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윤형 한 사람뿐
우르르.
그때, 하늘가에서 어렴풋이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계연은 먼 곳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희미하게 하늘을 채운 먹구름을 발견했다. 아마도 곧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맑은 날도 좋지만, 비가 오면 더 훌륭하지. 징조가 좋은걸!”
이 세계에 온 뒤로, 눈과 청력의 영향 때문인지, 계연은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슬비도 폭우도 아닌, 적당히 내리는 비를 좋아했다.
바깥사람들의 눈에는 계연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계연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었다. 오로지 비가 오는 날에만 계연은 이 세계를 또렷이 바라볼 수 있었다.
윤청이 어제 가져온 버들가지로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마친 계연은 지우산(紙雨傘)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가 천우방 거리에 들어서자, 어제까지만 해도 거리를 가득 채웠던 대추나무 꽃향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 천우방의 이웃들도 오늘 아침 일어나,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정말 예민한 사람들은 대추나무꽃에서 나던 향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우연히 마주친 이웃이 계연에게 꽃향기에 관해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연이 천우방 입구를 나서자, 곧바로 길이 나왔다.
솨아아-.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로 곳곳과 비를 피하지 못한 행인, 강아지의 등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계연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이 순간, 모든 주의를 청력에 기울인 계연은 완벽히 ‘살아난’ 기분이었다!
거안소각에서 그가 지내는 수개월 동안, 비가 내린 날은 많지 않았다. 하필 떠날 때가 되니, 매실이 익고 장마가 시작되는 망종(芒種)이 되었다.
만약 엄청 예리한 안목을 지닌 누군가가 빗속을 걷는 계연을 발견했다면, 우산에 가려지지 않는 그의 하반신에 빗방울 하나 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계 선생님, 오늘도 국수 드시죠? 소 내장도 있어요. 날마다 있는 거 아니에요!”
그가 손기의 노점을 지나치자, 차양 아래에 서 있던 손기가 우산을 든 계연을 향해 소리쳤다. 뒤를 돌아본 계연은 적잖은 손님과 행인들이 노점에서 비를 피하는 광경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성황당에 볼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그럼 천천히 가세요. 제가 소 내장 좀 남겨 둘까요?”
“괜찮아요!”
계연은 겸손하게 사양하며, 성황당으로 걸어갔다.
비가 내려서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묘사방의 성황당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황당 안에 들어선 그는 기도하는 여느 백성들처럼 노점상에게 단향을 사고, 주전으로 들어가 성황신에게 향을 피웠다.
향을 피우고 성황신상을 향해 자그맣게 절을 올린 계연은 그대로 신당을 빠져나가, 바깥의 묘외루로 향했다.
묘외루 대문을 넘어서니, 묘외루는 여전히 바빠 보였다. 비를 피하려고 묘외루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층에는 이야기를 듣거나 들려주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이고, 계 선생님 오셨군요! 여기,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오늘도 과자 포장하러 오셨습니까?”
계연을 아는 점원이 친절하게 그를 맞이했다.
“아닙니다. 3층에 자리 있죠? 음식들 그쪽으로 준비해 주세요. 제 일행이 곧 올 거라서 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3층에 빈자리가 많습니다!”
계연은 3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묘외루 대표 간식 한 상과 올봄에 딴 우규산 찻잎으로 우려낸 차가 빠르게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볶음 요리가 없으니, 상을 차리는 게 확실히 빨랐다.
이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검은 장포 차림의 노인이 3층으로 올라왔다. 그가 멀찍이서 계연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읍하자, 계연 또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계 선생, 그간 잘 지냈는가?”
성황신과의 첫 만남 이후, 이번이 성황신과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송 나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리 덕분에 편안히 잘 지냈습니다.”
성황신이 자리에 앉자, 계연이 성황신의 인간계 호칭을 언급하며 군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송 나리께 작별 인사를 고하러 왔습니다. 제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다른 지역을 구경하고 싶기도 하여, 곧 영안현을 떠날 계획입니다. 한데, 그 전에 송 나리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는지요.”
성황신이 떡을 한 조각 집어 냄새를 쓱 맡은 뒤, 아주 작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한참을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던 성황신은 나머지 반을 단숨에 입에 집어넣었고, 남은 떡고물을 그릇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말하게나. 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겠네.”
“나리께서 지난번 보내 주신 죽간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리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눈이 좋지 않지요. 나리께서 대정과 그 주변 지도를 대략적이나마 음각으로 새겨주실 수 있으신지요.”
계연의 말인즉슨, 음각으로 판 지도를 만들어 달라는 소리였다.
“그러지. 오늘 밤 무판의 감독하에 처리하라 시키겠네. 음각의 두께는 어느 정도가 좋겠나?”
“분명하게 구분만 된다면, 상관은 없습니다.”
두 번째 과자를 맛본 성황신이 계연을 바라보았다.
“좋네. 선생이 만족할 만한 지도를 만들어주지!”
총명한 사람들의 대화는 이리도 수월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마쳤으니, 두 사람은 여유롭게 한담을 나누며 과자를 맛보았다. 탁자에 놓인 음식을 모두 맛본 뒤에야, 둘은 각자 길에 올랐다.
두 사람이 계산하고 자리를 떠나자, 한 점소이가 청소하기 위해 올라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와 탁자 위를 보니, 절반 이상의 음식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손도 대지 않은 듯 그대로 말이다.
“아니…….”
주변을 살피던 점소이는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헤실헤실 웃으며 과자 한 조각을 집어 냉큼 입에 넣었다.
“쩝쩝……. 퍼석퍼석하고, 맛도 떫네……. 이거 누가 만든 거야?”
뒤이어 점소이는 또 다른 조각들을 집어 맛보았다.
“쩝쩝……. 퉤. 젠장, 어찌 맛이 이럴 수가 있지?”
* * *
거안소각의 대추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열매를 맺은 일은 윤재성 가족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계연이 바로 어제 올해는 대추를 먹기 글렀다고 말했는데, 다음 날 바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현묘함에 놀라 자빠질 것이다.
나무에 열린 대추는 꽉 찬 과육에 매력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한입 베어 꿀꺽 삼키니, 뱃속과 혀, 치아 사이사이까지 향긋한 향기가 고스란히 깃들었다.
하지만 계연은 대추 몇 개를 따다 윤씨 가족에게 나눠줄 뿐, 주변 이웃들을 불러 모아 대추를 나눠 먹지 않았다. 행여나 사람들이 놀라 괜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니 말이다.
* * *
계연은 하루 정도면 성황신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지도를 받는 데 족히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며칠 뒤 계연은 지도를 받았다. 손가락 세 개 정도 되는 넓이에, 손바닥 두 개 정도 길이를 한 검은 나무 막대 세 개가 아래위로 조그만 단추 따위가 달린 채, 얇은 실에 꽁꽁 매여 있었다. 겨우 문진(*文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두는 물건)만 한 크기의 지도를 활짝 펼치면 정교하게 조각된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에는 산과 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음각의 두께는 얇디얇았지만, 지도의 모양은 조금도 어지럽지 않았다. 심지어 곳곳에 지명이 표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계연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완벽했다!
이날 밤, 계연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아무래도 윤 훈장 가족에게 무언가를 남겨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연은 이렇게 이 세계에 온 지 수개월 만에, 두 번째로 붓을 들었다.
“그럼 내가 문학 작품을 하나 선물해주지!”
붓을 휘두르는 동안 계연이 몸의 영기를 쏟아붓자, 주변의 영기 또한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선지에 쓰는 이 글은 서신이기도 했고, 서첩(書帖)이기도 했다. 글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계연은 한밤중이 될 때까지 붓을 붙들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윤 훈장 댁 정원.
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가려던 윤청은 문틈 사이로 휙 날라 들어온 서신 한 통을 발견했다.
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윤 훈장님 친전(親傳), 계연 올림.>
“아버지! 계 선생님이 문 앞에 서신을 두고 가셨어요!”
“기다려라!”
방 안에서 윤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달려 나온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윤청이 건넨 서신을 읽어 내렸다.
‘서신을 남긴 거라면, 게 선생께서 인사도 없이 가버리신 건가?’
서신 겉면에 적힌 글을 본 그는 명필이라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윤재성은 조심스레 서신을 열고, 그 안에 고이 접힌 선지를 펼쳤다. 서신의 첫 줄부터 계연은 친근하게 윤재성을 부르고 있었다.
윤형 앞.
비 오는 날 윤형을 만나, 망종 전에 잠시 이별을 고하게 되었군요. 구석진 오두막에 지내며, 마을에 벗이라곤 당신이 유일하였지요.
내가 윤형을 처음 만났을 때 윤형에 대해 아는 건 없었지만, 윤형의 고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윤형은 그저 한 현의 훈장일 뿐이지만, 성현의 글을 배운 선비답게, 이치를 알면서도 배우길 좋아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올바르게 바꾸며,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이지요.
원하는 게 있으면 정당한 방법을 취하고, 만족할 줄 알며,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바로 윤재성 당신을 일컬음입니다.
애석하게도 밝은 달은 매일 뜨지 않고, 하늘에 걸린 별들도 언젠가는 흩어지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밤중에 떠나느라 찾아뵙지 못하니, 인사는 서신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
부디 제자들에게 작은 것부터 가르치고, 오래도록 백성을 위해 일하며, 시종일관 초심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훗날 당신의 전기가 수많은 자제에게 지혜를 줄 것이며,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킬 겁니다. 당신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학자가 될 겁니다.
때마침 시기도 적당하니, 산과 강을 여행하고, 천지를 둘러보십시오. 언제나 같은 모습의 거친 파도를 보며, 자유로이 가벼운 걸음을 떼어보십시오. 뱃속에는 짙은 먹물을, 가슴에는 진한 정기를 품어 보십시오.
마지막 한 글자까지 읽은 윤재성은 머리가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손과 다리의 근육이 잔뜩 굳어 버려서,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깊이 심호흡을 하고 대문 밖의 하늘을 올려 본 그는 가슴을 쫙 펴고 뒷짐을 지었다. 마음속에 무한한 패기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 * *
영안현에서 수십 리 떨어진 길 위.
계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막 바둑알 환영 하나가 번쩍이다 사라진 참이었다.
“어라!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계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이 바둑알의 출처가 위무외는 아니겠지?’
하지만 얼마 전 그에게 옥화산을 알려주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계연은, 그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정도 영향쯤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계연은 위무외 때문일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게 무슨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지연이 생길 리 없었다.
‘설마, 윤 훈장……?’
계연은 자신이 남긴 서신을 떠올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연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일을 했다면 그 서신을 보낸 일뿐이었다. 게다가 시간도 얼추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