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쩔 수 없지
“제가 찾아온 까닭을 설명하고 성심껏 부탁하니, 선생께서 너그러이 승낙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선생께서 옥으로 된 장신구에 손을 대자, 남옥에서 아주 옅은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옥회성경’ 네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이후 선생께서는 이것이 옥회산의 물건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선생이 언제 길을 나섰고, 언제 돌아오지?”
거북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듣기로는, 그날 제가 떠난 후에 선생께서 벗에게 곧 먼 여정을 떠나리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아, 기이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선생께서 먼 길을 떠나기 전, 벗에게 가을이 되면 정원 안 대추나무에 열린 열매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날 밤, 대추나무에 활짝 피어있던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본래 가을에 열려야 하는 대추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있었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이 소식을 늦게 전해 들어서, 제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땐 선생께서 이미 현을 떠나고 없으셨습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거북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생과 대국을 하던 자는 평범한 인간이겠지?”
“맞습니다. 그자는 현의 훈장으로, 선생의 이웃이자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위무외의 대답에 거북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의 입이 굳게 닫혀 있으니, 함부로 소리를 낼 수 없었던 위씨 가문의 사람들은 잠자코 거북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후, 좀 전까지 식은땀을 흘린 위씨 가문의 사람들이 밤바람에 바들바들 떨던 그때, 거북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 진정 덕행이 높은 고인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그 얼마나 행복할까!”
그 무렵, 위씨 가문 사람들은 일종의 충격에 빠져 있었다. 집사와 위무외의 백부, 셋째 숙부를 제외한 사람들은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기만 해도 신비로운데, 몸소 기연을 경험한 가주는 당시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선장, 선생의 종적은 참말로 모릅니다. 하물며, 선생이 언제쯤 돌아오실지는 더욱이 알 턱이 없습니다. 다만, 그 현의 이름은…….”
“위 가주, 말할 필요 없다. 내 너를 난처하게 할 생각 없어.”
거북이 정중하게 말했다.
“옥회산에 들어가고 싶다면, 후대에 기품이 뛰어난 적자(嫡子)를 두거나, 아니면 교활한 방법을 써야 한다. 위씨 가문의 직계 혈통 중,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옥회산에 있는 선문에 보내도록 해. 옥회산을 지키는 선학은 20년에 한 번씩 바뀌니, 내년 정월부터는 너희 위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 그 선학의 차례일 것이야…….”
거북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옥을 잘 간수하거라. 선학이 나타나면, 반드시 아이가 선문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웃어른으로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삼 년 동안만 같이 머물게 해달라고 빌어. 선학은 은혜를 갚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너희 가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산의 입구만 통과하면, 칠 할은 성공한 셈이지! 옥회산은 바로…….”
거북이 목소리를 낮추는 바람에, 마지막 한마디를 들은 사람은 위무외뿐이었다. 말을 마친 거북은 위무외를 슬쩍 쳐다본 뒤, 다시금 강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애석하게도 좋은 기회와 인연이 내게 직접 닿지 않는다니, 올해는 그저 강의 신에게 비는 수밖에 없구나!’
철썩!
물소리에 위무외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작게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강물을 향해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선장. 내년 이맘때, 또다시 좋은 술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수면 위의 파문이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위씨 가문의 사람들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유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앞서 흘린 땀에 옷이 흠뻑 젖은지라, 이들은 밤바람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강물을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위무외는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주……. 어떻게 된 거요?”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위무외의 백부였다. 그가 좀 전의 상황을 묻자, 고개를 든 위무외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잘 됐지요. 다들 우리 위씨 가문의 중요인사시니 잘 아시겠지만, 오늘 일을 절대 누설해선 안 됩니다. 너희도 알겠느냐?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토씨 하나 언급해선 안 돼!”
끝말은 다른 인부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집사와 위무외의 백부, 셋째 숙부는 그의 사람이니,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경고를 마친 위무외는 그제야 손을 휘둘렀다.
“자, 부두로 가자.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 보자고!”
춘혜부 성문이 굳게 닫힌 이 시각에 성 밖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다름 아닌 부두였다. 뱃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두에는 주점과 식당, 객잔, 역참(驛站)도 있었다. 더욱이 부두에 줄지은 화려하게 장식한 놀잇배는 부잣집 공자와 기녀(妓女)들의 집결소였다. 저녁의 부두는 낮의 표향방(飄香坊)보다 훨씬 더 북적거렸다.
위씨 일가가 부푼 마음을 껴안고 떠난 뒤에도 계연은 여전히 버드나무 가지 위에 누워 있었다. 바닥에는 달빛이 그려낸 나무 그림자가 가득했다.
버들가지가 흔들리는 강물 위에는 차가운 밤바람과 잔잔한 물결만이 남아 있었다. 앞서 소란을 피웠던 거북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멀리 강 위의 누선에선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연은 옆에서 방관했을 뿐이었다. 그의 시야에 또렷이 보이는 것이라곤 늙은 거북과 위씨 가문의 옥 장신구가 뿜어내는 영롱한 빛 한 줄기뿐이었지만, 이들의 대화 소리는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거북은 위무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감정 섞인 감탄을 내뱉기까지 했다. 만약 계연이 일의 내막을 몰랐다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북이 바라는 것은 수행과 큰 연관이 없었다. 계연은 자신이 상대를 지적하고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제자리에 누워서 하늘에 뜬 밝은 달만 바라볼 뿐이었다.
재미난 구경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계연은 뜻밖에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엔 보름달이 떴는데, 내 마음은 아쉬움만 남네. 모두가 연(緣)을 찾는구나, 물론 나도 그렇지만…….”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날도 그리 춥지 않아, 튼실한 계연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해가 뜰 무렵까지, 그는 텅 빈 술 단지를 들고 자는 둥 마는 둥 꼬박 하룻밤을 보냈다.
정신을 차리고 기지개를 켠 그는 반사적으로 술 단지를 흔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쓰레기통이라 부를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실소를 아연하게 터뜨렸다.
* * *
춘혜부 행정중심지인 표향방(飄香坊) 서쪽에는 ‘원자포’라는 이름의 유명한 가게가 있었다. 주인장은 여느 때와 똑같이 계산대에서 한창 장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장이 고개를 슬쩍 들어 보니, 방문객은 다름 아닌 달구지 두 대를 끌고 술을 가지러 온 왕씨 가문의 셋째 공자였다.
주인장은 허겁지겁 상점 앞으로 나와 공수하며 공자를 맞았다.
“셋째 나리,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왕씨 가문 셋째 공자의 본명은 왕자중(王子重)으로, 춘혜부에 권세를 떨치는 유명한 왕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왕씨 가문의 가주와 형제인 그는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춘혜부와 수백 리 떨어진 주장(周庄)에서 가업을 돌보느라, 춘혜부를 자주 찾지 않았다.
주인장의 다정한 인사에 왕자중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나야 잘 먹고 잘 쉬고 있네. 그런데 원자포의 천일춘이 참 그립더군. 탁 씨도 별일 없지?”
“나리 덕분에 저도 기운이 펄펄합니다. 나리께서 가져가시기 편하게, 천일춘은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원자포로 들어섰다. 주인장이 분부하지 않아도, 점소이들은 알아서 일을 시작했다. 점소이들이 창고에서 귀한 술이 가득 담긴 단지를 차례대로 내어오자, 달구지 옆에서 대기하던 왕씨 가문 인부들이 술 단지를 싣기 시작했다.
“나리,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지, 그런데 한 잔으로 되겠나!”
“하하하, 제가 이리 덤벙댑니다!”
탁 씨는 계산대에서 쟁반 하나를 꺼내더니, 위에 고급스러운 도자기 잔과 술 단지를 올렸다. 쟁반을 들고 탁자 앞으로 걸어온 그는 왕자중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었다.
“나리, 드시지요!”
“고맙구려!”
의자에 앉아 잔을 받은 왕자중은 그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쪽에 서 있던 탁 씨는 왕자중이 비운 잔을 자세히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잔에 끈끈한 술이 남아 있었다.
탁 씨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왕자중이 질문을 건네었다.
“탁 씨, 뭘 그리 보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리, 한잔 더 받으십쇼!”
황급히 대답을 마친 탁 씨가 재빨리 술을 따랐다.
이렇게 왕자중이 연달아 세 번의 술을 받아 마실 동안, 탁 씨의 시선은 그가 비워낸 술잔으로 향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왕자중이 탁 씨의 성격을 몰랐다면, 또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없었다면, 탁 씨가 술에 독을 탄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탁 씨, 오늘 어딘가 좀 이상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탁 씨는 발뺌하지 않고 왕자중의 맞은편에 앉았다. 왕자중에게 술을 따른 뒤, 그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나리, 나리의 무공은 강호에서 몇 류에 속하십니까?”
“그런 건 왜 묻나?”
실로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왕자중은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제대로 따지고 들자면, 일류 이상은 될 걸세. 범속을 초월하기까지 고작 일 보 남짓일 테니. 아마 10년만 더 지나면, 범속을 초월할지도 모르네!”
“아……. 그럼 강호에 나리 같은 무술인이 많습니까?”
“허허! 봉황의 깃털만큼 드물지!”
왕자중은 의기양양하게 술을 들이켰고, 탁 씨는 허겁지겁 왕자중의 빈 잔을 채웠다.
“나리, 외람된 말씀이오나, 잔을 한 번에 비워주실 수 있습니까? 끈적이는 액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것쯤이야……. 잘 보게!”
호언장담한 왕자중은 잔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뒤, 팔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마치 오른팔을 휘두르듯 술을 입에 털어넣은 그는 빈 잔을 탁 씨에게 보여 주었다.
잔이 깨끗하긴 했지만, 도자기 본연의 흰색을 띠진 않았다. 탁 씨가 손가락으로 잔을 슥 만지자, 손가락에 끈끈한 술이 그대로 묻어났다.
“나리, 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새 잔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탁 씨, 아직 걱정거리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군. 내가 자네를 실망시킨 건가?”
왕자중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한 것이었다.
“나리, 이렇게 마시면서도 술잔을 깨끗하게 비우실 수 있으십니까? 손가락에도 술 한 방울 안 묻어날 정도로요!”
말을 마친 탁 씨가 술 마시는 자세를 취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잔을 들고 술을 마시는, 특별할 것 없는 자세였다. 이어서 혀끝으로 충분히 맛을 음미한 다음, 천천히 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