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한 폭의 그림
힘찬 걸음으로 돛대 옆에 선 그는 선현 가까이에서 허리띠를 풀고, 몸을 나른히 했다. 물줄기 하나가 강물로 조르륵 흘러 들어갔다.
“후…….”
볼일을 보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가 다시 허리띠를 채우려던 바로 그때, 배의 반대편에서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사공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물결 하나 없이 평온한 강물만이 그를 반겼다.
솨아아.
이번에는 선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사공이 긴장한 채 뱃머리로 걸어와, 까치발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강물은 여전히 잔잔했다. 순간 소름이 끼친 그는 허겁지겁 선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선실 안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던 사람들은 창백한 얼굴로 뛰어 들어오는 젊은 사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수공(水公)이 있는 것 같아요…….”
젊은 사공이 목소리를 낮추며 늙은 사공에게 말했다. 물속에서 뜬금없이 물보라가 튀어 오르는 상황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아들의 말에 늙은 사공의 표정이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그가 술잔 하나를 쥐어 들고 선실을 걸어 나갔다.
다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손자와 함께 배에 탄 노인만이 유일하게 무언가 떠오른 듯, 밖에 나가면 안 된다며 손주를 붙잡았다.
이 세계에는 경지를 올릴 돌파구를 찾아 나서는 무림의 정상급 협객도, 선연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귀신이나 신선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온갖 잡귀나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현상은 민간에서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이를 목격하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이런 현상에 경외심을 지닌 사람도 있었으며, 기이한 현상에 휘말려 아무도 모르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터놓고 말하면, 각기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뿐이었다. 요괴와 귀신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 양기를 원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를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속세의 인간은 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선을 만나려 했다. 신선을 만나려는 이가 제아무리 선인이 되는 수행을 하는 이일지라도, 신선의 입장에선 괜히 얽히기 싫은 것이 당연했다.
성황신만 해도 그랬다. 바쁜 건 둘째 치고, 성황당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탐욕에 물든 더럽고 구차한 일들을 귀가 닳도록 듣다 보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나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과 선계나 기이한 일들과 관련 있는 자들의 시간적 차이도 상당했다. 선술을 닦는 이들과 터주신은 물론이고, 요괴만 하더라도 걸핏하면 수년간 수련을 이어갔다. 게다가 이 시대는 소식에 어둡지 않은가.
이 넓은 하늘 아래, 세상의 소식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기이한 일들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는 일은 몇 안 됐고, 요괴의 종적을 찾을 수 있는 자는 더욱이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촌민들은 입에서 입으로 기이한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곤 했다.
소순하와 춘목강 일대에서 뱃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과 관련된 괴이한 일을 알고 있거나 직접 겪어보았을 것이다. ‘수공(水公)’이란 말은, 이른바 물귀신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해하던 선실 안 사람들은 서서히 무언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술을 들고 배 측면으로 걸어간 늙은 사공이 강물 위로 술을 부었다.
“당신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요. 술 한 잔으로 경의를 표하니, 수공이시여 얼른 돌아가십쇼!”
늙은 사공이 술잔을 부으며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물결 하나가 서서히 멀어졌다.
“됐습니다요. 들어가서 식사나 마저 하십죠. 물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별 탈 없을 겁니다요. 나중에 춘목강에 도착하면, 다들 신사를 한 번씩 찾아뵈십쇼.”
좀 전의 일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늙은 사공의 말에 소름이 끼친 사람들은 재빨리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은 선실 입구에 선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대우처럼 혈기가 왕성한 사내라면, 물에 물귀신이 있더라도 뛰어 들어갈 것이다. 평범한 물귀신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이대우가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면, 물귀신에게 잡혀 강바닥에서 익사하고 말 터였다.
하지만 계연은 물 아래 수공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물밑에 있는 것은 수공이 아닌, 미주를 탐내는 커다란 강청어일 뿐이었다.
“하하, 선현에서 볼일 보는 사람한테까지 술을 달라고 한 거야?”
계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곧이어 수면 위로 물결이 일렁이더니, 커다란 강청어가 헤엄치며 도망갔다.
‘요괴들이 다 이렇게 귀여우면 좋을 텐데!’
* * *
이른 아침이 되자 이따금 흔들리는 선체에 놀란 승객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밝은 햇살이 환히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일찌감치 일어난 계연은 뱃머리에 고요히 앉아있었다. 늙은 사공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배를 몰았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늙은 사공은 제 아들에게 방향타를 맡긴 뒤, 다시금 눈을 붙였다.
계연의 손에는 책 대신 백옥 서표가 들려 있었다. 구풍이 선물하였던 그 ‘구신서’였다.
‘구신’이란 술법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수련자 본인의 심신을 가라앉혀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하지만 진짜 신적인 존재를 부르는 것이었다.
계연이 지난 생에 보았던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토지신(土地神) 어디 있어’라고 말하면, 토지신이 뿅 하고 나타났다. 구신의 또 다른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단, 이렇게 쓰는 것은 금기시되었으며 이 능력을 지닌 자는 현실적인 상황과 장소에 알맞게 구신술을 활용해야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약 계연이 지금 구신술을 터득하고 있었다면, 계연은 이곳에서 곧바로 춘목강을 다스리는 신(神)을 부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의 신에게는 구신술로 인한 별다른 영향이 없겠지만, 분노한 강의 신이 거센 파도를 일으켜 계연을 죽일 터였다.
‘과연 적당한 장소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산이나 냇가, 혹은 풍경이 아름다운 곳 대부분에는 신령한 존재가 살고 있었다. 이 존재들이 천부적인 재능이나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지맥과 수맥에 어느 정도 관련되면, 비공식적인 신이나 촌민들의 절을 받는 토지신 등이 될 수 있었다.
“계 선생, 와서 죽 드세요!”
젊은 사공이 선실에서 소리치자 계연이 정신을 차렸다.
“갑니다!”
대답을 마친 계연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러 향했다.
따끈한 쌀죽에 매건채를 한 줌 얹은 계연은, 젓가락과 그릇을 챙겨 들고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맑은 바람에 죽을 식히며, 젓가락으로 죽을 긁어 먹기 시작했다. 간혹 선체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의 몸은 시종일관 안정적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동남풍의 도움 아래, 계연이 타고 있던 조그만 범선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커다란 누선 옆을 지나쳤다. 그때 두 배의 간격은 고작 100척(*약 33m) 정도였다.
누선 위의 사람들은 옆으로 지나가는 조그만 범선과 배 위에서 따끈한 죽을 먹는 승객들을 보았다. 범선 위의 승객들 또한, 고개를 들고 누선을 올려보았다.
흰옷을 입은 공자도 누선 선현에 기댄 채, 멍하니 강물 위의 범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는 그때,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선 채로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회색 옷의 사내를 발견했다. 만약 그자가 밥그릇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범선과 강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자연스럽고 고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 * *
춘목강은 계주의 유명한 강이었다. 춘혜부 경계 내에서 가장 길게 뻗은 이 강은 굽이굽이 여러 부(府)를 지나쳤다. 강물은 마치 경계를 나누는 표지판처럼 또 다른 주(州) 두 곳과 맞닿아 있었고, 결국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다.
덕승부 구도구 밖에서 춘혜부의 부도(府都)인 표향방(飄香坊)까지 이어지는 강물은 나름 반듯했다. 특히나 지금은 순풍인 동남풍이 부는 계절이라, 덕승부에서 춘혜부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첫날 저녁에 누군가가 강물에 빠지자, 영지를 얻은 강청어가 사람을 구해 술을 얻어 마신 일을 제외하면, 이후 이틀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승객들은 그저 강 양옆으로 늘어진 숲에서 들리는 소리를 감상하며 여정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순풍을 따라 흘러가던 배는 넷째 날 아침이 되어 표향방(飄香坊) 밖에 위치한 부두에 도착했다.
춘혜부 부두에 배가 가까워질수록, 주위를 오가는 선박들이 늘어났다. 아담한 일인용 배부터 커다란 누선, 여객선, 화물선, 그리고 어부들의 낚싯배까지. 이곳은 구도현의 부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승객들은 모두 선실 밖으로 나와 먼 곳을 구경했다. 부두 뒤편으로 표향방(飄香坊)의 높은 성벽과 성벽 위로 빼꼼 올라온 누각들이 보였다.
표향방(飄香坊)에 다다르자, 바람이 외려 잔잔해졌다. 젊은 사공은 슬슬 노를 젓기 시작했다. 승객들 또한 먼 곳에서 시선을 옮겨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두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다들 바삐 물건을 싣거나 내렸고, 승객들 또한 잰걸음을 옮겼다. 계연이 탄 배는 부두 가장자리에 정박할 곳을 찾았다.
이제 사흘간 동행한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뱃삯은 배에 오르던 첫날 모두 청산하였으니, 승객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여러분, 강의 신을 모시는 신사는 동쪽 성 남쪽 밖에 있습니다요. 부두를 나가서 성 밖을 따라 남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보일 겁니다요. 표향방(飄香坊)을 찾으면, 꼭 해야 할 일입지요. 시간이 있을 때, 꼭 찾아가 강의 신께 절을 올리셔야 합니다요!”
배를 밧줄로 꽁꽁 고정한 늙은 사공이 배에서 내리려던 사람들에게 웃으며 주의를 주었다. 순풍을 타고 무사히 춘혜부에 도착한 승객들은 마음이 편안했다.
“네, 꼭 가보지요!”
“그러죠. 꼭 가서 향 하나 올리고 올게요!”
“사공, 나중에 다시 만나요!”
“훗날을 기약합시다!”
계연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부두에 서서 사공을 향해 손을 모아 인사했다. 성에 볼일이 없었던 사공 부자는 부두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배를 깨끗이 정돈한 뒤, ‘덕승부 구도구현’이라고 적힌 팻말을 내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님 몇 명이라도 태우는 편이 나으니 말이다.
부두를 벗어나자마자, 한 서생이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 동창이랑 표향방(飄香坊)을 구경한 다음에 신사를 찾아갈 생각인데, 선생께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동행하시겠소이까?”
“그리합시다, 계 선생!”
계연이 그들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나, 따로 볼 일이 있어서요. 함께 배를 타고 먼 길을 온 인연이니,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믿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서로 인사를 나눈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한편 제일 먼저 출발한 계연은 서서히 보폭을 좁히더니,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이 5월 12일이니까, 위무외가 벌써 춘혜부에 도착했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준비는 마쳤을까?’
계연은 제일 먼저 표향방(飄香坊)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술을 찾아 나섰다. 대체 얼마나 맛있는 술이기에 거북 요괴까지 올 정도인지 궁금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그는 도시의 음식 맛을 본 적이 없었다. 영안현의 화조주를 자주 마시긴 했지만, 그건 어디에나 있는 흔한 술이었다.
어차피 오월 열닷새 전에 남쪽 성문 부근에서 기다리다 보면, 위무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연의 비범한 청력이라면, 멀리서 딸꾹질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맨 처음, 계연은 위무외가 위씨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 속의 신비한 거북이를 찾으러 갈 때 위무외를 따라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아는 건 위씨 가문을 제외하면, 그날 밤의 그 ‘고인’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계연이 거북이 나타나는 곳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위무외는 계연을 고인으로 여겼고, 고인이 이 일을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