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거북에게 빌고, 사람에게 빌고
두 명이 웃어른은 수레에서 단지를 하나씩 내린 다음, 손바닥으로 가볍게 단지의 입구를 내리쳤다. 그 충격에 단지 입구를 꽉 막고 있던 진흙이 날아가자, 그들은 강가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계연은 조금 떨어진 버드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스멀스멀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으니, 비싼 술을 저렇게 벌컥벌컥 쏟아 버리는 것이 참 아까웠다.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계연은 거북이나 위씨 가문의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었고, 거북이가 아무리 기량이 높더라도 아직은 둔갑하지 않은 요괴에 불과했다. 물속에서라면 천부적인 자질을 발휘해 계연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물가로 올라온다면 그리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다.
술 두 단지를 모두 쏟아붓고 나니, 강물에 변화가 생겼다.
솨아아아, 솨아아.
저 멀리서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위씨 가문의 고수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계연 또한 물가로 다가오는 무언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물결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육안으로는 암흑에 잠긴 물속에 무엇이 숨어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연의 시야에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거북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촤르르.
안가에 도착한 거북이 물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자, 위씨 가문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달빛을 등불 삼아 보니, 거북의 등껍질은 조그만 선박만 한 크기를 하고 있었다.
“어라? 정 씨가 아니네? 보아하니 아직 액운을 맞지 않은 것 같군…….”
거북의 몸 절반은 여전히 물속에 있었다. 거북은 묵직한 두 다리로 물가의 진흙과 풀을 짓누르며, 주변에 즐비한 맛 좋은 술들을 둘러 보았다.
“아, 그가 너희들 손아귀에 잡혔나 보구나.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아니, 어쩌면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몰라.”
촤르르.
수면에서 회오리치던 물기둥이 물가에 세워진 수레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수레를 휘감던 물기둥이 돌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작은 파도가 일렁이더니, 수레가 강 곳곳으로 밀려 들어갔다.
철썩!
풍덩!
촤락!
수레 여덟 대가 차례대로 물에 빠졌다.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위씨 가문 사람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괴와 요괴가 부리는 어수술을 목격한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건 없나? 그저 술을 주러 온 거야? 하하하……. 어서 말하거라!”
거북은 술을 모조리 강으로 가지고 들어간 뒤, 물가에서 위씨 가문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위무외가 거북을 향해 정중히 읍을 해 보였다.
“선장. 저는 덕성부 위씨 가문의 가주, 위무외입니다. 제게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옥 장신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선문(仙門)인 옥회산의 장신구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것을 이용해 신선이 되는 방법을 저는 모릅니다. 하여, 선장께 가르침을 구하러 왔습니다!”
거북이 의아한 듯 위무외를 바라보았다.
“그게 옥회산의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고? 얼굴 좀 보게, 가까이 와 보거라!”
위무외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지만, 이를 악물고 거북에게 다가갔다. 거북의 코앞에서 멈춰 선 그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라? 어찌 네 운명이 안 보이는 거지!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넌 분명 평범한 속세의 인간이지 않느냐!”
평범한 사람이라도 굳센 의지만 있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운명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건 불가능했다!
의아해하던 거북이 돌연 고개를 들더니, 죽일 듯이 위무외를 노려보았다.
“옥회산까지 아는 것을 보니, 서, 설마 고인을 만났던 건가?”
위무외의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거북의 당황한 목소리에, 외무외는 제일 먼저 영안현의 조그만 정원에서 편안히 바둑을 놓던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계 선생의 정보를 마음대로 누설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고민에 잠겼다.
한편, 거북은 이를 알아차린 듯이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인을 만난 게 맞지? 틀림없어! 위무외!”
거북이 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심히 흥분한 거북의 목소리에선 좀 전의 평온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인에게 이 거북이를 추천해라. 아, 아니면 나 대신 고인께 뭐 좀 여쭤봐줘! 위무외! 내 말 들었어, 못 들었어?”
거북의 안달이 난 모습에 모두들 적잖이 놀랐다. 위씨 가문의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채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그들 중 일부는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무공은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무림 고수를 대면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이 그들을 짓이겼다. 상대는 수년간 수행을 이어온 거대한 거북 요괴였다. 가주 위무외가 꼬박꼬박 ‘선장(仙長)’이라고 불렀지만, 거북이가 ‘선(仙)’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위무외의 백부와 셋째 숙부, 그리고 나이 든 집사는 서로 철썩 달라붙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이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언제든 전력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위무외는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써 의지를 다잡았다. 그와 동시에,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들을 손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서, 선장. 진정하십시오! 제가 고인을 뵌 적이 있긴 합니다만…….”
위무외가 입을 열자,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린 거북이 살며시 냉정을 되찾았다. 바짝 긴장했던 거북이의 몸도 다시금 나른해졌다.
“놀랐나 보군. 조급한 마음에 잠시 흥분했어. 이어서 말해 봐!”
위무외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머리를 굴렸다. 이제는 계 선생의 존재를 누설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고해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의 문제였다.
계 선생은 이미 먼 길을 떠났고, 그가 영안현으로 돌아올지, 돌아온다면 언제쯤 올지, 아무도 몰랐다. 선인의 시간관념이 일반적인 사람과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거북의 생각은 어떨까? 내가 솔직하게 말해도, 거북이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어쩌지?’
잠시 궁리하던 위무외는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거북 요괴가 성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장, 우연히 속세를 벗어난 고인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나, 그분의 신분을 함부로 누설하면, 고인께서 노하실까 봐 염려가 되는군요. 우선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만 말씀드릴 테니, 제 이야기를 듣고 고려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고개를 빳빳하게 든 거북이 퉁퉁한 체격의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후…….”
위무외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정말 긴장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서 거북에게 자신의 진실함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저는 덕성부 어느 현의 산속에 살던 식인 백호를 죽여, 가죽을 벗겨낸 협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때마침 저희 조부님의 생신이 코앞이라, 조부께 가죽을 선물해드리기 위해 그곳을 찾았습니다. 저희 가문에도 가죽이 있긴 하지만, 백호 가죽은 보기 드문 가죽이었으니까요. 그곳 현승과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 고인…… 선생을 뵈었습니다.”
거북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위무외는 오롯이 존경심에서 비롯된 단어를 선택했다.
“그때 선생께서도 저를 슬쩍 보셨지요. 처음에는 그저 현승과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선생의 시선을 끈 줄 알았으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선생께서는 당시 제게 사고가 날 것을 예감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움찔한 거북이 질문을 던졌다.
“정천추 그놈이 너를 찾아간 건가?”
“맞습니다. 저를 노리고 있던 정천추는 연지당을 비롯한 강호의 일류 고수들과 손을 잡고 매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남몰래 무공을 훈련해 온 사람이란 것을 몰랐던 모양이더군요. 그들은 제 반격에 중상을 입고, 맹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위무외는 당시 미지의 고인을 마주쳤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사건은 거북의 관심 밖일 테니 말이다. 위무외는 이 거북 요괴가 자신의 모든 말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조심스럽게 탐색을 시도했다.
“간신히 그들을 물리쳤으나, 이대로는 길을 재촉할 수가 없어서 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덕분에 고인을 뵐 수 있었지요!”
특별한 반응 없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거북을 보고 위무외는 안도했다.
“제가 현을 방문할 적에, 불처럼 새빨간 털을 지닌 여우가 현에 나타나 여러 마리 개들에게 물리고, 여우의 가죽을 노린 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 이야기로는, 죽은 척을 하며 가까스로 몽둥이를 피해 도망친 붉은 여우가 때마침 산보하시던 선생을 보고 처량하게 울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머리를 조아리며 말이죠!”
긴장하기 시작한 거북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 선생께서 붉은 여우를 구하신 건가?”
붉은 여우는 평범한 여우일 리 없었다. 적어도 영지를 지닌 짐승일 것이다. 자고로 요괴들은 선문의 미움을 사기 일쑤였다. 거북처럼 안정적으로 수련을 거친 요괴도 고운 시선을 받기 어려울 텐데, 제대로 된 수련을 받지 않은 요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선인들은 요괴가 되는 것 자체를 악(惡)한 것으로 여겼고, 요괴는 길들이기 어렵다며 수많은 요괴를 차별했다.
위무외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물론이죠. 선생께서는 여우를 매질하던 사내에게 돈을 주어 쫓아내었고, 개들에게는 가볍게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개들이 줄행랑을 쳤답니다.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는 여우를 안고 현에 사는 한 명의를 찾아가 치료해주셨다지요. 치료를 마친 다음에는 집으로 데리고 가 요양까지…….”
위무외가 순간 멈칫했다. 무엇을 잊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거북에게서 지극히 인간적인 선망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느낌일 뿐이었다. 거북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곳 하나 없었으니, 표정을 보고 얼추 거북의 감정변화를 맞히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먼 길을 떠나시고 난 뒤, 그 집에 자주 놀러 가던 아이가 그러더군요. 상처를 회복한 붉은 여우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 선생께서 붉은 여우를 산속에 풀어주셨다고 말입니다.”
“뭐라고?!”
거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북의 비린내 섞인 입김에 위무외의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거북이 발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 것인지 땅이 다 파일 정도였다.
“여우 녀석, 감히 혼자 달아나다니! 정말, 정말이지, 으아! 분해 죽겠네!”
있는 힘껏 억누른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우렁차진 않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두가 거북의 분노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거북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그 선생이 먼 길을 떠났다고?”
한창 화를 내던 거북이 그제야 위무외가 했던 말을 되짚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덩달아 긴장한 위무외가 허겁지겁 말을 이어갔다.
“선장, 우선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쇼. 그날 저는 부상을 입고 몸조리를 하려고 현에 돌아갔다가, 이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정천추에게 선연에 관한 일을 캐묻고 나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더군요. 그래서 저는 현의 관리에게 사정한 끝에, 선생을 뵈러 갈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위무외는 당시의 장면을 회상하며, 감격에 젖은 듯 말했다.
“그곳에서는 하얀 장포를 입은 자와 푸른 장포를 입은 자가 대추나무 아래에서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소 경솔하게 그분들의 흥취를 깨고 말았지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위무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옥회산이나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선연보다 더 귀중한 기회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