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0화 (40/892)

40화. 광도라는 이름이 손색없는

이튿날, 날씨는 여전히 화창했다. 옷을 챙겨 입고 세수를 마친 계연은 경외심을 지닌 학생처럼 방 안 탁자 앞에 앉아, 다시금 꼼꼼히 검의첩을 살펴보았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문방사우만 놓여 있었다. 모두 윤재성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리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손에 닿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역시 엄선해 고른 선물이 분명했다.

그의 눈에 검의첩은 여전히 현묘한 문자 예술에 불과했다. 물론 그는 검의첩의 내용을 꿰뚫고 있었지만,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마 물에 담그거나, 불에 태워야 하나?’

계연은 검의첩을 벽에서 떼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검의첩의 종이를 만져 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선지(宣紙)에 불과하여, 한참 동안 헤아릴 가치도 없었다.

‘축에 있나?’

손가락으로 아래위를 쓱쓱 긋자, 두루마리 축 부위의 얇은 나무 막대가 저절로 떨어졌다. 계연이 막대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아니면 안쪽에?”

계연이 손가락 힘을 이용해, 나무 막대의 가장자리를 힘차게 튕겼다.

쩍!

그러자 나무 막대가 세로로 쩍 갈라졌다. 그 안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 냄새까지 맡아 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무래도 글자 본연의 내용에서 찾아야 하는 듯했다.

사실 계연의 시력으로는 평범한 종이 재질의 서적을 읽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이 검의첩이 특별하게도 심오한 검의를 담고 있는 덕분에,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기, 특히 검을 좋아했다. 6살에 목검을, 12살엔 철검을 얻었다. 기세가 드높았던 스물에는 비록 새로운 검을 얻지 못하였으나, 내 검술은 독보적으로 예리해져 부(府) 전체를 밝힐 냉혹한 빛을 지니게 되었다……. 내 나이 여든, 지금껏 긴 인생의 길을 걸었으나, 무도의 끝은 어디인가? 하늘에는 진정 선인이 있는가? 검으로 글을 쓰는 건 절대, 절대, 원하던 게 아닌 것을…….”

계연은 조용히 검의첩을 완독하며,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이 검의첩을 쓴 무도의 기재가 아직 살아있을지 궁금했는데, 검의첩을 읽고 나니, 그자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수십 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휴, 안타까워라……. 그래도 말은 똑바로 설명하고 가셔야죠!”

탄식을 내뱉던 계연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검처럼 휘두르자, 검의첩 앞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났다. 편안한 마음으로 무의식중에 한 동작이었기에 계연은 놀라고야 말았다.

계연은 검세를 움직였다. 이번에는 마음대로 손가락을 휘둘렀던 좀 전과 달리, 문자와 행간을 순서대로 훑고 지나가며 검의에 따라서 손가락을 휘둘렀다.

비록 선인에 가까운 기운과 자연스러움은 사그라들었지만, 숱한 싸움을 벌이는 듯한 날카로움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좌 대협이 평생에 걸쳐 그려온 궤적에 따라 검의를 펼치니, 기묘한 감각이 계연의 몸에서 샘솟았다.

맹인의 몸을 한 계연은 몸의 기억을 빌려, 머릿속에 검의 궤적과 시간, 지명 등을 한데 나열했다.

‘잠깐, 이거 지도잖아?’

한참 동안 헤아린 뒤에야 이를 알아차린 계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검술의 난이도가 높다니. 좌대협이 세상을 떠나고 몇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무예를 이어받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본인처럼 뛰어난 재능과 지혜를 타고난 사람만이 자신의 검술을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이거, 진짜 멋있잖아!’

계연은 ‘재능이 출중한’ 자신이 아니었다면, 검의첩이 썩어 없어질 때까지 아무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천운을 타고난 자가 우연히 이 절세의 검법을 발견하거나 말이다.

“역시 좌광도라는 이름 석 자가 손색없어!”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은 계연은 마음을 푹 내려놓고, 좌광도의 절세 검법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검의첩 하나로 검술의 오묘함을 깨닫다니, 이 검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고 기묘한 게 틀림없었다!

똑똑.

“계 선생, 윤재성이오. 안에 계시오리까?”

대문 너머로 윤 훈장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연이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니, 시간은 어느덧 한낮이 되어 있었다.

거안소각을 찾아온 윤재성의 손에는 찬합 하나와 천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계연이 식사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윤재성은 일부러 점심시간이 되기 조금 전에 찾아왔다. 아내가 만든 맛 좋은 음식들과 화조주 한 단지를 들고서 말이다.

윤재성은 이제 계연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벗과 함께 연구하고 공부하려는 기쁜 마음으로 거안소각을 찾아오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연이 정원 문을 열었다.

“윤 훈장님, 어쩐 일이세요?”

“하하, 오늘 하루 서당이 쉽니다. 혹시 제가 방해한 겁니까?”

계연 또한 생긋 웃음을 지었다. 향긋한 음식 냄새를 솔솔 풍기며, 뜨거운 열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는 찬합을 보니, 맛 좋은 음식이 한가득 담긴 듯했다. 계연이 안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정원 돌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재성은 마치 보물을 건네듯, 천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보따리를 풀어, 안에서 나무로 만든 바둑판과 바둑알 두 상자를 꺼내 보였다.

“선생께서는 기경을 즐겨 읽으시지요? 그러나 선생께서 바둑을 두시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이게 다 함께 대국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 것 아니오? 제가 향단목 바둑판을 가져 왔으니, 저와 편하게 대국을 겨루시지요!”

‘아, 아니, 잠깐……. 나는 이론만 알 뿐이란 말이야. 대국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둑을 둘 줄 몰라서 두지 않는 거라고…….’

계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체면을 버릴 것 같았다.

* * *

그 무렵, 위무외는 도적들을 데리고 영안현에 돌아왔다.

상처 입은 몸으로 여러 명의 악인을 잡았으니, 변수를 줄여야 했다. 위무외는 자신을 습격한 이들을 가장 가까운 영안현에 구류해 두고, 마부에게 말을 몰고 덕성부로 가, 죄인을 호송할 관아와 위씨 가문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객잔에 머물던 위 가주는 영안현에서 천 냥을 들여 산 백호 가죽을 덮고 쿨쿨 잠을 청했다.

* * *

정오 무렵, 침상에서 일어난 위무외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 드디어 살 것 같네!”

오른손을 살며시 움직여 보니 움직임이 민첩하진 않았지만, 손을 쥐었다 폈다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당시 적의 공격에 진기가 영향을 받긴 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최소한 젓가락을 집어 밥을 먹을 순 있었으니 말이다.

세수를 마친 그는 식사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준비를 얼추 마친 뒤에야, 위무외는 영안현 관아의 감옥으로 향했다.

* * *

영안현 관아 법정에서 우측으로 수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바로 영안현 감옥이 있었다. 현재 영안현 전역의 포리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심지어 현위 주언욱이 직접 감옥문을 지키기까지 했다. 또한 무공이 출중한 두 명의 위씨 가문 호위무사도 상처를 간단하게 치료한 뒤, 함께 감옥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위무외가 하급 관리의 안내에 따라 감옥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통보에, 주언욱이 씁쓸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위 가주, 우리 영안현의 하급 관리들이 모두 죽어날 지경입니다. 저는 밤새 한숨도 자질 못했어요!”

주언욱은 영안현 관리 중에서…… 아니, 영안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마도 무림의 아류 고수 정도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사적인 무예를 배우고 수련하였기 때문에, 강호 사람들과는 달리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것도 목숨을 잃는 것도 그에게는 한낱 보잘것없는 일이었다.

위무외 또한 황급히 공수하며 사과를 건네었다.

“현위 나리와 관리들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지만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길에서 도적의 습격을 당해, 가까운 곳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기력만 있었다면, 함께 밤을 새웠을 텐데 말이지요!”

주언욱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습니다. 가주님의 사정이야 다 알죠. 이것도 제 본분일 뿐인데, 제가 괜히 투덜대는 바람에 위 가주께 실례를 보였네요!”

“아닙니다. 제가 묘외루에 식사를 주문해 두었으니, 조금 있으면 묘외루에 점심 식사가 도착할 겁니다. 현의 나리와 관리들께서 나눠 드시지요!”

“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나눈 뒤, 위무외는 범인을 보려고 주언욱과 함께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범인들은 막혀있던 혈이 뚫려 마비는 풀렸지만, 단단한 쇠사슬이 그들의 발을 옭아매고, 그들의 양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더욱이 입은 뻥끗하지 못하게 꽉 막혀있었다. 참담한 모습으로 구속당했으니, 또다시 활개를 치지는 못할 터였다.

사실 그는 어젯밤 내내 망설였다. 그는 본래 이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입을 막을 계획이었다. 까닭이야 단순했다. 선연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순간, 위씨 가문이 적잖이 귀찮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무외는 자신을 도와준 신비로운 고인을 떠올리고는 이 계획을 접어두고, 악인들을 얌전히 관아에 넘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슴팍의 매끄러운 남옥은 끊임없이 어젯밤 일을 떠오르게끔 했다. 그때 당시에는 검은 옷 사내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속이 근질근질했다.

주언욱을 따라 감옥을 걸어 나오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위무외가 멀리 서당 누각의 처마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서당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없나 봅니다?”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위무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네, 오늘은 서당이 쉬는 날이거든요!”

주언욱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대답하던 위무외는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꼈다. 어제 오전, 영안현 현승이 그에게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외무외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크흠! 현위 나리, 혹시 계연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주언욱이 다소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보며 물었다.

“계 선생님이야 당연히 아는 분이지요. 가주께서도 선생님과 아는 사입니까?”

주언욱이 계연을 어찌 부르는지를 재빠르게 포착한 위무외가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요, 아니요. 선생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닙니다만, 붉은 여우가 목숨을 구해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신기하더라고요. 어제는 급히 돌아가느라 겨를이 없었으나, 일이 이리된 이상, 그 기인을 한번 뵙고 싶어서 말입니다!”

“계 선생님을 뵙고 싶으시다고요?”

주언욱이 웃음을 지었다.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드려야겠네요. 계 선생님을 찾아뵈려는 사람은 많지만,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는 사람은 윤 훈장님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래요? 혹, 선생님의 성정이 나빠서 그런 겁니까?”

멀찍이 떨어져 본 것이긴 하지만, 위무외는 계연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여우까지 구해준 사람이지 않던가.

“하하하, 그럴 리가요. 계 선생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나 겸허하고 예의가 바른 분이십니다. 한 번도 화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요…….”

주언욱은 이만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찾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계 선생님께서 상당히 을씨년스러운 곳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거처는 영안현에서 유명한 흉가인데, 몇 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지내신다고요?”

위무외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하! 참 희한하게도 계 선생님께서 그 가옥에 묵으신 이후로, 더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윤 훈장 댁도 무사하고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을 찾을 사람은 당분간 없을 겁니다. 계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고 싶다면, 저잣거리에서 마주치길 기다리면 되니까요.”

그의 말에 위무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불타올랐다.

“현위 나리, 계 선생님의 거처가 어디인지 알려주십시오!”

“가보시려고요?”

“예!”

위무외는 가슴팍의 남옥을 믿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옥구슬만 있다면 무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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