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갑작스러운 가을 밤바람
위무외는 돌연 조부님께서 위씨 가문의 새로운 가주를 정하실 때, 자신에게 따로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조부님께선 이렇게 물으셨다.
“왜 너를 선택하였는지 아느냐?”
위무외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제가 가장 명석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무공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제가 무예를 연마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저는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지모(智謀)가 가득하며,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이런 제가 아니면 누가 뽑히겠습니까?”
“허허허……. 그것들 또한 기본 조건이긴 하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연유가 있단다!”
“무슨 연유 말입니까?”
조부님은 매우 진지하게 위무외를 보며 말씀하셨다.
“네 팔자가 좋기 때문이야!”
지금 돌이켜 보니, 위무외는 조부님의 말씀이 옳아도 너무 옳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팔자 좋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조그만 정원 안에서 위무외는 여전히 감격에 젖어 있었다. 계연은 자세히 옥 장신구를 관찰했다. 남옥을 한 바퀴 훑고 지나간 영기가 다시금 계연의 손가락으로 스며들자, 남옥에 깃들었던 광채가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역시, 이 안에 비결이 있었어!’
방금 비결을 찾았을 때, 계연은 남옥 내부에 그가 꿰뚫어 보지 못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선명히 느꼈다. 어쩌면 지난 생에 소설에서 읽었던 것처럼, 뭔가가 억눌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옥이 일부 영기를 흡수한 덕분에, 계연은 순간의 감각을 빌려, 아주 희미한 자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력은 분명 위무외를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누군가 남옥을 가져간들 선연을 얻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다만 어제 그 검은 옷의 사내들에게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이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이윽고 계연이 생긋 웃음 지으며, 위무외에게 남옥을 돌려주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남옥을 건네받은 위무외는 또다시 남옥을 살펴보았다.
계연이 다시 바둑을 두려 하자, 위무외가 입이 바짝바짝 타는 듯 이상하게 물었다.
“계 선생님, 옥회산이 어디입니까? 설마, 이곳에 선인의 거처가 있는 겁니까?”
위무외는 계연이 비범한 은둔형 고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그가 선인이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했다. 다만 모든 생각을 곧이곧대로 고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집안일만 언급할 뿐이었다.
귀를 쫑긋 세운 세 사람을 보니, 계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일부러 고명한 체를 하며 헛짓거리할 생각도 없었다.
“저도 옥회산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선인이 존재하는 것 같군요.”
위무외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기대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저희 가문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남옥을 이용해 선연을 찾을 수 있을지,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십시오!”
정확히 요점을 짚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계연도 모르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옥회산이라는 이름도 영안현 성황신이 알려준 것이었다.
“위 선생,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넓은 식견을 지닌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옥회산처럼 신성한 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허허……. 저도 모르겠군요!”
웃으며 바둑돌을 내려놓은 계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위무외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옥회산이 계주 영내 북부에 있다는 것 같더군요. 제가 아는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다음은 위 선생께서 직접 해결하셔야 할 것 같군요!”
말을 마친 계연은 더는 위무외를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다. 계연 본인이야말로 옥회산이란 곳을 찾아가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휴, 저렇게 조상신의 비호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번 생에 나는 혼자인 거야!’
위무외는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계 선생님이라는 작자는 에둘러 이러한 뜻을 전하는 것 같았다. 알려줄 수 있는 건 다 알려줬는데도 잘 모르겠다면 위무외 자신이 어리석은 거라고 말이다.
위무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올곧은 자세로 선 그는 두 손을 모아 읍을 한 채, 정중히 90도로 인사를 올렸다.
“계 선생님, 오늘 이 은혜는 저희 위씨 가문이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필요하시면, 언제 어디에서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선생님의 신분만 정확히 밝히신다면, 덕성부와 위씨 가문이 힘을 합쳐 도울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위무외가 허리에 차고 있던 비취 한 조각을 풀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걸 증표로 가지고 계시지요! 혹여나 힘든 시기가 오면, 이를 팔아 은전을 마련하셔도 괜찮습니다!”
계연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비취 장신구를 건넨 위무외는 윤재성에게도 공수를 해 보였다. 그는 이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거안소각을 나서며, 대문을 굳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마음속에서 요동치던 흥분을 더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위무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나머지, 잰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천우방 입구의 문패가 놓인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중하고 부티 나는 상인의 모습을 되찾았다.
위무외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가족 중 믿을 만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특히 외간 사람에게는 단 한 글자도 누설할 수 없었다.
계 선생님이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강조한 것은, 성가신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뜻을 직설적으로 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당연했다. 자칫 잘못하면, 좋은 일이 외려 나쁜 일을 불러오고, 좋은 인연이 도리어 악연이 되고 말 것이다.
* * *
거안소각 정원.
위무외가 자리를 떠나자, 윤청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님, 옥회산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르세요? 신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그러게, 신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궁금하구나. 내가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리고 옥회산은 말이지, 윤청아. 내가 언제 허언하는 거 보았느냐?”
계연이 찬합에서 과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윤청에게 물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안 지 몇 달밖에 안 됐잖아요. 계 선생님께서 저를 만나기 전에 허언을 하셨을지도 모르고요!”
“청아!”
윤재성은 제 아들의 태도에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하하하……. 윤청이 네 말이 맞다. 나도 허언을 한 적이 있긴 하다만, 이번 일은 맹세코 사실이란다! 그리고 훈장님, 아이는 때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말한다지만, 밖에서는 주의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제 앞에서야 괜찮지만,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윤청이 귀엽긴 하지만, 아이가 문제아로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계 선생님 말씀이 맞소. 이 녀석은 아주 엄하게 가르쳐야 해요. 행동으로는 예의를 잊어선 아니 되고, 말로는 상처를 주어선 아니 되지 않소!”
계연은 오랜만에 윤 훈장의 교육 방식에 동의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훈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바깥 세계는 이 영안현처럼 평온하지 않아요. 저잣거리도, 강호도, 관리 사회도 마찬가지지요. 이 세상의 악인들은 모두 말 한마디에 꼬투리를 잡기 마련이니, 매사에 신중해야지요!”
‘이놈이 감히 내게 말대꾸를 하다니. 내가 대범하긴 대범해도 사람을 못살게 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음흉하게 생각하던 계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둑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묘외루 과자가 많으니, 같이 드시지요!”
“그럼, 사양 않고 맛있게 먹겠소!”
윤재성은 괜한 겸손을 떨지 않고, 계연과 함께 과자를 먹었다. 윤청은 화를 꾹꾹 참고 있는 제 아버지를 보며, 걱정스러운 듯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계연은 윤재성의 이런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방금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 모두가 경악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그는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계연과 편안히 담소를 나누고 간식을 즐겼다. 보통 사람들이 갈망하고 부러워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는 욕심을 버리고 예의범절을 지킬 사람이었다.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국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황혼 녘이 되었다. 둘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한 사람은 확신에 들어찼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대국에서 져준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지막 대국이 끝나고, 둘은 각자 바둑돌을 정리했다. 윤청은 한쪽에서 흑돌과 백돌을 만지작거리며 정리를 도왔다.
“윤 훈장님. 제가 곧 영안현을 떠나, 멀리 갈 것 같습니다.”
이 일은 계연이 어젯밤 검의첩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오늘 아침 검의첩의 비밀을 파헤친 뒤 결정한 사항이었다. 좌 대협의 묘지는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 계연은 미리 귀띔을 해주려는 것이었다.
윤재성은 잠시 넋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계연의 말에, 바둑돌을 집던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윤청이 꿍얼대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나름 빠르게 반응한 윤재성이 아이를 노려보며 입을 막았다.
“계 선생님, 언제 떠나실 계획이시오?”
“아직 안 정했습니다. 빠르면 사흘에서 닷새 안에, 늦어도 이레 안에는 떠날 거예요.”
중요한 건, 우선 대정의 각 주와 부의 대략적인 지도를 익혀두는 것과 영안현 성황신을 찾아가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정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청은 다소 의기소침한 얼굴로 탁자에 엎드렸고, 윤재성은 바둑판에 남은 백돌 두 개를 바둑알 통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계 선생께서 비범한 분이시라는 거 잘 아오. 떠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니, 많은 걸 묻지 않겠소. 그저 언제 떠나실 건지만 알려주신다면, 제가 선생을 배웅해드리고 싶소. 그것이 불편하시다면, 그저 선생께서 가시는 길이 무사평안하기를 빌겠소이다!”
“네, 훈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웃으며 공수하던 계연이 힘없이 축 처진 윤청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그가 대추나무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올해는 대추를 먹기 글렀네요. 나중에 윤 훈장님과 윤청이 와서 잘 익은 대추 열매를 따다가, 이웃들과 나눠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 부탁, 꼭 들어드리겠소!”
대답을 건네던 윤재성도 고개를 들어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더는 예전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대화가 끝나고, 한담을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윤씨 부자의 흥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식사 시간도 다가오니, 그들은 이만 일어나기로 했다.
윤씨 부자가 떠난 뒤, 계연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밖으로 나가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수련을 이어간 다음, 정확한 시간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그날 저녁, 정원의 대추나무 꽃이 말라 떨어지고, 나뭇가지에 커다랗고 푸른 대추가 열리기 시작했다. 여명이 다가오자, 거안소각 안 대추나무의 잎사귀가 모두 누렇게 물들고 나뭇가지에는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활짝 연 계연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대추나무를 바라보던 그는 감격스레 말했다.
“갑작스러운 가을 밤바람에, 정원 가득 맺은 열매는 내가 따가마! 고맙다, 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