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천태만상
한편, 노화산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가시거리가 고작 16척(*약 5m) 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계연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날씨에는 등산객이 적었으니, 계연은 마음껏 빠른 속도로 질주할 수 있었다.
계연은 이따금 나무와 절벽을 박차고 뛰어오르거나, 용의 경신술을 활용해 무척이나 호방하고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간혹 까딱거리던 그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러며 계연은 연기결의 내용을 대조하며, 세 개의 바둑알의 변화와 효력에 대해 고민했다.
세 개의 바둑알은 각각 육 산군이 가르침을 청하였을 때, 붉은 여우가 방생의 명을 받들며 머리를 조아렸을 때, 마지막으로 윤 훈장이 그가 선물한 작별 서신을 읽을 때 나타났다.
이 세계 사람들에겐 심오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겠지만, 지난 생의 인터넷에서 보았던 각종 터무니없는 정보들을 대입하니, 계연은 쉽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세 가지 시간대는 세 명의 사람 혹은 요괴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친 순간이었다.
그중 육 산군과 붉은 여우의 경우는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윤 훈장은 다소 의아했지만, 윤재성의 인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서신이 윤재성의 포부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이후 윤재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커다란 포부를 말이다.
이렇게 보니, 바둑알은 상응하는 운명의 의미를 품고 있는 듯했다.
운명을 믿어도 되지만, 맹신해선 안 되었다. 운명도 바뀔 수 있었다.
오래전 아홉 협객부터 최근 만난 위무외까지, 계연은 이곳 세계에 온 이후로 수많은 사람과 접촉했다. 하지만 매번 바둑알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바둑알이 나타날 정도가 아니거나, 상대가 ‘그만한 재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맨 처음 육 산군의 그 바둑알은 왜 검게 변한 거지?”
혼잣말을 하던 계연은 문득 우물 속의 음산한 요괴가 떠올랐다. 그의 손가락에 중상을 입은 요괴가 사라지자 바둑알의 색이 바뀌었었다.
‘음과 물에 속하는 기운이 바둑알을 검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악기와 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이게 육 산군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겠지? 왠지 나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 같긴 한데…….’
이내 계연이 왼손 소매를 펄럭이자, 주변의 안개가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머지않아, 계연의 왼손 손바닥에는 매끄럽고 투명한 물방울이 형성되었다.
‘확실히 난 불보다 물을 다루네!’
계연은 어제까지만 해도 바둑돌의 가장 큰 효과는 도기결을 도와 영기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바둑돌이 단기를 훔치는 장면을 보고 나니, 그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둑돌이 영기를 모을 순 있지만, 영기를 흡수하진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바둑돌은 잘 다듬어진 단기만을 갈망하는 것 같았다.
‘단기, 단기……. 바둑돌이 기를 흡수하면, 특히 귀중한 첫 번째 단기를 먹으면, 나한테 미치는 영향이 클까, 아니면 바둑돌이 상징하는 자가 받는 영향이 더 클까?’
“에잇! 일단 양치랑 세수부터 하자…….”
계연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복잡한 생각에 잠긴 것을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넝쿨 가지를 꺾고 왼손으로 물방울을 쥔 그는 양치질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에는 물방울을 얼굴에 팍 터뜨린 뒤, 두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 * *
계연이 막 노화산을 빠져나왔을 때, 해는 어느덧 중천에 떠 있었다. 햇빛이 밝게 내리쬐자, 산속의 안개 또한 서서히 흩어졌다.
그가 피수술을 펼치자, 흠뻑 젖은 옷에서 마치 증기처럼 밀려 나온 안개가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만약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그를 선인 같은 전설 속의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산 입구 남쪽에 자리한 촌락에는 어부들이 모여 살았다. 산 밖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부두가 하나 있었다. 소순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 주변에 잔잔한 물결을 그렸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구도구현에서 산을 넘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구도구현 부두에 커다란 배 한 척이 들어섰다. 누군가가 배에서 내리고, 그 뒤로 짐들이 하나둘 실려 내려왔다. 부두 앞에는 짐을 싣는 당나귀 수레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한산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곧 북새판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소순하’란 명칭에는 작을 소(小) 자가 들어갔지만, 사실 소순하를 작은 하천이라고 할 순 없었다. 자그마치 200~300척(*약 60~90m)에 달하는 폭을 지닌 소순하는 동쪽의 춘목강과 쭉 이어져 있어, 구도구현의 중요한 수로라고 할 수 있었다.
계연은 지난번 남겨두었던 전병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평범한 사람의 보폭으로 부두에 들어섰다. 그는 커다란 배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조그만 범선을 향해 걸어갔다. 나이가 쉰은 되어 보이는 사내와 그의 아들처럼 보이는 시커먼 청년은 갑판 정리가 한창이었다.
“사공, 춘혜부까지 태워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가에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에, 바삐 배를 정돈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소매통이 넓은 회색 장포를 입고, 등에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손에는 지우산을 쥔 사내가 부두에 서 있었다. 사내는 학자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머리를 보니 또 학자는 아닌 것 같았다. 언뜻 보아 마흔 언저리 같았는데,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늙은 뱃사공은 아무래도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뱃머리로 걸어온 노인이 계연에게 말했다.
“물론입지요. 혼자 타실 건지, 일행이 있으신지 말씀해 주시지요. 참, 배를 대절하실 겁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계연이 물었다.
“일행은 따로 없습니다만, 뱃삯이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까?”
“지금은 춘혜부까지 순풍을 타고 가는 거라, 사흘이면 도착할 겁니다요. 배를 통째로 빌리신다면, 엽전 200꾸러미는 주셔야 합니다요.”
엽전 200꾸러미는 1200문으로, 은자 한 냥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조금 비싼 가격에 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승객들과 동행하시려면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요. 제가 춘혜부라고 적힌 호객 팻말을 세울 테지만, 선생께서 직접 배에 함께 탈 사람을 찾아오셔도 무방합니다요. 뱃삯은 다른 승객들과 균등하게 부담하셔도 되고, 선생께서 조금 더 내셔도 됩지요. 그거야 다른 분들과 잘 상의하시면 됩니다. 아무쪼록 너무 염려는 마십쇼. 매일 춘혜부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요. 다만 제 배가 작아서, 열 명 정도만 태울 수 있습니다. 열 명이 넘으면, 밤에 잠을 잘 공간이 부족해서 말입지요.”
노인의 배는 길이 30척(*약 10m)에 중간 폭이 10척(*약 3m) 정도 되어 보였다. 중앙에는 돛대가 세워졌고, 뒤쪽에는 검은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아마도 덮개 아래에서 비를 피하거나 휴식하는 것 같았다.
“음, 말씀 고맙습니다. 다른 곳의 가격을 더 알아보고 오지요!”
“편하실 대로 하십쇼. 다만, 저희 뱃삯은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입니다요!”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젊은 청년과 선실 정리를 이어갔다. 상당히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바퀴를 빙 둘러 본 계연은 다시 노인의 배를 찾아왔다. 더 저렴한 배를 차지 못해서가 아니라, 소요 시간과 청결도를 따졌을 때 이 배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요?”
“예, 사공. 우선 동승객이 있을 수 있으니, 오전 동안 기다려 봅시다. 동승객이 없으면 제가 배를 대절하도록 하지요.”
“좋습니다요. 선생께서 정하십지요! 사흘 동안 드실 음식과 수산물은 무료로 제공하도록 합지요!”
노인의 말투는 한결 정중해졌다.
춘혜부로 가는 사람이야 매일 있었지만, 다들 조그만 범선 대신 커다란 여객선을 선호했다. 이와는 반대로 계연은 소란스러운 대형 여객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인은 춘혜부로 간다는 호객 팻말을 내걸었다. 계연은 동승객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승객을 찾지 않고, 홀로 선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계연은 노인에게 만약 다른 승객들이 오면 그들의 뱃삯을 120문으로 해달라는 제안을 하고, 1200문에서 모자란 금액이 발생하면 본인이 부담하기로 했다. 돈이 많다고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다른 탑승객들과 뱃삯을 균등하게 부담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이 조그만 범선을 탈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정오 무렵이 되자 두 명의 서생과 할아버지와 손주, 그리고 구레나룻을 기른 건장한 사내 하나와 비쩍 마른 중년의 사내까지, 총 여섯 명의 승객이 모였다.
사공은 계연의 부탁에 따라, 승객들에게 뱃삯이 120문이라는 말만 하고, 계연이 나머지 뱃삯을 부담한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승객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계연은 시종일관 같은 자리에 앉은 채로 주변의 소리를 귀로 고스란히 들었다. 승객 중에 여인은 없었다. 이 시대에는 확실히 외출하는 여인을 보기 드물었다.
정확히 정오가 되자, 사공이 계연을 찾아와 이대로 출발해도 되는지 물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공은 밧줄을 풀고 배를 몰기 시작했다. 선미에서 사공이 커다란 노를 젓자, 배는 소순하를 타고 서서히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늙은 사공은 노를 저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중후한 목소리로 맑게 뱃노래를 부르니, 짙은 정취가 묻어났다.
“고깃배야, 노를 젓자! 어부야, 즐겁구나!”
선수에 앉아 책을 읽던 계연 또한 노랫소리에 방긋 웃음을 지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가 선미를 바라보니, 노래를 부르는 노인에게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던 계연이 감탄을 내뱉었다.
“사람의 기상은 하늘의 날씨처럼 천태만상이로구나!”
* * *
이 범선처럼 완전히 나무로 만들어진 배는 선체가 비교적 가벼워서 거센 풍랑이 불 때마다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뱃머리와 선미의 흔들림이 가장 심했다. 한편 계연은 선수에 앉아 배의 흔들림을 즐겼다. 간혹 책을 내려놓고 주변 풍경을 만끽하며, 강물을 오가는 다른 선체를 구경하기도 했다.
부두를 어느 정도 벗어나자, 사공은 돛을 올렸다. 배가 순풍을 타자, 노인은 노를 내려놓고 방향타를 쥐었다. 뱃노래 또한 멈추었다.
계연의 예상대로, 두 사공은 부자 관계였다. 그들은 노화산 기슭에 있는 촌락의 주민이었다. 그 촌락의 백성들은 주로 뱃일로 생계를 꾸렸고, 경기가 좋지 않을 땐 고기잡이를 했다. 그래서인지 배에는 각종 고기잡이 도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계연은 기회가 있으면 도구를 빌려 낚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출항하고 이 각(*二刻: 약 30분) 정도가 지나자, 계연은 뱃머리에서 일어났다.
둥근 덮개를 씌운 선체는 나름 널찍했다. 뒷부분에 있는 나무로 된 선실에는 사공의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선체 위에 두 줄로 고정된 의자에는 사실 열댓 명이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에 누워서 잠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공은 최대 열 명의 승객만 받는다고 말한 것이었다.
나머지 승객 여섯 명은 각자 할 일을 했다. 서생 일행은 간혹 조그만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었고, 어린아이는 할아버지에게 기댄 채 곤히 잠을 잤다.
사실 계연은 뱃머리에 있을 때부터 아래에 있는 선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덮개에 가까워지니, 그러한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분위기는 온전히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계연의 시야는 두꺼운 불투명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뿌옜지만, 기본적인 윤곽과 대략적인 형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구레나룻 사내는 위무외 못지않게 우람한 체격을 자랑했다.
둘의 차이라면, 위무외의 첫인상은 뚱뚱하다는 것이지만, 이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땐 그저 건장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술 냄새까지 폴폴 풍겼다.
시력이 좋지 않은 계연은 그자의 인상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사내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약 이 사내가 다른 승객들보다 먼저 배에 올랐다면, 모두가 이 범선에 타기를 꺼렸을 것이다.
좌우간 사흘을 함께 부대껴야 하는데, 이대로 지낼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