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9화 (59/892)

59화. 단기를 훔친 바둑돌

구풍과 두 아이가 떠나고 한참 동안, 계연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참을 수 없는 흥분감을 껴안은 채 벽수담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크고 작은 백옥 서표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누가 옥회산 아니랄까 봐, 모든 물건을 옥과 관련 짓고 있었다. 지난번 남옥 팔찌며 이 백옥 서표며, 심지어 구풍의 머리에도 옥으로 만든 비녀가 꽂혀 있었다. 조금 전 계연은 구풍의 옥비녀에서 흐르는 은은한 빛에 감격할 정도였다.

“아참, 위무외 대신 물어봐 준다는 걸 깜빡했네!”

계연이 제 머리를 콩 치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어린 윤청의 일이었다면 절대 잊지 않았을 텐데, 그다지 친하지 않은 위무외의 일이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푸르른 연못 옆에 앉은 계연은 대나무 장대를 옆에 내려놓고, 가부좌를 튼 채로 백옥 서표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은 통명책과 외도전에서도 언급되었던, 물건을 통해 술법의 진수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선술의 특색을 담은 기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비교적 번거롭기에, 일반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매개체는 금, 철, 돌, 옥,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기록자의 기량이 뛰어나고 법력이 강할수록, 매개체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심지어 외도전에는 흐르는 물이나 바람 등의 물질을 매개체로 삼아 진수를 전수하는 사람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굉장히 신비한 경우이긴 하지만 말이다.

옥회산의 영향력이 세서인지, 계연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백옥 서표는 모두 최고급 백옥으로 만든 것이었다. 훌륭한 매개체이기 때문에, 술법을 부리는 자가 신경 쓸 게 없었다.

신비로운 기술인 구신(拘神)은 고작 한 권이었다. 구풍은 이를 십수 년간 연구하였지만, 끝내 복원에 실패했다.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 계연은 우선 책을 한쪽에 고이 내려놓고, 또 다른 백옥 서표를 손에 쥐었다.

위에는 ‘옥회소련(玉懷小鍊)’이라는 커다란 글자와 물결처럼 잔잔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백옥 서표는 천록서보다 읽기가 훨씬 수월했다. 서표를 만진 자가 안에 영기를 주입하면, 자연스레 서표에서 생각이 흡수되어 서표를 만진 이의 머릿속에 상세한 내용을 그려내는 방식이었다.

기초적인 연기결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도기결과 비교할 수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수많은 이치와 선도를 닦는 것에 관한 상세하고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연기결에 비해, 도기결은 하잘것없었다.

세상 밖에는 대우주가 존재하고, 몸속에는 소우주가 존재하며, 해와 달은 별의 틈을 잇는다는 말이 있다. 대우주 못지않게 복잡한 몸속 소우주에 대한 탐색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연기결은 바로 오장육부와 오행을 연결하는 기(氣)를 소우주의 심화(心火)나 신수(腎水) 등으로 단련시켜 영기를 변화시키는 술법이었다. 계연이 보기엔 연기결은 워낙 현묘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범주에 속했다.

“재능이 천부적인 강호의 고수들이 정상에 오르면, 무공에 한을 품고 죽는 까닭이 있었구나. 이건 내공이나 경맥을 깨닫는 걸로는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감탄을 내뱉은 계연은 두 번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기를 단련하는 수련에 돌입했다. 소위 ‘소련(小鍊)’이란, 기를 단련해 도를 닦는 수련의 이전 단계로 기를 기르는 단계라고도 말한다. 이 단계에선 소우주의 음양인 심화(心火)와 신수(腎水)의 기를 기르는 것은 물론, 이를 이용해 법력을 키워야 했다.

다만 도를 닦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기를 감지하여 체내에 주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속 소우주에 음양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계연에겐 어려울 게 없었다.

계연은 다른 수선자들처럼 기초 단계에서부터 체내의 오장육부를 들여다보고 소우주를 시각화하는 어려움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시각화한 소우주는 고작 방 한 칸 남짓한 크기였다.

고요히 앉아서 수행을 이어가던 계연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자연으로 바뀌는 것을 상상했다. 어느덧 그의 머릿속에 한없이 넓고 아득한 천지가 펼쳐졌다.

넓은 대지에 펼쳐진 산과 냇물, 호방하게 흐르는 강물, 해, 달, 별까지. 모든 것이 계연의 뇌리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계연은 산과 하천의 풍경에 몰입하지 않고 재빠르게 중요한 수련을 이어갔다. 신비로운 힘이 자신을 인도하길 바라며 계연이 묵념하자, 그의 심장에 요동치던 활기가 넓은 하늘과 땅으로 이어졌다.

‘심화(心火)여!’

계연이 속으로 읊조리자…….

쿠궁!

어느 거대한 산봉우리에 거대한 태양처럼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계연은 그 무한한 열기를 느낄 것만 같았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계연은 상상했던 것처럼 감정에 복받치진 않았다. 수련 중에도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과 땅에 동화되어서인지 계연의 마음도 대자연처럼 평온했다.

‘신수(腎水)여.’

계연이 또다시 속으로 읊조리자…….

솨아아!

같은 곳에서 거친 파도를 동반한 강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옥회소련에 적힌 묘사와 거리가 멀었다. 이미 오래전에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계연은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기는 음양이 될지어다!’

이는 가장 중요한 두 단계 중 하나였다.

대지 위의 파도와 하늘의 열기 속에, 무궁한 물의 힘은 위로 올라가고, 뜨거운 열기는 아래로 내려왔다.

놀라운 기세로 몰아치던 붉은 열기와 투명한 증기가 거대한 봉우리에 모여들었다.

계연은 눈앞의 경이로운 광경에도 마치 제삼자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불과 물이 서로 맞닿아 서서히 흑백을 이루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두 가지 색은 서로 뒤섞여 천천히 회전하더니, 마치 두 점이 빠진 거대한 태극도처럼 기이한 회오리를 만들었다.

‘음양은 단로(*丹爐: 불로불사의 단약을 짓는 화로)가 될지어다!’

제일 중요한 순간이었다. 잘 참아오던 계연은 더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쿠구궁!

아무런 소리 없이 고요하던 소우주에 우렁찬 폭발음과 함께, 천지가 울릴 듯한 진동이 전해졌다.

거대한 봉우리 꼭대기, 즉, 음양의 중심에 거대한 단로가 오묘한 파문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후…….”

바깥 세계의 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통명책의 묘사가 무시무시한 게 문제였다. 줄곧 어려운 말만 사용하질 않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천 번이나 시도하였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단로가 나타나자, 계연은 잠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선술을 수행하는 자가 극심한 상해를 입지 않는 이상, 몸속의 단로는 소실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계연은 자신의 몸속에 우뚝 솟은 단로를 보며, 자신의 뛰어난 자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계연이 집중하자 몸의 영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단로 앞으로 모여든 영기는 단로에 난 구멍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노화산의 밤은 적막 속에서 흘러갔다. 여명이 다가올 무렵, 계연은 첫 번째 단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마치 무수한 별처럼 단로를 둘러싼 구멍 사이로 단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단기는 시각화된 소우주에서 스며 나와, 육신을 비롯해 소우주와 연결된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 계연이 이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계연이 첫 관문을 돌파한 지금, 단로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단로에 난 구멍은 육신의 기해, 즉 단전(丹田)과 맞닿았다.

선술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현 단계에서 계연에게 주어진 단전은 굉장히 좁았다. 비록 강호의 무술인들도 ‘기해 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단전은, 선술을 닦는 이들이 말하는 단전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계연은 경악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흑돌 하나와 투명한 바둑돌 두 개가 마치 유성처럼 단로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력이 형성되기도 전에, 단기의 칠 할이 부서지고 말았다. 나머지 삼 할은 계연이 안간힘을 쓰며 마음을 다잡은 덕분에, 겨우 단전에 들일 수 있었다. 하마터면 단기를 모두 잃을 뻔한 것이다.

계연이 눈을 뜨고 오른팔을 뻗자, 어렴풋한 형체의 검은 바둑돌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나타났다. 이전과 별다를 게 없는 바둑돌 환영이었다. 바둑돌은 계연이 힘겹게 모은 단기가 소실된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흑돌을 흩트리고 손에 쥔 투명한 바둑돌 두 알도 특별할 게 없었다.

복잡한 마음에 괴로워하던 계연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에이……. 됐다, 됐어. 어쨌든 내 거니까, 도둑맞아도 통제할 순 있을 거야. 어차피 단전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까, 뭐…….”

단기를 도둑맞았다는 표현은, 아마 계연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지어낸 수행 용어일 것이다.

그 시각, 어슴푸레 해가 떴다. 계연은 이만 수련을 접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덧 짙은 안개에 갇혀 있었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이상할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계연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이만 가야겠다!”

* * *

그 무렵, 노화산과 300리(*약 120km) 정도 떨어진 우규산 동굴 안.

조용히 엎드려 있던 방대한 몸집의 육 산군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어둠 속에서 녹색의 매서운 눈을 번뜩였다.

“선생은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며 나의 잘못된 길을 꼬집으셨어. 죄악은 요사스러운 기운을 만들고, 본디 부족한 영성을 훼손하여 악한 기운과 죄업을 늘리지. 이것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 결국 액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하늘의 도리는 음양의 보완과 같아. 그래, 나의 경계가 또 한 가닥 느슨해지는구나! 하하하하…….”

공포스러운 웃음소리 사이로 호랑이는 입을 쩍 벌리며, 창백하고 새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그와 같은 시각, 우규산의 또 다른 중턱에서는 여우의 맑은 울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영안현의 한 침상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자던 윤재성의 얼굴 또한 한결 편안해졌다.

* * *

지우산과 보따리를 주워든 계연은 한쪽에 놓인 대나무 장대를 바라보았다. 가져가자니 불편하고, 놓고 가자니 아까웠다. 세 차례 고민 끝에, 그는 낚싯줄과 낚싯바늘을 떼어낸 뒤, 청록색의 대나무 장대를 연못 옆에 남겨 두었다.

그는 다시금 벽수담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일 년에 딱 한 번 은규자 한 마리를 잉태하는 연못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엔 꼭 그 물고기로 국 끓여 먹을 거야. 대체 무슨 맛인지 내가 직접 먹어 봐야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계연은 성큼성큼 연못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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