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외진 마을에서의 하룻밤
길을 걷다 보니, 아득히 수려한 풍경이 펼쳐졌다. 곳곳에 논밭과 푸른 초목이 가득했고, 밭을 갈구는 농민들도 쉬이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망종 전야라, 밭일이 한창 바쁜 시기였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볏모에 뿌리는 물소리, 농민들의 대화 소리, 주변의 새소리까지 어우러져, 계연의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었다.
다그닥다그닥-.
뒤쪽에서 말발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와 기수의 기합 소리,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헛! 이랴 이랴…….”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자, 계연이 재빨리 옆으로 길을 비켰다. 잠시 후, 말 서너 필이 먼지를 일으키며 도로를 내달렸다.
“말이 있으니까 좋네!”
조용히 중얼거리던 계연은 계속해서 두 발로 전진했다.
사실 계연 또한 말을 사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는 좋은 말을 살 돈이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계연이 한 번도 말을 몰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은 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관리까지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먹이를 주고, 씻겨주고, 한치도 소홀해선 안 되는데, 계연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말을 탈 줄은 몰랐지만, 지금의 몸 상태를 봐선 손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관리하는 게 너무 번거로웠다. 괜히 말을 사봤자 일만 늘린다고 생각한 계연은 끝내 말을 사지 않기로 했다. 이곳에서 좋은 말을 한 필 사는 건, 현대에서 차를 한 대 사는 것과 맞먹는 금액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했다.
다행히도 계연은 선도(仙道)의 술법을 다룰 줄 알았고, 무공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는 하늘로 승천하는 한 마리의 뱀을 빌려 탈 수 있는데, 고작 말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그래, 편하기까지 하잖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계연은 친구의 새 장난감을 질투하는 아이 같은 복잡한 마음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말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등 뒤에 멘 보따리에서 대추 두 개를 꺼내, 와그작 씹어 먹었다. 이윽고 올바른 자세를 취한 그는 빠르게 경공을 선보이며, 푸른 그림자가 되어 순식간에 날아갔다.
계연은 산길을 뛰어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굽이진 산길을 걷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신경 쓸 게 많을뿐더러, 아직 호랑이 요괴 육 산군이 무섭기도 했다. 계연은 자신의 운을 시험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이미 지도를 살펴보았다. 길을 따라가는 동안에는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북쪽의 도로를 따라 영안현을 벗어나면, 동쪽을 따라 걷다가 다른 도시에 들어가 길을 물으면 됐다.
지도에 새겨진 지명과 검의첩 문자, 검의 속에 숨겨져 있던 노선을 대조한 결과, 계연은 좌 대협의 묘지가 의주(宜州)에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의주까지의 여정은 전혀 짧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계연의 목적지는 춘목강이었다.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거북을 볼 수 있을지 확인하기로 했다.
비록 그곳이 춘혜부(春惠府) 성 남쪽 밖에 있는 강이라는 것밖에 알지 못했지만, 기민한 위무외라면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검은 옷의 사람들 입에서 자세한 사항을 캐내고 말 터였다.
‘그렇다면 5월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기겠지.’
* * *
영안현은 주요 구역과 우규산을 사이에 둔 외진 마을이었다. 계연은 천천히 걷다가, 빛의 속도로 내달리기도 했다. 먼 길이었지만, 해가 저물 무렵 그는 영안현 경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영안현과 이웃한 순보현(順寶縣)에 들어서야 했지만, 그곳은 인적이 극히 드물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논밭 하나 없는 이곳에는 길을 물을 행인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연은 자신이 언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끝내 마음을 다잡은 그는 동쪽으로 난 아무 길이나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불길한 느낌이 계연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저 멀리 논밭 하나가 보였다. 계연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밭이 있는 곳으로 냅다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조그만 촌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촌락 옆에는 작은 강이 하나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강물에 비친 달빛이 그려낸 은은한 빛만큼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순보호는 영안현보다 훨씬 낙후된 마을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객잔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이곳 주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쨌든 길을 잃기 직전에 이 촌락을 찾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밭일하던 촌민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기에,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름 평탄했던 길과 달리, 촌락의 좁다란 길은 훨씬 울퉁불퉁했다. 잘 안 보이는 눈으로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계연은 몇 번이고 비틀대며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넘어지진 않았다. 잠시 후, 서서히 걸음을 늦춘 그는 다시금 평온한 걸음걸이를 되찾았다.
만약 경신술을 이용해 걷는다면, 안정적이고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연은 경신술을 뽐내러 온 게 아닐뿐더러, 저녁에 경신술을 이용하면 외려 요괴나 귀신으로 오해를 받고 말 것이다. 과한 행동을 했다간 촌락 사람들이 도리어 불안에 떨지도 몰랐다. 그러니 연약한 나그네처럼 굴어 동정심을 얻고, 이 마을에 하룻밤 묵으며 끼니를 때우는 편이 나았다.
이때, 촌민 하나가 촌락 입구로 들어오는 계연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계연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막말로, 이 저녁에 촌락을 찾아올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봐! 거기 당신, 누구요?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요?”
노인 하나가 계연을 향해 소리쳤다. 뒤이어 건장한 체격의 젊은 촌민이 집에서 환한 등불 하나를 들고 걸어 나왔다.
이 시대에 이처럼 외진 촌락은 저녁이 되면 야생 동물과 도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 촌락에 울타리를 빙 둘렀다. 낯선 방문객이 좋은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는 더 신중히 구별해야 했다.
“어르신. 저는 길을 지나던 사람입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제가 걸음이 느려서 어두운 밤길을 걷기가 도무지 겁이 나서 말이지요. 혹시 촌락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습니까!”
계연 또한 목청 놓아 대답하며, 천천히 촌락으로 다가갔다. 그는 일부러 손에 든 우산으로 땅을 짚으며, 길에 튀어나온 돌멩이나 걸려 넘어질 만한 게 있는지 확인했다.
촌락에 도착하자, 몇몇 촌민들이 입구에 모여 계연을 살펴보았다. 넓은 소매에 긴 장포, 손질하지 않은 귀밑머리, 등 뒤로 길게 늘어진 장발과 머리 위에 꽂은 나무 비녀까지. 꽤 고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촌민들이 다시 계연을 자세히 살펴보니, 계연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걸었지만, 걸음이 이상할 만큼 느릿했다. 게다가 몇 번이고 돌에 걸려 비틀거리더니, 아예 우산으로 앞길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선생, 혹시 눈이……?”
“아, 제가 눈이 잘 안 보여서, 밤길을 걷기가 힘듭니다. 하룻밤만 묵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나무 울타리 너머, 머리에 두건을 쓴 노인이 청년의 손에 들린 등롱을 건네받아, 계연의 얼굴에 빛을 비추었다. 계연의 발치로 비스듬히 비치는 그림자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던 노인이 다시금 계연의 얼굴과 눈을 살피더니 말했다.
“좋소,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범아, 문을 열어 드리거라!”
계연이 우산을 든 채로 손을 모아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며 계연은 속으로 환호했다.
‘후……. 역시 인생은 연극이야.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겠어!’
철컥, 철컥.
이때 나무 걸쇠가 귀를 찌르는 마찰음을 내었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계연은 청년들이 손에 무언가를 든 채, 나름 요령 있게 각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직 기뻐하긴 이른가?’
“선생, 들어오시오. 내 부축해 드리겠소!”
계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냉큼 다가와 계연의 손을 부축했다. 손끝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얼어붙었던 노인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선생, 걱정하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죠. 우선 우리 집에 가서 목이라도 축이시오!”
“아……. 네!”
* * *
철컥, 등 뒤로 울타리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계연을 부축하던 노인은 계연의 팔을 꼭 잡은 채로 십수 보를 걸어, 계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외벽에 황토를 바른 처소에 도착했다.
“선생, 문턱이 높으니 조심하시오!”
문턱이 높다는 건 농담이 아니었다. 계연이 희미한 시야로 보아도, 문턱이 종아리 높이까지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연은 힘차게 발을 들고, 노인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평범한 사람의 처소가 아니었다. 방 하나로 이루어진 처소에는 주방도, 내실도 없었으며, 유리 등불이 놓인 탁자와 네 개의 기다란 의자, 그리고 침상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으흠, 임시 침실 같이 생겼네!’
안에 들어서자, 노인이 드디어 계연의 팔을 놓아주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선생, 앉으시오. 난 허(許) 씨라고 하오. 선생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시고, 어디에서 오셨소이까?”
그는 계연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기까지 했다. 의자와 바닥이 맞닿으며 난 마찰음은 계연의 마음속에 투명한 선을 그려내었다.
“네, 감사합니다, 노인. 저는 계 씨이고, 영안현에서 왔습니다.”
탁자를 더듬거리며 자리에 앉은 계연은 보따리와 우산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옆에 서 있던 노인은 탁자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있던 접시를 꺼내고, 또 옆에서 주전자를 가져와 계연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아, 영안현 분이셨구려. 저희는 평소 밤이 되면, 낯선 손님을 받지 않소이다. 옛말에 그림자와 온기가 느껴지면 산 사람이고, 밤길에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최근 몇 년 사이에 괴이한 일이 자주 벌어진 터라, 매사에 조심하는 수밖에 없소. 방금 선생께서 많이 당황하셨겠구려?”
찻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찻잔을 채웠다. 노인이 차를 다 따르고 나니, 찻잔에 일렁이던 물결이 한결 잠잠해졌다.
“물 먼저 드시지요.”
“괜찮습니다. 언제나 조심하는 게 좋지요. 아, 잘 마시겠습니다!”
다시금 감사 인사를 건넨 계연은 찻잔을 손에 들었다. 별달리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아, 계연은 물을 호로록 들이켰다. 이때, 노인이 돌연 질문을 하나 던졌다.
“선생, 선생은 귀신이시오?”
“푸웁…….”
계연이 입에 머금었던 찻물을 뿜고 말았다.
“케엑, 켁……. 노인,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귀신일 리가 있나요!”
전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질문에 계연은 사례가 걸렸다. 그가 한참 동안 기침을 하자, 옆에 있던 노인이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하오, 선생. 이 늙은이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데, 문득 무슨 일이 떠올라서,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소. 아무래도 이곳이 외진 마을이다 보니, 저녁에 지나가다 촌락에 들르는 사람이 흔치 않소이다.”
기침하던 계연은 영기를 이용해 목을 가다듬었다. 계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궁금한 듯이 물었다.
“확인이라니요? 어르신께서 제 맥을 짚어보셨잖습니까?”
“옳소. 다만, 죽은 후에도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소. 그런 경우에는 정체를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면전에서 터놓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소. 우리는 이 방법을 원앙법(鴛鴦法)이라고 부르오.”
‘별 특이한 명칭이 다 있네? 원양? 원한? 설마, 원앙은 아니겠지?’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을 떨쳐낸 뒤, 계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르신, 이곳에 귀신이 자주 출몰합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무튼, 악귀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지난 몇 년간, 억울하게 죽은 망령을 본 적이 있소. 이 허허벌판에 마을이라곤 우리 촌락 하나뿐이라, 주민들이 모두 경계하고 있소. 행여나 악한 기운이 촌락에 들어오면 큰일이니 말이오. 그나마 귀신이면 다행이지요. 사람은 귀신을 무서워하지만, 귀신도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소이까. 사람이 많아야 마음이 든든한 법이라는 말도 있고요. 다행히 촌락에는 혈기가 왕성한 청년들이 여럿 있소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인이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과거 이 촌락은 꽃뱀으로 인해 소란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있소. 그래서 이맘때쯤엔 해가 질 무렵이면 모두 집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편이오!”
“꽃뱀이요?”
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요괴?’
“그렇소. 들리는 이야기로는, 미인의 얼굴을 지닌 커다란 뱀이라고 하오. 건장하고 젊은 사내들을 속여 잡아먹기를 좋아한다더구려.”
“미인의 얼굴이요? 사람을 속이기까지 한다고요? 노인, 제가 그런 농에 속을 것 같습니까!”
계연이 차가운 숨을 헉 들이쉬었다. 순간, 우규산의 육 산군이 떠올랐다. 요괴가 평범한 사람들이 경계한다고 막을 수 있는 존재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