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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53화 (53/892)

53화. 배고파 죽겠네

향기를 맡은 노인은 생긋 웃으며 계연을 따라, 대추 두 알을 한입에 집어 넣었다. 대추를 씹을수록 상쾌한 향이 입안 구석구석을 적셨다.

“맛이 좋소. 영기는 적지만, 맛과 향이 훌륭하오. 대추를 좀 더 먹고 싶은데, 선생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줄 수 있소이까?”

계연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미 다 떨어졌을 겁니다. 제가 집을 나서기 전, 제 친우에게 대추를 몽땅 따서 마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했거든요. 날짜를 보니, 지금쯤이면 다 나눠주고 없을 것 같아요.”

노인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리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선생의 친우가 남은 대추를 숨겨 놓았을 수도 있지 않소. 그에게 좀 나눠주라고 하면 될 거요.”

“어르신. 제 친우는 신통한 힘도, 기이한 기술도 없는 평범한 마을의 훈장입니다. 게다가 집에 아이도 있어서, 애초에 대추를 숨겨두지도 못할걸요!”

노인이 보아하니, 대추를 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계연의 말에 담긴 내용은 노인의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생의 친우가 평범한 인간이외까?”

잠시 당황하던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명성이 높은 인재요?”

자신이 썼던 편지를 떠올린 계연이 노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평범한 인물입니다.”

노인이 살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일개 서당의 훈장이 무슨 은덕과 능력을 지녔길래 선생의 친우가 될 수 있었던 것이오?”

계연은 쪽쪽 빨던 대추씨를 뱉은 뒤,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은덕과 능력이라니요? 저 계연이 그를 친구로 삼겠다는데, 다른 까닭이 필요한가요?”

이로써 노인은 오늘 두 번이나 얼이 빠졌다. 심지어 이번에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훌륭하군, 훌륭해. 선생 말이 맞소! 계 선생이 친구라고 부르는 자라면, 누구든 선생의 친구가 될 수 있지요. 하하하하하…….”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웃음에 계연은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노인은 어느덧 축축하게 젖은 옷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은 이 요괴도 계 선생의 친구가 될 수 있겠소이까?”

그 말에는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기대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목을 가다듬고 침을 꼴딱 삼킨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승낙의 말 대신, 다른 말을 건네었다.

“그럼 다음번에 어르신께서 제게 술을 사셔야죠!”

“무슨 술을 마시고 싶은지,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하하, 무슨 술이든 상관없어요. 선계의 귀한 술도 좋으나, 속세의 화조주도 취하기엔 충분합니다!”

“하하하, 속세의 화조주도 취하기엔 충분하다니, 거 참 재미있는 말이오!”

노인이 읍을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늙은이는 통천강(通天江)의 응굉(應宏)이올시다!”

계연이 재빠르게 읍하며 말했다.

“저는 계연, 영안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노인의 만면에 웃음꽃이 환히 피었다. 계연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노인은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갔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계연을 보았다.

“노부는 이만 계주 각 부에 망종의 단비를 내리러 가야 하오. 다음에 만날 땐, 내 반드시 계 선생에게 술 한 잔 사드리겠소이다!”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흐릿한 용의 형상으로 변해, 삽시간에 구름 위로 사라졌다.

크르릉!

용의 울음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하늘가에 울려 퍼졌다.

* * *

용 응굉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잠시 뒤에 하늘을 조각낼 듯 울리던 천둥소리가 멈추며 먹구름 또한 서서히 개었다. 계연은 그제야 바닥에 축 늘어져 앉았다.

“후…….”

반쯤 누운 그는 왼쪽 가슴을 문지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계연은 앞으로 자신의 심장이 나날이 강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닥에 잠시 누워있으니, 그제야 몸이 회복되었다.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치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자, 순간 먼지가 뭉텅이로 털어져 나왔다.

“콜록, 콜록……! 크흡……. 대체 먼지가 얼마나 쌓인 거야!”

두피가 간지러운 기분에 머리를 긁어 보니, 손가락 사이로 때가 끼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탁!

그는 손가락을 휙 튕기며, 손톱 사이에 낀 때를 날려 보냈다.

“하하, 이러고 보니 진짜 조금 꾀죄죄한 고인 같은데!”

보따리를 짊어지고 구석에 놓인 지우산을 겨드랑이에 끼운 그는 암벽을 벗어났다. 계연은 옷깃을 펄럭이며 먼 곳으로 향했다.

방금 내린 비 때문에 땅은 질펀했다. 계연이 보폭을 최대한 넓혔지만, 여전히 몸 곳곳에 흙탕물이 튀었다. 물론 계연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수술로 흙탕물을 막을 순 있었지만, 괜한 영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기분이 좋았던 계연은 사방으로 튀는 흙탕물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아이처럼 이를 즐겼다. 그는 힘을 조절해 가며, 다음번엔 흙탕물이 얼마나 튈지 혼자 내기를 했다. 그와 동시에 흙탕물이 튀며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피곤함도 잊은 채 말이다.

계연이 이렇게 놀았던 마지막 때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새 장화를 샀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계연은, 반 친구들과 함께 누가 흙탕물을 더 높이 튀기는지 경쟁했었다.

사실 계연은 아직도 천지화생을 다룬 기초적인 <도기결> 한 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연기결(鍊氣決)>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니 계연의 체내에 움직이는 것은 신통력이라기보단, 제대로 단련된 영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았다. 이것은 그저 육신을 윤택하게 하고, 작은 술법을 펼치게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순간, 신통력에 문외한인 계연은 가슴이 뻥 뚫리며 동심에 젖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내달리던 계연은 방향감각에 의지하여 동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완전히 사라지자, 계연의 시야에 저 멀리 마을의 윤곽이 보였다.

* * *

덕원현은 영안현보다 훨씬 더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다. 계연은 현에 들어서자마자 사람이든 건물이든 죄다 영안현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안현은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인구가 자그마치 2만 명에 달했다. 현도(*縣都: 현청 소재지)에만 만 명이 넘게 거주했다. 연안현에 소속된 유능한 관리들 덕분에, 최근 몇 년 사이 영안현의 인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났다.

한편, 덕원현은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었다.

그래도 이곳 또한 현도였다. 거리를 따라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꽤 많은 행인과 상인들이 주변을 오갔다.

계연은 등에 메고 있는 보따리를 꽉 움켜쥔 채,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를 따라 300척(*약 100m) 정도 떨어진 주루(酒樓)로 걸어갔다. 지금 그는 뛰어난 청력이나 안타까운 시력에 의지해 행인들 사이를 누빌 필요가 없었다. 그 까닭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서 그를 피해 갔기 때문이다.

그제야 자신의 행색이 떠오른 계연은 무심코 팔을 들어 옷소매에 코를 들이밀었다.

‘음, 냄새가 그렇게 심하진 않네!’

정오 무렵인지라, 주루와 식당이 밀집한 곳과 가까워질수록 소음이 배로 증가했다. 물론 주변을 오가는 행인들도 백 보 밖보다 훨씬 많아졌다.

“자, 자, 어서 오세요! 회객루(匯客樓)에 오늘 갓 잡은 양과 푹 고아낸 닭, 직접 빚은 미주(*米酒: 찹쌀로 빚은 술)도 있습니다. 어서들 오셔서 맛있는 식사와 시원한 술 한 잔 하고 가세요!”

회객루라는 주루는 2층이 전부였다. 면적과 규모는 영안현의 유명한 묘외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담했지만, 주루 입구의 점소이의 목청만큼은 대단했다. 계연은 이것 또한 일종의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오랜 시간 소리를 치면 목이 갈라지고 잠기기 마련이었는데, 점소이는 매일같이 손님을 모으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가.

속사정은 본인만 아는 법이었으니, 계연은 친절한 접대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른 손님을 따라, 회객루 안으로 들어섰다.

만약 입장마저 거절당한다면, 우선 씻을 만한 곳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계연을 발견한 점소이는 난처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었다.

주루 안에 들어서자, 향긋한 음식 냄새가 뜨거운 열기를 따라 흘러와 계연의 코끝에 맴돌았다. 쩝쩝 음식을 씹는 경쾌한 소리에 계연은 금방이라도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았다.

대추가 아무리 맛있어도, 계속해서 대추만 먹고 지낼 순 없었다. 하물며 이제는 대추마저 동나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먹음직스럽고 뜨끈한 요리를 본 계연은 마치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군침을 흘렸다. 어렴풋이 빈자리가 난 것을 확인한 그는 냅다 달려가 자리를 차지했다.

계연이 보따리와 지우산을 탁자 한편에 내려놓자, 소이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계산대 쪽에선 퉁퉁한 몸에 팔자 수염을 한 중년의 주인장이 진흙과 먼지를 뒤집어쓴 계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점포에 들어온 이상, 모두가 같은 손님이었다. 얌전히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손님을 내쫓는다면, 회객루의 명성에 금이 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변 손님들이 하나둘 불쾌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중앙에 앉아있는 계연을 보곤, 그대로 뒤로 돌아 주루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주인장이 점소이를 향해 손짓했다. 이를 본 점소이가 재빠르게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가서 저 손님한테 자리를 바꿔드려도 괜찮을지 여쭤봐. 우리가 구석에 탁자를 하나 마련해 두었으니, 추가로 음식을 하나 더 주겠다고 해. 말투도 나긋나긋하게 하고. 알았어?”

머리에 두건을 두른 점소이는 주인장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눈길을 사로잡는 계연의 모습에 점소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점소이는 종종걸음으로 계연에게 다가갔다. 수건으로 계속해서 손을 닦던 점소이가 말을 걸기도 전에, 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자리 좀 바꿀 수 있을까요? 구석진 자리라도 괜찮으니, 자리 좀 옮겨주세요. 자리 옮기는 김에, 음식도 같이 주시고요. 어서요!”

그 사이,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따리와 지우산을 들었다. 그는 방금 막 꺼낸 젓가락 한 쌍도 손에 쥐었다.

“아…… 네. 손님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점소이는 계연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재빠르게 길을 안내했다. 점소이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넨 계연에게 회객루의 대표 음식을 소개했다.

잠시 후, 정문 귀퉁이에 놓인 탁자 앞에 선 점소이는 계연의 주문에 또 한 번 넋을 놓았다.

“돼지고기졸임, 닭찜, 떡, 버섯볶음, 배추찜, 절인 무채, 무볶음, 음, 손님……저희가 무볶음 한 그릇은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점소이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점소이는 연신 계연과 쭈글쭈글한 보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어쩌면 계연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그나마 멀쩡한 건 지우산뿐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계산할 돈이야 충분하니, 맛있는 음식을 내어 오시기만 하면 돼요.”

계연이 웃으며 점소이를 안심시키더니, 품에서 쇄은자 두 개를 꺼냈다. 그는 무시당했다며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점원이었어도, 그와 같은 행색의 손님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주문하면 의심을 했을 테니 말이다.

점소이가 떠나고, 홀로 남은 계연은 가장 고된 기다림을 견뎌내야 했다. 현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배가 고팠는지 몰랐는데, 고소한 냄새에 후각이 자극을 받으니, 음식을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고역이었다.

그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이따금 깊이 숨을 들이쉬며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았다. 이게 생고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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