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모처럼 만났으니
그렇게 계연은 책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통명책>이었다.
똑같은 천록서인데,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앞서 책을 대략 훑어본 계연은 통명책이 외도전보다 더 ‘정통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도를 닦는 데 도움이 되는 진정한 법결 같은 건 적혀있지 않았지만, 수행해야 하는 각 관문의 어려움과 위험 사항을 짚어주는 책이었다. 여러 수선자들의 관점에 저자의 경험을 더해서 요약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듯했다. 심지어 책에서는 귀신과 요괴에 관한 내용도 다루고 있었다.
지난 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선자들을 레벨업 시키는 책이었다.
‘그런데 왜 통명책도 잡서라 불리게 된 걸까?’
계연은 저자의 상상과 추측이 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책의 주요 내용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책의 주요 내용이라고 해 봤자, 천록서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말들뿐이었으니, 잡서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연은 생각이 달랐다. 비록 외도전에 비해 책 내용이 무미건조하긴 했지만, 나름 유용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이론적으로는 아직 연기결도 모르는 계연이 활용할 수 없는 지식들이었다.
“기를 연마하는 것과 신이 되는 것, 요괴가 되는 것과 법신(法身)을 얻는 것, 이것은 모두 법력이요 영력이니라……. 소위 관문에 대한 두려움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이나,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휴……. 아직 갈 길이 머네!’
낚시하며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한 시진(*一時辰: 약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계연의 낚싯대는 여전히 미동 없이 잠잠했다. 참다못한 계연은 낚싯대를 들어 확인했지만, 바늘에는 여전히 쌀알만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외도전 내용이 가짜인가? 아니면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이 다 잡아가서, 물고기 씨가 말랐나?’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높이 태양이 떠 있었다.
‘설마 저녁까지 기다려야 하나?’
계연은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아마 산신당에서부터 그는 썩 괜찮은 품성을 기른 듯했다.
그가 보따리에서 밀전병을 꺼내 천천히 베어 물었다. 구도구현에서 산 전병이었는데, 크기는 손바닥 두 개 만하고, 한 봉지에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식감이 부드러웠다. 달착지근한 맛에 말린 야채까지 들어 있어, 계연의 입맛에 딱 맞았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주황빛 노을이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히고,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계연의 귀에 조금 희한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못이 아닌,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히히……. 드디어 연못에 다 왔다! 빨리 가자, 빨리!”
“아이고, 참 체력도 좋다. 난 힘들어 죽겠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렴풋이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가벼운 발소리도 함께 계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깨끗한 담청색 옷차림의 그들은 열셋에서 열넷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였다. 가볍게 바위를 넘고 시냇물을 건넌 이들은 노화산에서 가장 조용한 곳에 도착했다.
“어, 저기 사람이다!”
여자아이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옆에 있던 남자아이도 멀리 보이는 계연을 발견했다.
“진짜네. 날도 어두운데, 뭐 하는 거지? 낚시하는 건가?”
“그런가 봐! 하하하……. 설마 뭐가 잡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가자, 가자. 모처럼 만났으니까, 저 사람 놀려주자!”
“히힛!”
걸음을 늦춘 두 아이는 계연을 놀라게 하려는 듯, 매우 조심스럽게 연못으로 접근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자, 두 아이는 생긋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뒤이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내밀고 입을 벌렸다.
“워!”
그러나 이들이 상상했던 것과 달리, 낚시하던 사람은 낚싯대를 내던지지 않았다. 계연은 마치 귀가 먼 사람처럼 한 손에 낚싯대를 쥐고, 무릎에 놓인 책을 읽으며 전병을 먹었다.
“안 놀라네?”
“귀가 안 들리나?”
“재미없어!”
“흥!”
두 아이는 허탈해하며 연못 옆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계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재미있어?”
연못으로 걸어가던 두 아이가 화들짝 놀라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귀 안 들리는 거 아니었어요?”
“이건 반칙이죠. 저희를 놀라게 하면 어떡해요?”
두 아이가 분한 듯 씩씩거리자, 계연은 고개를 돌려 웃음 지었다.
“모처럼 만났잖니!”
숨이 턱 막힌 아이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농을 마친 계연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두 아이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렇다. 아주 또렷이.
두 아이가 입은 담청색의 옷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아이들의 신발도 모래 한 알 없이 깔끔했으며,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지나온 아이들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이 늦은 시각에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심지어 섬뜩하기까지 한 이 연못을 보러?’
다시 아이들의 뒤를 살피니, 어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두 아이가 평범한 사람일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희한하게도 아이들에게서 요사스러운 기운이나 음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신인가? 아니면, 드디어 진정한 수선자를 만나게 된 건가?’
계연의 마음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설레지는 않아서, 그는 계속해서 책 읽는 척을 했다. 다만 저 아이들의 내막이 너무도 궁금했다.
계연이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보다 못한 아이들이 다가왔다. 사내아이가 말했다.
“이봐요, 어부 아저씨. 언제 가실 거예요? 어차피 물고기 못 잡아요.”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말했다.
“날도 어두운데, 산에서 들짐승 마주칠까 봐 무섭지 않으세요?”
평범한 사람의 논리적 관점에서 질문하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계연이 다시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날도 어두운데, 어린 애들끼리 산에서 뭐 하는 거니? 들짐승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집안 어른들이 걱정하면 어떡해?”
“우린 안 무서워요!”
“맞아!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설득력을 높이려는 듯, 여자아이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가 나이는 어려도, 무공이 훌륭하거든요!”
웃음 짓던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몰라봐서 미안하다. 그런데, 나도 무섭지 않아. 나 또한 무공이 훌륭하거든.”
말을 마친 계연은 또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곧 죽어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계연은 아이들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두 아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비슷한 나이라고 추측했다.
“쳇, 여기서 밤새 있어 봤자, 한 마리도 못 잡을 거예요!”
사내아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계연의 눈썹이 움찔했다. 낚싯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분명 연못 안의 낚싯바늘을 건드렸다.
곧이어, 낚싯줄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을 게슴츠레 뜬 계연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낚싯대가 당겨지기는커녕, 외려 마술에 걸린 것처럼 동그랗게 휘다가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파앗!
잔잔하던 연못에 한바탕 물줄기가 튀었다. 검지만 한 크기에, 반투명한 은색을 띠는 작은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린 채, 낚싯대의 방향을 따라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은규자(銀竅子)다!”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사내아이가 반사적으로 소매에서 동그란 남색의 옥 장신구를 꺼내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갑작스레 커져 버린 남옥이 엷은 남색의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뛰어오른 물고기에게로 날아갔다. 밝은 빛이 옥 장신구 뒤쪽에 희미한 주머니 모양의 윤곽을 그려냈다.
이때, 계연의 대나무 장대가 강호 제일의 고수가 휘둘렀던 기술에 따라 마구 흔들렸다.
“어!?”
낚싯줄에 매달린 은색의 물고기는 마치 한 마리 새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남옥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은색의 물고기를 잡지는 못했다.
옥 장신구가 은색 물고기를 두어 번 정도 스치고 지나가자, 계연은 장대를 아래로 흔들었다. 낚싯줄과 낚싯바늘에 매달린 은색의 물고기가 순식간에 밑으로 떨어지며 계연에게 날아왔다.
연못에서 튀어 오른 물줄기가 계연의 앞에 작은 고무공만 한 크기로 응집했다.
퐁!
물방울이 형성되던 바로 그 순간, 은색의 물고기는 정확히 물방울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계연은 적당히 힘을 조절해, 물고기 입에서 낚싯바늘을 빼냈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허공을 날아다니던 옥팔찌를 거둬들였다. 두 아이는 물방울 안에 갇혀 도망치지 못하는 은색의 물고기를 보더니, 계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정체가 뭐야? 감히 벽수담(碧水潭)에 와서 은규자를 훔치다니!”
잠시 낚싯대를 내려놓은 계연은 잔뜩 성난 표정의 아이를 바라보고 섰다.
“벽수담이 옥회산 거니?”
팔찌 모양의 푸른 옥 장신구를 보자마자, 계연은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옥회산을 알고 있으면서, 은규자를 내놓지 않겠다는 거야?”
사내아이는 굉장히 앳된 말투로 말했다. 평범한 집안의 어린아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나절 동안 기다려서 겨우 한 마리 잡은 거야. 아무리 옥회산이 계주의 명문 도파라지만, 대놓고 빼앗으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당신……! 벽수담은 우리 옥회산 거야! 그러니까 은규자도 우리 거고!”
“우린 벌써 몇 년째 이곳을 찾아와 은규자를 기다린다고!”
만약 과거의 계연이었다면, 아이들의 말에 지레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하, 이 벽수담에 아무런 규제가 없고, 옥회산과 칠팔백 리 떨어져 있다는 연유로, 벽수담이 옥회산 소유가 된 건가?”
말을 마친 계연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두 아이의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어른들 안 계십니까? 애들이 너무 소란을 피우네요!”
사실 이것은 계연이 풍자를 섞어 던진 미끼였다. 그러나 곧이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폐를 끼쳤군요. 이건 변명의 여지 없이 저희 옥회산의 잘못입니다!”
계연의 목소리처럼 낮거나 힘 있진 않았지만, 온화하고 고상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와 함께, 남색의 장포를 입고 옥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의 사내가 하늘을 날듯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전까지 계연은 그 누구의 흔적도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껏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계연은 놀라 자빠질 뻔했다. 다행히도 열심히 훈련해온 덕분에, 계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더욱이 그의 희뿌연 두 눈에는 아무런 물결도 일지 않았다.
사실 상대도 계연 때문에 적잖이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연이 어떤 신성함을 타고났는지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빛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 상대는 한없이 평범한 민간의 백성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특히 방금 저 사내가 아이들을 놀리며 낚싯대와 낚싯줄을 휘두르던 솜씨가 상당히 훌륭했는데, 의아하게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법력을 발휘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웬만한 장인보다 더 훌륭하고 매끄럽게 물을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상대는 매우 간단한 어수술만 사용하고 있었다. 조금도 군더더기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