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강호의 무뢰한
계연은 자신의 앞머리 몇 가닥을 이용해 일엽장목을 부렸고,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의 다른 모습은 똑바로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엽’ 역할을 하는 앞머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술법은 사소하지만, 꽤 믿을 만한 것이었다.
계연이 지금 다급히 문을 나서는 까닭은, 그가 돌아오는 길에 멀리 도로를 내달리는 마차 한 대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두 사람은 오늘 정오 무렵에 현아 입구에서 보았던 가벼운 옷차림의 사내들이었다. 계연이 당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똑똑히 들었으니,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물론 계연은 그 사람들이 뒷담을 했으니 보복해야 한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나쁜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정오 무렵 현승과 그 퉁퉁한 사내의 대화 소리에 무심코 그들을 본 계연이, 퉁퉁한 사내의 옷깃에서 어슴푸레하게 반짝이던 신기한 빛을 본 것이었다.
그것은 퉁퉁한 사내 본연의 것이 아닌, 몸에 지닌 비범한 물건으로 인한 빛이었다.
현재 계연은 도를 닦는 것에 굶주린 상태였다. 그는 온 사방을 누비며 비법을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이성으로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는 지금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최소한 두 눈으로 직접 그것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다만, 그들이 정오 무렵에는 분명 다음 날 떠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마차를 몰고 도로를 나서고 있었다.
주변의 바람이 끊임없이 계연의 볼을 스쳤다. 마을에서는 나름 자제를 하였지만, 마을을 벗어난 계연은 온몸을 움직여 자신이 기억하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이각(*二刻: 약 30분) 정도가 지나자, 영안현을 벗어나려는 마차가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무렵, 하늘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계연은 소리 없이 마차에서 멀리 떨어져서,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싸맸다.
‘그냥 쫓아가서 좋게 말을 걸어볼까?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아니면 마차를 수색한다고 하면서 물어볼까? 조금 험상궂게 굴면서?’
계연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험상궂은 표정을 잔뜩 연습한 그는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계연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도로 왼쪽 숲에, 짙은 색의 삼배옷을 입은 그림자 여러 개가 나타나더니, 마차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안 돼! 도적이잖아!”
두 호위무사가 말의 등을 때려 속도를 높이자, 습격자들이 달려들었다.
누런 경장 차림의 사내는 말의 등에서 일어서더니, 말의 몸을 박차고 뛰어올라, 불끈 쥔 주먹으로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도적을 거칠게 내리쳤다.
“죽어라!”
탕!
상대의 칼등이 묵직한 주먹을 막았다. 칼은 순식간에 주먹을 가르고 예리한 칼날로 상대의 몸에 끔찍한 자상을 냈다.
쉬릭, 쉬릭, 푹!
도적은 세 번의 칼부림으로 호위무사의 주먹을 막아냈다. 그중 하나는 호위무사의 어깨에 새빨간 혈흔을 그렸다.
“안령도! 설마 항동, 13인의 연지도적……?!”
누런 옷차림의 호위무사가 동시에 공격을 퍼붓는 두 도적을 피하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얼핏 보니, 그의 동료는 이미 네 명에게 공격을 받으며,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료의 몸에는 자상이 가득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칠게 발길질을 당한 호위무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는 마차에 ‘퍽’ 소리를 내며 내리꽂혔다.
“마차를 세워라!”
한 도적이 맹렬하게 소리쳤다.
“아이고……!”
마부가 재빨리 고삐를 당기더니, 온몸을 벌벌 떨며 미동도 하지 못했다. 마차 안의 사람은 더욱이 겁을 먹어, 찍 소리도 내질 못했다.
항봉은 지나치게 긴장한 두 호위무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손에 칼을 쥐고 웃으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위무외(魏無畏), 위씨 가문에 요사스러운 기운을 쫓는 남옥(藍玉)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고 들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겠지?”
마차 안에 있던 퉁퉁한 체격의 사내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뒤,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위무외는 13인의 연지 도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무예가 매우 뛰어난 극악무도한 도적들이었다. 그들과 마주쳤을 경우, 웬만하면 고집을 부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들었다.
“항, 항 대협! 그 남옥은 사실 선조께서 물려주신 평범한 장신구에 불과하오. 그런 신기한 효력 같은 건 있지도 않소. 당신들은 돈을 원하시오?, 아니면 보석을 원하시오? 내 당신들이 만족할 수 있는 한, 뭐든 드리겠소!”
위무외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날이 어둑어둑했지만, 그가 얼마나 놀라고 겁을 먹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칼날에 위협을 당하는 호위무사를 보니, 그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7인의 도적은 마차를 에워쌌다. 항봉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염도 없고, 체격도 퉁퉁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돈이야 당연히 좋지. 그럼 이리하지. 5천 냥에 너희 셋의 목숨을 사는 건 어때? 그 남옥은 신비한 효력이 있든 없든 간에, 내가 가져가야겠어!”
항봉은 천천히 위무외를 향해 다가갔다.
“항, 항 대협, 난 정말…… 내가 위씨 가문의 가주이긴 하나, 조부님께서 정해주신 자리일 뿐이오. 그 남옥 또한, 다음 달 15일에 있을 가족 연회에서 물려받을 예정이었소! 정말 나한테 없단 말이오!”
항봉이 비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 네놈이 죽고 싶은 거지?”
사실 항봉은 위무외에게 남옥이 있든 없든, 셋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위무외는 잠시 써먹을 일이 하나 있었다.
도적이 서서히 다가오자, 겁에 질린 위무외는 몸을 파르르 떨며, 재빨리 제 옷깃을 어루만졌다.
“자, 자, 잠, 잠깐! 말로, 말로 하시오. 남옥은 여기, 여기 나한테 있소!”
그는 퉁퉁한 손으로 허겁지겁 목에 달린 붉은 끈을 손에 걸었다. 짙은 남색의 옥 장신구가 그의 옷깃에서 나와 정체를 드러냈다.
“이…… 이걸, 드리면 되지 않소!”
남색의 옥은 본래 보기 드문 장신구였다. 하물며 이것은 보자마자 비범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황혼녘의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에서도 굉장히 선명하게 빛을 내었다.
항봉은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살며시 떨리는 퉁퉁한 손이 남옥을 건네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남옥에 손을 댄 그 순간,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죽을 만치 두려워하던 위무외가 돌연 오른손 손가락으로 은침 세 개를 쏘아 날렸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간 은침은 푹푹푹, 그대로 항봉의 가슴팍에 명중했다.
곧이어 위무외는 왼손에 매섭게 힘을 실어, 항봉의 가슴을 그대로 타격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듯이 주변에 거친 폭풍이 몰아쳤다.
쿵!
안령도마저 놓친 항봉은 그대로 20척(*약 6m) 밖까지 날아가더니 온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두령!”
“두령!”
나머지 도적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위무외는 조금 전의 덜덜 떨던 모습을 벗어던진 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아직 넋을 놓고 있던 그때, 사나운 말 한 필이 두 호위무사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도적에게 달려들었다.
“꺼져!”
도적이 휘두르는 칼을 잽싸게 피한 그는 양손을 이용해 흉맹스러운 장력을 선보였다.
쿵!
쿵!
도적 둘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퉁퉁한 체격의 사내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 뒤를 쫓았고, 두 도적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공격을 가했다.
쿵!
쿵!
“커어억……!”
“커헉…….”
비범한 무공을 지닌 도적 둘이 시뻘건 피를 토하며, 30척(*약 9m) 밖으로 나뒹굴었다. 숲 한쪽에 내리꽂힌 그들은 숨이 끊어지고야 말았다.
“일곱째, 여덟째!”
“개자식!”
“짐승 같은 놈!”
위무외의 몸놀림은 굉장히 민첩했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 두령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적 둘을 죽였다.
“크억! 흐욱…….”
항봉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극심한 구역질과 마비가 동반되는 것을 보니, 은침에 맹독이 묻어 있던 게 틀림없었다.
“위, 위무외……. 네, 네놈이……어찌…….”
맹독은 빠르게 작용했다. 게다가 장력의 힘이 몸속까지 영향을 미친 것인지, 제아무리 항봉이라도 말조차 이을 수 없을 정도로 힘에 부쳤다.
“무공을 할 줄 아냐고?”
위무외가 뒤로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놀랐느냐? 후회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느냐? 으히히히, 난 네놈의 그런 표정이 제일 좋구나!”
위무외의 웃음은 비열하기까지 했다. 방자하게 굴던 나머지 도적들이 항봉의 옆으로 가, 그에게 환약을 하나 먹였다. 사기를 회복한 위무외는 잔뜩 긴장한 도적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친 호위무사들도 이 상황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위무외의 곁에 섰다.
“항봉, 네놈이 없으면, 나머지 도적들은 내 적수가 되지 않아. 내 너희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 너희에게 위씨 가문의 남옥에 대해 알려준 자가, 번씨 가문의 검의첩에 대해 알린 자와 같은 사람이 맞느냐?”
“하하. 크흑……! 말하면, 우리를 풀어주겠다고?”
항봉이 약효를 끌어올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위무외는 너희들 같은 강호의 무뢰한들과 달라. 공명정대하게 행동하고,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킨다는 도리를 잊지 않지!”
조금 전까지 겁먹은 척하던 위무외가 독침을 사용하고, 치명적인 장력을 휘두르는 것을 목격한 항봉과 도적들은,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계연은 입이 쩍 벌어졌다. 위씨 성을 가진 자가 제 실력을 감추고 있을 줄이야. 공명정대하긴 무슨,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호의 무뢰한이지 않은가!
지금 위무외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통쾌했다. 줄곧 평범한 사람 행세를 하느라 축적된 억압감이 단번에 폭발하니, 얼마나 후련하겠는가. 항봉이 시간을 끌려고 하자, 그는 긴말 없이 천천히 움직이며 두 손으로 장풍을 일으켰다.
“도적 넷을 먼저 죽인 후에, 항봉을 추궁하기로 하지!”
“예!”
“예!”
우렁차게 대답한 호위무사 둘은 위무외와 함께 도적들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바로 그때!
슉슉슉-.
세 번의 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다가왔다.
위무외 일행이 재빨리 공격을 피하던 찰나, 검은색의 야행복을 입은 사람 둘이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그들은 관목의 얇은 가지를 밟고 마치 새처럼 날아, 위무외를 비롯한 사람들의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놀라운 경공에 당황을 금치 못한 위무외는 한껏 긴장했다.
‘실력을 헤아릴 수 없는 고수 둘이 더 있다니. 그런데 왜 처음부터 나와서 공격하지 않은 것이지?’
“지난번에는 검의첩을 잃더니, 이번에는 위무외에게 공격을 당하는 게, 13인의 연지 도적은 진정 폐물만도 못하구나. 우리가 아니었으면, 이미 위무외에게 덜미를 잡혔겠어!”
“얼른 해결하고 가지.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을 마친 한 사람이 마치 귀신처럼 걸어오더니, 냉혹한 공격을 선보였다. 그는 지법(指法)으로 위무외를 찌르고, 나머지 한 사람은 호위무사들을 공격했다.
위무외는 미친 듯이 도망쳤지만,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손을 쭉 뻗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고수와 두 손이 맞닿자 마치 물주머니가 찢어지듯,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힘겹게 고통을 참던 위무외는 다리에 온 힘을 실어 몸을 지탱했다. 위무외의 퉁퉁한 몸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는 제 오른손 손바닥이 서서히 들춰지는 것을 발견했다.
‘젠장, 오늘은 안 되겠어!’
위무외가 이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 상대는 괴이한 걸음으로 위무외에게 다가왔다. 위무외는 좁고 빠른 보폭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상대는 마치 그림자처럼 위무외를 쫓아오며 그의 눈을 가리켰다.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