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보옥의 정체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 후, 위무외는 한 관리의 안내를 받으며, 천우방 청석포의 좁다란 길 위에 올랐다.
천우방 절반을 지나자, 어렴풋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연지나 분처럼 인위적인 향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향이었다. 천우방 깊숙이 들어갈수록 향이 짙어졌다. 무슨 향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위무외가 옆에 있던 관리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이건 무슨 향기입니까?”
관리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거안소각의 대추나무 꽃에서 나는 향입니다. 영안현 전역에 딱 한 그루 있는 나무이지요!”
“대추나무 꽃? 대추꽃 향기가 이리도 향긋했었나요?”
위무외는 자신이 견식이 넓은 사람이라 자부했다. 유명한 꽃이나, 괴상한 나무, 수려한 경관 등 안 본 게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리 향긋한 대추나무 꽃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자고로 대추나무 꽃은 꽃에 코를 들이밀어도 향기를 못 맡는 게 정상이지 않나?’
“에이, 계 선생님이 왜 기인이라 불리겠습니까. 왕년에는 천우방에서 이런 향기가 나지 않았어요!”
관리의 말에, 위무외의 마음속 깊이 피어난 호기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 또한 덩달아 빨라졌다.
좁은 길은 서서히 외진 곳으로 이어졌다. 작은 골목 입구에 도착하자,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마을 안의 모든 게 어찌나 푸릇푸릇하던지. 하지만 관리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위무외 대신 들어주었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수십 보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안뜰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정원에 대추나무가 있는 가옥이 바로 거안소각입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위무외는 동전 한 움큼을 꺼내, 길을 안내해준 관리에게 건네었다. 동전을 받은 관리는 눈이 휘어져라 웃음을 지었다.
“천만의 말씀을요!”
관리가 떠나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위무외는, 멀리 우뚝 서 있는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닥에 놓인 선물을 들고 거안소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비록 구석진 곳이었지만, 음산한 분위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대문 앞에 선 위무외는 머릿속으로 인사말을 정리했다.
정원 안 돌 탁자에는 단향목 바둑판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계연과 윤재성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윤청은 한쪽에서 턱을 괸 채 이해하지도 못하는 대국을 지켜보았다.
계연의 바둑 실력은 상당히 공식적이었다. 오로지 책에서 보고 배운 기술만 다루었다. 처음에는 나름 깔끔하게 바둑을 두었지만, 수가 얕아도 너무 얕았다. 그나마 윤재성이 고수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주고받으며 대국을 이어갔다.
이제 윤재성의 차례가 왔다. 그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계연이 살며시 인상을 풀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밖에 손님이 오신 것 같네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거나, 본래 체중이 상당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윤재성은 선견지명에 가까운 계연의 능력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저 누가 계연을 찾아온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영안현에서 거안소각에 찾아오는 사람은 윤재성과 그의 가족뿐이었으니 말이다.
역시나 잠시 후에 대문 너머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계 선생님 계십니까. 저는 덕성부의 상인, 위무외라고 합니다. 선생께서 영안현의 운사(韻士)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뵈러 왔습니다!”
‘위무외라고?’
잠시 당황하던 계연이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윤청을 보았다.
“윤청아, 가서 문 좀 열어줄래?”
“네!”
의자에서 깡총 뛰어내린 윤청은 대문으로 우다다 달려가, 빗장도 걸려있지 않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윤청은 문밖에 선 화려한 옷차림을 한 퉁퉁한 사내를 아래위로 살펴보더니 말했다.
“들어오세요! 제가 짐을 들어드릴까요?”
“괜찮다, 괜찮아. 내가 하마!”
해맑은 아이에게 웃으며 대답한 위무외가 바닥에 놓인 물건을 들고 정원에 들어섰다.
안에서는 하얀 옷과 푸른 옷을 입은 사내 둘이 대국을 겨루고 있었는데, 이따금 대추나무에서 떨어지는 자잘한 꽃잎들이 청량한 바람을 따라 정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운치가 좋구나!’
속으로 감탄하던 위무외는 자신을 향한 두 사내의 시선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쪽이 윤 훈장님이시군요. 급작스레 찾아오느라 뭐가 좋을지 몰라서, 묘외루의 과자와 진기(陳記)의 술을 사 왔습니다. 제 작은 성의이니, 사양 말고 받으시지요!”
계연은 왼손으로 소매를 쥐고, 오른손으로 백돌을 들어 바둑판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는 아직 기도(*棋道: 바둑 예절)의 우아함을 배우는 중이었다.
바둑알을 내려놓은 계연은 자리에 앉은 채로 위무외를 보며 말했다.
“위 선생께선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단순히 저를 보기 위해 오신 건 아닐 텐데 말이지요.”
위무외는 계연의 희뿌연 눈동자에 흠칫 놀라며, 역시 듣던 대로라고 생각했다. 계연의 질문에, 그는 재빨리 물건을 내려놓고 공수하며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붉은 여우가 선생께 앞발을 비비며 살려달라 빌고, 누런 개들이 선생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참으로 신기한 난제가 있습니다. 선도와 관련된 것이지요. 그렇기에 선생께 가르침을 얻으러 찾아왔습니다.”
흑돌을 쥐고 사색에 잠긴 윤재성이 그 말에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맞은편의 계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려 윤청이 흥분하며 나섰다.
“물론이죠. 계 선생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데요. 어제 제가 선생님과 같이 여우를 산에 방생해주고 왔거든요. 선생님께서 여우에게 마지막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여우가 글쎄 선생님께 계속 절을…….”
“청아!”
윤재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매서운 눈빛으로 윤청을 노려보았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입을 틀어막은 윤청은 다소 서러웠다. 계 선생님은 말하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을뿐더러, 어젯밤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정작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모저모 캐묻지 않았던가…….
“괜찮습니다!”
계연이 웃으며 윤재성을 말렸다. 이내 그는 돌탁자 한쪽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서 있는 위무외에게 말했다.
“위 선생께서는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무엇이 궁금하신지 말씀해 보세요.”
“앗, 네!”
위무외는 경외심에 차서 돌탁자 한쪽에 앉았다.
아이는 거짓말을 못 한다지 않던가. 이곳이 이익에 얽힌 장소도 아닐뿐더러, 윤씨 부자의 반응을 보니, 조금 전 윤청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랐다.
위무외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술을 떼었다.
“계 선생님. 이 세상에 요괴와 귀신이 실존하는지, 진정 선인이 되는 길이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원 안의 분위기가 다소 변했다. 때마침 계연의 차례가 되었다. 계연은 손에 든 백돌을 바둑판 위에 두며, 위무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주 짧은 두 글자로 말이다.
“있지요.”
주변이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윤재성은 흑돌을 쥔 채 바둑판을 바라보았지만, 속으로는 지난번 성황당에서 벌어진 일을 곱씹고 있었다. 위무외는 더욱이 흥분한 나머지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는 평소 자제력이 강한 자신이 왜 이리 추태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 계연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윤청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차례에요!”
“아, 으응, 응! 아, 아니지? 이놈이,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러느냐, 이 아비는 수를 헤아리고 있던 거야!”
아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윤재성이 아들을 나무라며 바둑돌을 아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위무외는 더는 바둑판을 거들떠볼 정신도 없었다. 그는 바둑돌을 쥔 푸른 옷의 맹인을 보며 흥분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뒤, 입을 열었다.
“계 선생님, 저희 위씨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옥(寶玉)이 하나 있습니다. 조상께서는 이것을 선학이 은혜를 갚기 위해 준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 오랜 세월, 남옥은 별달리 신비로울 게 없었습니다. 하나, 요전에 제가 강도를 당했는데, 그때 우연히 남옥에게 기연(機緣)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 혹시, 선생께서 대신 확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이 분위기와 풍경, 사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위무외는 맹인에게 알 수 없는 신뢰감을 느꼈다. 바로 어제 검은 옷의 사내들이 무력으로 남옥을 약탈하려 하였건만, 지금 그는 거리낌 없이 남옥을 꺼내 보여줄 수 있었다.
한편, 보옥이라는 말에 윤재성과 윤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위무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무엇을 꺼낼지 궁금해하는 듯이 말이다.
계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위무외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보여주시지요.”
기막힌 우연이었다. 사실 어제, 계연은 남옥의 형체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남옥을 구석구석 자세히 연구하려면, 최소한의 영기를 불어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데, 위무외가 직접 찾아와 남옥을 건네다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계연이 속으로 감탄을 내뱉던 찰나, 위무외가 품에 꽁꽁 숨겨두었던 옥 장신구를 꺼내었다. 붉은 끈을 푼 그가 계연에게 남옥을 건네주었다.
“아버지, 옥이 남색이에요!”
“음, 보기 드문 색이지!”
윤재성은 견문을 넓힐 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연자약한 척하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남옥을 건네받은 계연은 남옥을 눈앞에 들이밀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런 조각도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동그란 남옥은 어찌 보면 커다란 평안구(*平安扣: 평안을 비는 중국 전통 장신구) 같기도 했다.
남옥에 어린 영롱한 빛이 은은히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물론, 이는 계연의 눈에만 보였다.
계연은 망설임 없이, 남옥에 천천히 영기를 불어넣었다. 영기가 주입되자, 남옥 내부에 물결 같기도 하고 연기나 안개 같기도 한 것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남옥은 엷은 빛을 뿜어내었다. 윤재성을 비롯한 사람들도 그 빛의 존재를 또렷이 확인했다. 위무외는 더욱이 숨을 꾹 참고 이를 지켜보았다.
남옥 위, 대칭을 이루는 네 모서리에 영롱한 빛으로 작은 글자가 나타났다. 글을 조합해 보면, ‘옥회성경(玉懷聖境)’이라는 단어였다.
살짝 놀란 계연이 말했다.
“옥회산이었군요!”
탁자 아래에 놓인 위무외의 퉁퉁한 두 손이 옷자락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는 그러며 터져 나올 듯한 흥분감을 억눌렀다. 다친 오른손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잊은 모양이었다.
위무외는 ‘옥회성경’이라는 네 글자를 똑똑히 보았다. 명석한 두뇌를 지닌 그는 계연이 말한 ‘옥회산’이 남옥의 진정한 이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이것이, 진짜 보물이라는 거지? 선연을 지닌 보물 말이야!’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져 내려온 보옥의 정체가, 오늘 고작 말 한마디에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