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0화 (50/892)

50화. 잡서, 천록(天籙)

“감사합니다, 성황신!”

지금 계연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는 문득 지난 생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그 무렵, 인터넷 소설이 막 인기를 몰기 시작해서 계연의 친구들은 A4 용지에 불법으로 인쇄한 소설책들을 돌려 보곤 했다. 종이 위에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금 계연은 당시 두꺼운 종이 뭉치를 손에 얻었을 때처럼, 흥분되고 즐거웠다.

감사 인사를 건네던 계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천천히 외도전을 펼쳐 보았다. 겉표지를 넘기자, 아무런 글도 없는 빛바랜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을 읽을 때 글이 흐릿하게 보인 적은 있지만,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은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무자천서(無字天書)인가?’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니, 책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문자가 서서히 또렷해지더니, 계연의 시야에 명확한 문자로 이루어진 글이 펼쳐졌다.

이때, 문장 하나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물 속성의 요괴 중, 교룡(蛟龍)은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의 악한 기운에 백 리가 잠기고, 선한 기운에 구름과 비가 움직인다…….》

계연의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성황당 일행이 아직 앞에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그는 허겁지겁 책을 덮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황신, 책을 선물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꼭 필요하던 거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음, 선생의 마음에 들다니 다행이군. 남은 여정도 순조롭게 끝마치고, 훗날 다시 만나길 기원하겠네. 잘 가시게나!”

그 말을 끝으로, 세원현 성황신이 인사를 건네었다. 계연이 막 답례를 올리려 했으나, 성황신은 이미 경신술을 활용해 저승사자들을 이끌고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계연도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황신은 감추려고 했겠지만, 계연은 성황신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중요한 건, 그가 너무 갑자기 떠났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나름 화기애애했는데?’

심지어 세원현 성황신은 본인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가 버렸다.

시원한 바람에 계연의 옷깃과 귀밑머리가 살며시 나풀거렸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혹시 이것들이 성황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인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계연은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뒤쫓아가 책을 돌려주자니, 손에 들어온 책이 너무 아까웠다. 계연은 훗날 어떻게든 보답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외도전 겉표지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첫 장엔 이러한 글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외도전은 천록(天籙)의 책이다. 도에 통달한 자에게는 한눈에 보일 것이며, 현기(玄機)를 깨달은 자에게는 마음이 안정을 찾았을 때 보일 것이고, 현명한 자에게는 간혹 글이 보일 것이며, 저속하고 범속한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계연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오해, 진짜 오해였어……. 눈도 안 보이는데 글이 보였으니까, 아마 난 책에서 말한 '지혜로운 자'겠지?'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성황신은 이미 떠나 버린 후였다. 세원현 성황신은 계연이 천록서를 모르는 척하며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황신이 화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다음에 설명하자, 지금은……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해!’

사실상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계연은 영기로 바람을 일으키며, 또다시 푸른 형체로 변해 빠르게 세원현을 벗어났다.

계연이 도망치듯 떠날 무렵, 멀리 떨어진 언덕 뒤편에 또다시 세원현 성황신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계연이란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천록서(天籙書)도 모르는 거지?’

* * *

좋은 일이 생기면 기분이 상쾌해지기 마련이다. 앞서 세원현에서 작은 오해를 빚긴 했지만, 세원현 영역을 벗어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계연의 마음에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그는 한달음에 수십 리를 달려나갔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달리던 계연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뒤에야 속도를 줄였다. 무심코 조용한 곳을 찾아 온전히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그는 일부러 구석진 곳을 찾아 달리기도 했다.

계주 남부 지역은 대부분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이 지대에서는 크고 작은 언덕과 작은 담벼락이 흔히 보였다.

계연의 눈에 멀리 암석으로 이루어진 비탈이 보였다. 4~50척 높이에 십수 척 길이를 한 비탈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계연이 마주한 비탈길에는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놓인 커다란 암벽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신비일까? 움푹 팬 암벽에는 제비콩 모양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깊이는 몇 척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길이는 무려 50척(*약 16m)이 넘었으며, 높이는 평범한 성인의 키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오호라, 여기가 좋겠다!”

호탕하게 웃던 계연은 다시금 속도를 높이며, 부푼 기대를 안고 앞으로 달려갔다.

암벽 아래 도착해 고개를 든 계연은, 암벽의 비스듬한 각도 덕분에 암벽이 비를 잘 막아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울퉁불퉁한 북쪽 동굴 앞에 도착하고서 거칠게 소매를 휘둘렀다. 소맷자락이 일으킨 거센 바람이 순식간에 암석을 덮은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우산을 한쪽에 내려놓고, 보따리를 베개 삼아 철퍼덕 자리에 누웠다. 이어서 그가 품에 고이 모셔둔 <외도전>을 꺼냈다.

계연은 책을 읽자마자, 책에 푹 빠지고야 말았다. 앞서 영안현 성황신이 선물한 죽간에 나오는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도 있었지만, 대체로 새로웠다. 이미 아는 내용일지라도 상세한 설명과 재미난 이야기가 더해지니, 계연은 이 책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비록 정통 선도(仙道) 비법서는 아니었지만, 재미있었다. 그것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늘에서는 서서히 땅거미가 지더니 시간이 흘러 다시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어느새 꼬박 하루 밤낮이 지났지만, 계연은 여전히 책 속에 푹 빠져 있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이 되자, 그는 천지의 기운을 영기로 흡수했다. 물론 시선은 외도전에 고정한 채 말이다.

책장에 적힌 자그마한 문자들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간에는 곰곰이 헤아려야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었다. 얼핏 보기엔 구애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쓴 글 같았지만, 다른 각도로 반복해서 읽다 보면 문장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생의 경험 덕분에, 계연의 상상력은 극도로 풍부했다. 짧은 이야기일지라도, 신령스러운 기술(記述)과 집중해야만 눈에 보이는 신비로운 삽화 덕분에, 계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릿속에 이야기를 그렸다.

그는 피곤함도, 배고픔도 잊고 책에 빠져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올 때면, 보따리에서 대추 몇 알을 꺼내 허기를 달랬고, 졸리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피로를 떨쳐냈다.

계연의 정신은 말짱했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의 몸 상태는 처참해졌다. 며칠 내리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쓴 덕분에, 여간 지저분한 게 아니었다.

* * *

우르르-.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치는 소리가 계연을 깨웠다. 그가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니, 짙은 먹구름이 태양을 가린 채 몰려오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때마침 교룡이 비를 몰아오는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계연이 감상에 젖은 채 말했다.

“망종에 내리는 단비로구나!”

때마침 오늘은 5월 4일이었다.

곧이어 계연의 머리 위로 내리쬐던 햇빛이 엷어지더니, 거대한 먹구름이 뭉게뭉게 밀려왔다.

우르르.

또다시 천둥 치는 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천둥이 치기 전,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마치 카메라 셔터처럼 밝은 빛이 번쩍였다.

휘오오, 휘오오-.

먼 광야에 먼저 들이닥친 바람이 풀과 흙을 휘날렸다. 다행히도 계연이 있던 조그만 암벽이 바람을 막아주었다. 게다가 동굴 천장의 비스듬한 각도 덕분에, 주변을 덮친 거센 바람에도 동굴 안은 비교적 평온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겠네!”

계연은 웃으며 보따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그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계연은 보따리 안을 이리저리 살핀 끝에, 구석에서 대추 네 알을 겨우 찾아냈다. 이게 전부였다.

‘설마 대추를 다 먹은 거야?’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제야 계연은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채우는 건 현실적인 문제였으니 말이다.

“아……. 어떻게 얻은 대추인데. 허기 달래기도 딱이라 아껴서 먹으려고 했는데, 벌써 다 먹으면 어떡하지? 겨우 얼마나 됐다고…….”

한숨을 내쉬던 계연이 돌연 귀를 쫑긋했다. 계연의 귀로 조금 독특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계연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왼쪽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시야로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다니네?’

잠시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형체가 또렷해졌다. 사람 셋에 마차 한 대, 그리고 말 두 필이 암벽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가 와룡벽(臥龍壁)이야. 비가 오기 전에 어서 가자, 어서!”

“빨리, 주자(柱子), 옥련(玉蓮), 마차에서 내려. 그래야 마차도 빨리 올라가지.”

뒤이어 누군가의 외침과 채찍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비를 피하러 오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계연은 자신이 앉아있는 제비콩 모양의 동굴과 암벽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와룡벽? 대체 어딜 봐서 용 같다는 거지?”

또다시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마차를 몰고 온 일행은 소위 와룡벽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일행은 동굴 한켠에 보따리를 베고 누워 자신들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이들 중 나이가 반백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계연을 향해 살며시 공수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던 계연은 그저 책을 안고 살며시 읍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일행은 허겁지겁 마차를 동굴 입구까지 몰고 왔다. 그들 중 건장한 사내 둘이 빠른 몸놀림으로 마차에서 끝이 뾰족한 나무토막 하나와 나무망치를 꺼내고선, 한쪽에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한바탕 정돈을 마친 뒤에야 마차와 말 두 필이 동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겨우 시름을 놓은 일행은 하나둘 동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 계연에게 공수한 어르신과 건장한 사내 둘, 그리고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부인 하나와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하나, 사내아이 둘까지, 일행은 총 일곱 명이었다. 사내아이 중 하나는 윤청보다도 어려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동굴 입구에 묶인 말과 동굴 안에서 비를 피하는 일행을 훑어보던 계연은 딱히 흥미로운 점이 없어,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르르, 쾅!

또다시 천둥이 쳤다. 십수 초가 흐르고 나서 거센 빗줄기가 대지를 적셨다.

솨아아-.

동굴 밖은 분명 요란해졌는데, 어째서인지 돌연 천지가 고요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와룡벽이라도 가까워서 다행일세!”

어르신이 홀가분한 목소리로 운을 떼자, 일곱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종(鈡) 숙부,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매년 이맘때쯤이면 벼락을 동반한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구나. 갑작스레 내린 만큼 금세 그칠 테니, 아마 한 시진(*一時辰: 약 2시간) 정도면 그칠 게다.”

“백부님, 백부님, 저기 누가 누워있어요. 더러운 바닥에 누워서 꼼짝 않고 자는 걸 보니, 아마 거지겠죠?”

어린 사내아이가 계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떼끼, 다른 사람한테 손가락질하면 못써. 다들 비를 피하러 온 나그네일 뿐이다!”

종씨 성을 지닌 어르신이 엄격한 목소리로 아이를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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