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모두가 바라던 대로
탁 씨의 동작을 자세히 보던 왕자중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될 듯싶네. 자네도 보았다시피, 잔을 세게 흔들어서 마셔도 술이 남아있네. 그런데 그리 가볍게 들이키면서 술을 안 남기는 건 말도 안 되지. 공중에서 물건을 조종하는 절세의 고수도 형체가 없는 물을 조종하진 못한다네!”
왕자중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 ‘형체가 없는 물을 조종하진 못하네’라는 한마디에, 탁 씨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군요. 나리 덕분에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한 탁 씨는 왕자중과의 자리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거짓말처럼 우연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인장, 혹시 술만 따로 사면 조금 더 깎아주실 수 있나요? 저번에 산 천일춘을 다 마셨는데……. 도저히 끊질 못하겠어서 말이죠!”
때마침 계연의 온화한 목소리가 주점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탁 씨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앉아있던 왕자중이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탁 씨가 고개를 들어 문밖을 보니, 역시나 이틀 전 보았던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있죠, 있죠. 아, 아니, 그러니까, 깎아드릴 수 있다고요!”
애써 침착한 척을 했지만, 이토록 흥분한 모습을 감추기란 어려웠다. 왕자중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했고, 계연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리며 주인장이 왜 저러는 것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왕자중이 문밖의 사람을 슬쩍 보았다.
‘저 사람, 특별한 자인가?’
계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왕자중이 팔을 들고 정중히 공수했다. 계연 또한 예의상 공수하며 답례를 했다.
“손님, 손님,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20년산 천일춘이 있는데, 이건 어떠십니까?”
“어이, 잠, 잠깐! 탁 씨, 이건 아니지 않나? 20년산은 얼마 남지 않아서 안 판다고 하지 않았나!”
왕자중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수염을 불며 눈을 부릅뜬 그는 앞에 놓인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탁 씨가 계산대 아래의 나무문을 열고, 안에 숨겨두었던 20년산 천일춘 하나를 꺼냈다. 원자포에서 파는 천일춘 중, 유일한 20년산이었다.
천일춘이 이름을 날린 지 고작 3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20년산은 천일춘 중의 최상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제가 ‘천일춘’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을 시기의 산물이었으니, 원자포 저장고에서도 보기 드문 술이었다. 주점에는 계산대 아래 숨겨둔 하나가 전부였다.
왕자중도 겨우 두 번밖에 맛보지 못한 술이었다. 춘혜부 지부의 귀한 영애가 소용(昭容)으로 책봉된 것을 축하하고자 원자포가 연회에서 처음으로 20년산 천일춘을 선보였을 때, 그리고 왕자중이 주장에 가기 전에 탁 씨에게 20년산 천일춘을 달라고 고집을 부린 끝에 은 50냥을 주고 한 단지를 구입했을 때, 이렇게 딱 두 번 맛을 보았다.
무슨 물건이든 희소성이 높을수록 비싸기 마련이었다. 매년 천일춘을 새로 빚었지만, 판매량이 많은 만큼, 오래 묵은 술은 보기 드물었다.
탁 씨가 생전 처음 보는 외부인에게 최상급 술을 내놓으니, 왕자중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계산대 앞으로 걸어가 주인장과 말다툼을 시작했다.
“탁 씨, 내가 몇 번이고 부탁할 땐 딱 잡아떼지 않았나. 이걸 팔 거면 나한테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
계연은 왕자중도 꽤 우람한 체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물론 앞서 범선에서 만난 이대우와는 비교도 안 되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왕자중의 말을 들어 보니, 이것이 굉장히 귀한 술인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은 20년 묵은 천일춘이었다. 천일춘에 푹 빠진 계연이 놓칠 리 있나. 그가 허겁지겁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로 주세요. 주인장, 그거 한 근에 얼마죠? 똑같이 두 냥인가요?”
탁 씨가 옆에 있던 왕자중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망설이더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네, 한 근에 은자 두 냥입니다. 손님, 돈이 부족하시면, 외상으로 가져가셔도 됩니다!”
마흔이 넘은 강호의 일류 고수인 왕자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원자포의 주인 탁 씨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탁 씨는 얼굴이 뚫어질 것 같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무렵, 왕자중도 대강 상황파악을 했다. 조금 전에는 순간 흥분한 나머지 버럭 화를 내었지만,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탁 씨가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술을 사러 온 손님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일 듯했다. 그렇게 그는 그들의 거래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계연은 20년산 천일춘을 맛보고 싶긴 했지만, 술에 목숨을 거는 술고래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레 보따리에서 앞서 술을 살 때 받은 도자기 단지를 꺼냈다.
“제 단지에 담아 가면, 한 근에 얼마씩 깎아주실 수 있으세요?”
잠시 당황하던 탁 씨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손님께서 직접 단지까지 가져오셨으니, 당연히 깎아 드려야죠. 하면, 한 근에 800문만 받겠습니다. 한 근 드릴까요?”
“허어…….”
왕자중은 얇고 괴이한 숨소리를 내면서도 고개를 휙 돌린 채 단지를 쳐다보지 않았다. 주인장은 듣지 못했지만, 계연은 그의 숨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계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는 탁 씨와 꽤 재미난 반응을 보이는 옆의 사내를 번갈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재미난 구경거리가 아마 지난번 회객루에서 청송도인과 그의 제자 제문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일 것이다.
“좋아요. 그럼 한 근만 좀 담아 주시죠.”
술 단지를 계산대에 내려놓은 계연은 품에서 동그란 은자와 쇄은자 몇 개를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탁 씨는 은의 무게도 달지 않고, 작자(*杓子: 술이나 기름, 죽 따위를 풀 때에 쓰는 기구. 자루가 국자보다 짧고, 바닥이 오목하다.)를 쥔 채 단지에 술을 담았다.
이렇게 생긴 작자를 이곳에선 사냥작(四兩杓)이라고 불렀다. 한 번에 대략 술 4냥이 떠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사냥작으로 네 번을 뜨면, 곧 한 근이 되었다. 술을 네 번 뜨고 난 탁 씨는 반 작자를 더 떠서 단지를 가득 채워 주었다.
그제야 그는 은자의 무게를 재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주판을 두드렸다.
“은 1냥 21수에, 엽전을 세어보니 875문이군요. 손님, 여기 거스름돈 당오통보 15개입니다.”
돈을 건네받은 계연은 단지를 들며 무게를 확인했다.
“고마워요, 탁 씨. 그럼 이만 가볼게요.”
공수하며 인사를 마친 계연은 계산대 뒤에서 답례를 건네는 탁 씨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 훌륭한 사람이었다.
계연은 긴말 없이, 술 단지를 들고 원자포를 벗어나서 저잣거리 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바라던 대로 거래는 끝났고, 원자포의 주인 탁 씨는 계연의 인상에 충분히 남았다.
“예, 예, 손님, 천천히, 조심히 들어가십쇼! 다음에 꼭 다시 오세요!”
목청 높여 인사하던 탁 씨는 계연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진 뒤에야 옆에 서 있던 왕자중에게 두 손을 모아 사과했다.
“아이고! 셋째 나리,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좀 급한 일이라서 말이지요. 이 천일춘이 4근이나 남았는데, 전부 나리께 팔도록 하겠습니다!”
왕자중은 여전히 계연의 신분이 궁금했지만, 탁 씨의 제안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면 한 근에 얼마에 팔 텐가?”
“나리께도 두 냥에 팔아야죠!”
기분이 무척 좋았던 탁 씨는 왕자중이 달라고 한다면, 공짜로라도 줄 수 있었다.
“하하하, 그거 좋구먼! 그런데 탁 씨, 좀 전의 그자는 누구인가?”
“헤헤, 그건 비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말씀드리기가 영 애매해서 말이지요. 다만, 저분께 술 한 근을 팔고 나니, 제 마음이 뻥 뚫리고 생각이 탁 트이는 기분입니다. 언젠가 셋째 나리께서 저분을 만나신다면…… 예우를 갖추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간혹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생각할수록 요점을 벗어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물론 그와 정반대의 상황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 탁 씨는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정오 무렵, 계연은 1문을 주고 산 만두를 하나 먹으며, 동쪽 성문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먼 곳까지 굽이굽이 이어진 춘목강에는 강의 신을 섬기는 신당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그중에서 가장 크고 정통적인 곳을 꼽자면, 바로 표향방(飄香坊) 밖의 신당뿐이었다.
춘혜부에 온 이상, 춘목강에서 최고로 유명한 신당의 풍경을 한 번쯤은 봐줘야 했다. 신당에 가까워질수록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단향목의 냄새와 신당 쪽에서 나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계연이 아직 신당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강과 길을 따라 쭉 늘어선 행상인들은 끊임없이 소리치며 물건을 팔았다.
단향목을 파는 사람, 초를 파는 사람, 탕후루를 파는 사람, 절임과일을 파는 사람, 심지어는 여인들을 위한 둥글부채와 연지분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그 덕분에 계연은 새로운 것들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자, 자, 선남선녀들 오셔서 보고 가세요. 신당의 호신부입니다…….”
“저렴한 향과 초 팝니다. 신당에 들어가기 전에 향 태워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주머니, 예쁜 주머니 팝니다!”
“아이고, 손님! 딱 보니까 교양 있는 학자이시네요. 오셔서 향 좀 보고 가십쇼. 강신(江神)께서 과거 급제하실 수 있도록 보우해주실 겁니다!”
신당 앞에는 기도를 위한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이 수두룩했다. 한 행상인이 계연을 향해 외쳤다.
계연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듯 행상인에게 물었다.
“강의 신이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시나요?”
“나 참! 손님, 별 걸 다 물으십니다. 지위든 관록이든 평안이든 혼인이든, 빌고 싶은 건 무엇이든 비셔도 좋습니다. 강의 신께서는 무엇이든 보우해주실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향 좀 사시겠습니까?”
‘혼인까지 관여한다고?’
계연은 흥미가 생겼다. 다만 잘 생각해 보니, 지난 생에도 대부분 무엇이든 빌어도 된다고 했던 것 같다.
“향 하나 주세요.”
“예, 2문입니다. 여기 향 잘 받으세요!”
돈을 내고 향을 받은 계연은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마치 특별한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안뜰과 바깥뜰에는 지붕이 달린 벽화담과 문인들의 기념글이 적힌 벽이 있었고, 방생을 위한 강기슭과 간편히 앉을 수 있는 정자도 있었다. 크고 작은 향로와 복전함(福田函) 주변에선 여러 사람이 오가며 향을 올렸다.
강의 신을 모시는 진짜 신당은 과장된 지붕 장식의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신당 안팎에서는 강의 신 밑에 있는 관리처럼 보이는 진흙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약 60평 크기의 공간에는 향로와 부들방석, 제상, 공물, 목책, 그리고 15척(*약 5m) 정도 높이의 강신상이 전부였다.
신상의 엄숙한 수염과 눈썹은 마치 거친 파도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에는 기다란 비녀 장식이 있었고, 부드러운 장포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