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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49화 (49/892)

49화. 조용히 기다리다

상인들은 순보현으로 돌아가느니, 지금의 방향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덕원현(德遠縣)과 천주현(千周縣), 당수현(堂樹縣)을 지나고, 구도구현(九道口縣)을 따라 노화산(老樺山)을 넘은 다음, 소순하(小順河)라는 이름의 하류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면, 춘목강에 들어선다고 했다. 그리고 춘목강을 따라 걷다 보면, 춘혜부가 나온다고 했다.

물론, 중간에 자잘한 세부사항과 표지, 인적이 드문 곳을 피해서 가는 것도 알려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다소 복잡했지만, 계연은 행동으로 옮기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올바른 방향으로만 걸어간다면, 사람의 발길이 적은 황량한 곳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야 할 마을을 모두 차례대로 지나간다면, 적당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구도구현은 중추 지역에 속하며, 현 내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못 보고 지나치기도 어려웠다.

* * *

동북 방향의 넓은 길 위.

계연은 평범한 사람들이 종종걸음 하는 정도로 속도를 유지했지만, 겉보기엔 그저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다리를 자세히 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보폭이 꽤 컸지만, 발이 바닥에서 아주 살짝 떨어져 있기에, 속도 또한 그리 빠르지 않았다. 껑충껑충 뛰거나 달리는 것보다는, 평범한 걸음에 가까웠다.

이 정도 보폭을 유지한다면, 길을 잘못 들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체력을 분배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도 딱 적당한 속도였다.

계연이 작은 언덕을 하나 넘으니, 전방에 조그만 숲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 숲의 그림자가 어찌나 짙고 촘촘하던지, 마치 칠흑처럼 어두워 보였다.

계연은 눈을 비비고 자세히 그곳을 살폈다.

‘거 참!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전방의 숲은 세원현과 덕원현 경계에 있었다. 숲의 그늘에는 세원현 성황신과 상선, 벌악, 그리고 검은 우산을 든 저승사자 몇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쇠사슬에는 기다란 뱀 요괴가 묶여 있었다.

계연은 세원현의 성황신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성황신의 법체는 다른 저승계 인사들보다 훨씬 몸집도 크고, 눈에 띄는 빛을 지니고 있었다.

쇠사슬에 꽁꽁 묶여 활기를 잃은 요괴를 보니, 적잖이 고생한 모양이었다. 뱀의 자세는 꽤 야릇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계연이 걸음을 재촉하며, 이를 악물고 숲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서, 세원현 성황신을 비롯한 자들이 계연을 발견했다. 모두가 점점 가까워지는 계연을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계연은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다. 어젯밤엔 상황이 급해서 그런 것이지, 사실 그는 한 현의 저승사자에게 맞설 배짱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숲으로 걸어가던 계연은 아직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손으로 읍을 하며, 경신술을 이용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계연, 세원현 성황신과 각 기관의 나리들을 뵙습니다. 어젯밤인 상황이 급급한데 제가 요괴를 추격할 여력이 없어, 세원현 저승사자분들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과연, 뱀 요괴를 주멸하셨군요. 저 대신 마무리를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계연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솔직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인사를 올린 뒤, 어젯밤 실정을 이야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원현 성황신과 두 기관장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계 선생이었군. 세원현에 나타난 요괴가 멋대로 마을을 헤집어 놓을 뻔하였네. 선생이 정의롭게 나서주어서 고맙네. 뱀 요괴는 이미 주멸하였고, 놈의 혼은 여기에 있네. 선생도 보게나!”

세원현 성황당에 소속된 인사들이 저마다 계연을 향해 공손히 읍하며, 한참 동안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자는 맹인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나를 공경한 자를 나도 공경한다는 말이 있듯, 예로부터 체면과 예의는 모두 주고받는 것이었다.

계연의 말은 성황당의 체면을 세워준 셈이었다. ‘여력이 없어, 세원현 저승사자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같은 거짓말을 할수록, 저승사자는 더욱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벌악사 기관장마저도 흐뭇해하며 만족했다.

“그래, 계 선생도 한 번 보시오. 이놈이 맞소?”

상선사 기관장이 휙 손짓하자, 저승사자 몇 명이 뱀 요괴의 혼을 꺼내 보였다.

“맞습니다. 오늘 날이 밝기 전, 환영을 이용해 외지에서 온 상인을 홀렸지요. 아마도 저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하여, 욕망을 이용해 원기를 흡수하려 했을 겁니다.”

“흠, 계 선생 말이 옳소. 안타깝게도 이 썩을 놈이 계 선생을 몰라보고, 그 검에 찔렸구려.”

벌악사 기관장이 쇠사슬을 손에 쥐며, 뱀 요괴의 영혼을 가까이 가지고 와, 꼬리 부분을 가리켰다. 계연의 검이 닿았던 곳에선 아무런 영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 선생의 묘법이 실로 대단하구려. 순시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뱀의 꼬리에 붙은 불이 신기하게도 꺼지질 않았다지요. 그 검의 풍채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오!”

계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뱀 요괴의 영혼을 살펴보았다. 민생지화(民生之火)에 대한 이해 또한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어제의 상대는 수행이 얕은 뱀 요괴였다. 만약에 더 대단한 존재를 맞닥뜨린다면, 계연은 이 수법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벌악사 기관장이 언급한 ‘묘법’이란 두 글자에, 계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산골 마을의 주민일 뿐입니다. 수행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더욱이 고명한 묘법 따위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공화술(控火術)을 이용해 민생지화를 쓰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속세의 무예 검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검세를 펼쳐서, 운 좋게 뱀 요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지요!”

“공화술? 속세의 검술인가?”

세원현 성황신을 포함한 모든 관리가 조금 의아한 듯이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속세의 무예로 요괴를 죽일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사실 진정한 무도의 고수는 혈기가 왕성하여, 귀신 따위의 일에 쉽사리 휘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둔갑한 요괴가 아닌 이상, 평범한 요괴 정도는 검으로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신기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효과였다.

“네. 민생지화는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무술의 한 기인께서 남기신 책을 바탕으로, 검술을 체득하였습니다. 기예에 도가 트면, 속세의 술법도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은 계연의 속마음이었다. 그는 검의첩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심지어 맨 처음 보았던 수행에 관한 죽간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좌광도의 검법에 진심 어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성황신과 두 기관장은 끝내 그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계 선생의 불을 다스리는 기술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정말 탄복할 따름이오!”

“이 일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계 선생을 방해하지 않겠네. 후에 다시 세원현을 찾았을 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주게!”

세원현 성황신의 말에, 나머지 기관장과 저승사자들이 계연을 향해 손을 모아 인사했다. 그들은 이만 성황당으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어쨌든 일이 좋게 마무리되었으니, 쓸데없이 서로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었다.

‘잠깐! 지금 도움이 필요한 게 하나 있어!’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계연은 얼굴이 꽤 두꺼운 사람이었다. 그는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성황신이시여.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무리한 부탁이긴 하지만, 세원현 성황당에 선인에 관한 전적(典籍)이 있습니까? 만약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자세히 연구해 봐도 될는지요?”

말을 마친 계연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크기는 상관없고, 아무 전적이라도 괜찮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계연은 성심성의껏 허리를 숙이며 읍했다. 피수술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도 상관없었다. 관련된 서적을 구할 수만 있다면, 계연은 모든 체면을 던져 버릴 수 있었다.

계연의 부탁에 성황신과 기관장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계연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 계 선생, 그것들로 무얼 하려 그러는가?”

“당연히 참고해서 수련하려고 그러지요! 저는 선인이 되려고 도를 닦는 중이오나, 의지할 곳이 없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성황신께서 이번 한 번만 저를 도와주시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건 영안현에서의 일과 결이 달랐다. 우연이긴 했지만, 그때는 사실 계연이 성황당에 도움을 주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연이 고작 조예가 얄팍한 뱀 요괴 한 마리를 처치한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처음에는 계연과 세원현 성황당 사이에 약간의 오해도 있었다.

그러나 세원현 성황신은 생전에 큰 덕행을 남기고, 현재 향불로 바쳐지는 공덕을 지닌 존재이기에, 계연의 간절한 부탁쯤이야 들어줄 수 있었다.

계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토록 간절히 부탁한 적도 없었다. 사실 그가 세원현 성황당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건 맞지만,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온전히 상대의 권한이었기에, 강요할 수는 없었다.

세원현 성황신과 기관장들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책 몇 권을 읽고 싶다는 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계연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그들은 계연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그 법결들을 몰라서 그러는 건가?’

다소 황당한 부탁이긴 했지만, 계연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줄 수는 있었다.

세원현 성황신은 한참 동안 계연을 살펴보았고, 계연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초점 하나 없는 희뿌연 눈이 우물처럼 짙은 깊이를 드러냈다.

“계 선생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도록 하겠네. 안타깝게도 세원현에는 선인에 관한 고명한 책은 없다네. 그러나 옛 잡서인 <외도전(外道傳)>과 <통명책(通明策)>이 한 권씩 있으니, 이것들을 선생에게 주도록 하지!”

‘외도전? 통명책?’

그것은 계연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비록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다룰 수 있는 시시한 공화술과 피수술은 아니었다.

터주신들은 땅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동시에 땅에 구속되었다. 특히 향불에 대한 의존성이 짙은 성황신은 웬만해선 자신의 관할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행이 경지에 올랐다 할지라도, 관할 지역을 벗어나면 터주신들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수행의 경지가 낮은 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영안현이나 세원현처럼 작고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마을에서 이러한 수확을 얻다니, 계연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계연이 세원현 성황당 일행을 따라갈 준비를 하던 그때, 성황신이 갑자기 소매에서 두툼한 책 두 권을 꺼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계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책을 다 들고 다니는 건가?’

“마침 심심할 때 읽으려고 외도전과 통명책을 가지고 있었네. 비록 이름난 책은 아니나, 요즘엔 구하기 어려울 걸세. 내 오늘 이것들을 계 선생에게 선물로 주지!”

성황신이 책을 건네자, 계연이 허겁지겁 두 손을 내밀었다. 책이 손에 닿자, 시원한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놀랍게도 푸른 배경에 적힌 <외도전>과 <통명책>이라는 제목이 계연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이건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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