은 수수한 옷을 입고, 제멋대로 풀어헤친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계연은 경공을 사용해 펄쩍 뛰어올랐다. 대추나무 가지의 탄성을 빌려, 거안소각 밖으로 뛰쳐나간 그는 여러 집채의 지붕을 발판 삼아,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났다.

계연은 두 가지 간단한 은신술만 다룰 줄 알았다. 하나는 형체를 숨기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엽장목(一葉障目)이란 기술이었다. 이 기술들을 정의하기는 조금 어려운데, 계연은 이 기술들을 적절히 써먹을 수 있었다.

은신술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가리거나, 이목을 돌리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은신술에 과도하게 의존해서도 안 됐다. 최소한 계연은 자신이 형체를 숨긴다고 투명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일엽장목이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위 일엽장목에서 ‘일엽’은 작은 사물을 뜻했다. 일엽장목은 작은 사물로 시선을 미혹하여 전체적인 모습이나 진상을 숨기는 것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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