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8화 (38/892)

38화. 희미한 종적

쉭.

광풍이 몰아쳤다. 위무외가 ‘이대로 눈을 잃겠구나’라고 생각한 그때, 어디선가 회색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타난 이는 손발을 번갈아 휘두르며, 지법을 선보이는 야행복 차림의 사내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파바박! 쿵 쿵!

* * *

방금의 활극을 지켜본 계연은 무림을 달리 보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험악한 강호가 아니던가. 예전에 자신이 보았던 아홉 협객은 한낱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수중에 칼도 없으니, 계연은 애초부터 검법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철형전첩에서 보았던 권법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주먹 내리꽂기, 찌르기, 발 걸기, 방해하기, 팔 돌리기, 발차기……. 여러 동작이 마치 비바람처럼 순식간에 몰아쳤다!

이런 계연의 개입에 모든 이가 당황했다. 머리를 올려 묶고 회색 옷을 입은 사내, 계연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손으로 지법을 쓰며 위무외를 간단히 상대했던 사내는, 두 손으로도 계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계연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그의 눈이 계연의 동작을 따라가질 못했다.

단 몇 수만에 검은 옷의 사내는 두 팔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검은 옷에 가려진 그의 손가락과 손바닥, 팔뚝은 이미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그는 안간힘을 쥐어짜며 버텼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사내는 방어만 할 뿐, 더는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 상대의 손발은 마치 두꺼운 쇠기둥처럼, 여태껏 그가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고통을 그에게 선사했다. 몸을 지탱하는 진기마저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

상대의 약점을 포착한 계연의 영기가 샘솟았다. 계연은 주먹을 내리꽂은 뒤,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움직이며 순식간에 사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내가 마음을 졸이며 불안해하던 그때, 계연은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 또한 놀라울 만큼 빠르게 반응하였다. 그는 왼손으로 장도(掌刀)를 휘둘러 계연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도리어 삽시간에 계연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계연의 다섯 손가락이 상대의 겨드랑이를 꽉 쥐었다.

두둑-!

검은 옷의 사내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계연은 그의 왼쪽 어깨를 높이 찔러 들었다.

계연은 그와 동시에 응조(*鷹爪: 독수리가 사냥하는 동작을 본떠 만든 권법) 자세를 취한 손으로 상대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훑고 내려왔다. 상대의 팔을 사정없이 비틀면서 말이다.

뚝, 두둑, 뚝-!

뼈마디에서 세 번에 걸쳐 소리가 났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사내의 왼팔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사내의 발치로 어렴풋이 회색 그림자가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쿵! 뚜둑!

이번에는 사내의 왼쪽 다리뼈가 어긋났다. 미처 그가 반응할 새도 없이, 계연은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그의 오른편에 나타났다.

뚜두두둑!

이제는 사내의 오른팔 손목부터 어깨까지, 완전히 탈구되고 말았다.

이 순간, 마침내 상대를 굴복시켰다는 생각에 계연은 흥분하면서도 긴장했다. 계연이 돌연 국수를 말아 올리듯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다른 고수들과 도적들이 사내를 도울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큭…… 커억……!”

계연의 손에 붙잡힌 사내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허덕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레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매번 들이쉴 때마다 온몸에서 격렬한 통증이 전해지는 게,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 * *

순식간에 주변이 괴이한 적막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신비로운 고수를 지켜보았다.

회색 무명옷 차림에 간단히 올려 묶은 머리, 짙은 모반(*母斑: 자연적으로 살갗에 나타난 얼룩무늬나 반점. 사마귀, 점, 주근깨 따위를 이른다.)에 뒤덮인 듯한 까무잡잡한 얼굴.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한 마디로 위험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한참이 지나, 또 다른 검은 옷의 사내가 눈에 띄게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철형공(鐵刑攻)! 실로 맹렬한 공세를 보이는 손속이구려. 당신은 어느 문하(門下)의 고인이시오?”

사실 위무외를 포함한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방금 저자의 흉포하기 짝이 없는 공격을 보고도 어찌 겁먹지 않을 수 있으랴. 저자는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깊은 내공을 지닌 고수를 물리치지 않았던가.

상대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무외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 * *

“후…….”

계연은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첫 대결의 흥분감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예를 익힌 시간은 몇 달도 안 되었지만, ‘진기’를 대체하는 ‘영기’라는 힘과 속세를 벗어난 재능이 어우러지니, 퍽 괜찮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굉장한 실력일지도 몰라!’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었다. 계연은 결투 후 공포에 찬 누군가의 목소리와 긴장하는 듯한 주변 사람들의 호흡과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이에 근거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다소 거칠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검은 옷의 사내도 선량한 자는 아니지 않았는가.

방금 계연이 선보인 무예가 고수의 것으로 인정받는 건 당연했다. 아니,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계연이 상황을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검은 옷 사내의 입에서 ‘검의첩’ 석 자가 나올 때, 계연은 놀라 움찔했었다. 어쩌면 계연이 집에 보관해두고 있는 그 두루마리를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긴, 생전 우규산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호랑이 요괴 육 산군이 무도와 검의를 담은 두루마리를 쉽게 구해올 리가 없었다. 딱 봐도, 근래 어디에선가 검의첩을 주워 온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아하니 도적들은 위씨 가문의 남옥까지 약탈할 생각이었고, 뒤에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는 소위 ‘연지단(*13인의 도적이 있는 집단)’이라 불리는 자들과 같은 진영의 사람인 듯했다.

이 사내 둘은 계연이 보기에 13인의 도적보다 높은 지위를 지닌 게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13인의 도적은 찍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13인의 도적은 검은 옷의 사내들이 자신들의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았다.

이에 제삼자였던 계연은 본능적으로 조직적인 음모론을 떠올렸다.

지난 생에 보았던 영화와 문학 작품들 덕분에, 계연은 이런 일에 연루되면 골치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모두 검의첩과 남옥 같은 물건을 노리고 있노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계연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또다시 영기를 퍼뜨린 계연은, 철형전첩에 나왔던 진기를 이용한 음성변조술을 사용하며, 목구멍에 약한 진동을 주었다. 계연이 입을 열자, 낮고 거칠지만 힘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 가주, 이들에게 원한을 샀습니까?”

흠칫 놀란 위무외는 몇 초 뒤에야 그것이 자신을 향한 질문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으로선 저자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철형공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러한 무예를 저토록 훌륭하게 구사하는 고인이라면, 도적 같은 악인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자일 터이다.

“대인,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저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우리 위씨 가문 또한 본디 선한 일을 하여, 여러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어 왔지요. 만약 풀지 못한 원한 관계가 있었다면, 가주인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위무외는 결심하였다. 어차피 남옥의 존재를 들켰으니, 속으로만 곱씹던 추측을 입 밖에 꺼내기로 말이다.

“더구나 저희 위씨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남옥에 대해 아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한데, 저들은 다짜고짜 남옥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요. 마치 미리 준비하고 온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에 번씨 가문의 정원부에 있던 검의첩에 손을 댄 것도, 저들 13인의 도적이었습니다. 저들에겐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음, 일단 저들을 제압한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계연의 말에 또 다른 검은 옷의 사내와 도적들이 정신을 번뜩였다.

곧이어 가만히 서 있던 계연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옷 사내의 앞으로 다가왔다. 계연은 또다시 주먹을 내리꽂았다.

계연의 공격에 위무외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는 두 명의 호위무사와 함께 나머지 연지단 도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연과 맞붙은 뒤에야, 또 다른 검은 옷의 사내는 상대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단 몇 초 사이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났고, 통증에 허덕이던 그의 두 팔은 제대로 된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버거웠다.

“당신, 정말 우리를 몰살할 셈이오? 정녕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지 않소? 부귀영화와 고관후록(*高官厚祿: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을 누릴 수 있소!”

계연이 자신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사내가 냅다 소리쳤다.

“정녕 천하를 내려보는 선인이 되고 싶지 않단 말이오?”

그러자 계연은 공세를 낮출 뿐 아니라, 괴이하게 수법을 바꾸기까지 하였다. 오른팔을 칼처럼 만들어 철형전첩에 기록되어 있던 검법을 펼치던 계연은, 멀리 도망치려는 검은 옷 사내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계연은 상대가 미처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검법을 펼치며, 공격을 방어하던 사내의 두 손을 뚫고 가슴 정중앙을 가격했다.

퍽!

검은 옷의 사내가 멀리 날아가자, 계연은 이를 뒤쫓아 공중에 떠오른 사내의 다리를 붙잡았다.

“헛!”

마치 몽둥이처럼 휘둘리던 검은 옷의 사내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리꽂혔다. 이제 모든 힘을 잃은 그는 경련하듯이 몸만 떨었다.

때마침 위무외와 두 명의 호위무사도 결투를 끝마쳤다. 나머지 네 명의 도적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선인?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나를 속이려는 건가?”

계연이 바닥에 쓰러진 검은 옷의 사내를 향해 냉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크윽……. 선인의 종적이…… 희, 희미하나,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오……. 들리는 이야기로는, 좌광도가 이미 입도(入道)했다 하오. 위, 위무외에게……남옥의…… 커헉……. 유래를 물어보시오…… 결, 절대 평범치 않으니…….”

검은 옷의 사내는 몸 전체를 휘감는 고통을 참으며, 애써 말을 끝마쳤다. 수년간 어렵게 품어온 소망을 이대로 망칠 수는 없었다!

“위 가주,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남옥의 근원이 무엇인지요?”

신비로운 고인의 말에 위무외의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남옥에 관한 일이 비밀이긴 하지만,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대인께선 모르실 겁니다. 가문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저희 가문의 조상께서 오래전에 선학(*仙鶴: 두루미) 한 마리를 구하셨다고 합니다. 얼마 후, 선학이 선조께 은혜를 갚기 위해, 입에 옥을 물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남옥은 대대로 저희 가문에 전해져 내려왔고, 지금 저 위무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저희 집안의 어르신들께서는 이 옥을 몸에 지니면 악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건 전해져 내려오는 풍문에 불과합니다. 조금도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위무외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선인이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대정(大貞)의 정원제(正元帝)께선 반평생 선인을 찾고자 하시다가, 안타깝게도 오히려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습니다. 검선이라 불린 좌광도도 한을 품고 죽지 않았습니까?”

위무외는 선인이 된다는 게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설령 저들이 검의첩과 좌광도의 절세 비적을 찾아내고, 남옥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선인이 될 수 있겠는가? 천하를 휘두르는 권력을 지닌 황제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고작 저런 사람들이?

“실로 가소로운 이야기지요. 차라리 절을 찾아가 신께 비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저 위무외가 이런 미치광이들에게 습격을 당하다니, 실로 황당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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