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우연히 드러난 살기
한참을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계연은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상했던 거랑 조금 다르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지?”
계연은 눈앞이 캄캄했다. 하루 동안 뛰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계연의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계연은 안절부절못했다. 끝내 계연은 또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계연의 마음속에 이런 인생 일대의 고민이 피어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강줄기 하나가 보여야 했지만, 아무리 달려 보아도 시야에는 물줄기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계연은 지금까지 너무 마음을 내려놓고 달려온 것이다.
계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리 무성하지 않은 숲이었다. 살짝 기복을 이루는 지세 위로 낮은 산과 언덕이 늘어섰다. 가장 높은 언덕이라 할지라도 높이가 고작 100척 안팎이라, 봉우리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다만 땅 표면에는 조그만 길이 몇 개가 나 있었다. 그중 일부는 들짐승이 오가며 만들어낸 것 같았고, 일부는 사람이 낸 길이었다. 비록 잡초에 뒤덮여 있었지만, 길에 발을 디딘 계연은 마차 바퀴가 땅 위로 만들어낸 굴곡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계연은 지난 생과 이번 생에 신어 본 신발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가 신은 신발은 모두 자수방이나 여염집 여인들이 한땀 한땀 수놓아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신발 바닥이 무척 부드러웠다. 신코는 여러 겹의 천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신었을 때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계연은 신발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현대에서 고급 신발을 사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계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방향만 확인하면 괜찮았다. 현재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배가 고프면 뛰어난 청각과 후각을 이용해 손쉽게 먹고 마실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더는 질주하지 않고, 천천히 쉬어갈 겸 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계연은 들짐승 때문에 난 걸 수도 있는 오솔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이내 그는 보따리에서 술 단지를 꺼내 술로 목을 축였다.
건초로 뒤덮인 땅에 도착해 발을 디디려던 그때, 계연은 움찔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허공에 떠 있던 발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레 건초에 손을 뻗어 보니, 덫이 보였다.
계연은 얼굴을 들이밀며, 덫을 자세히 살피려 애썼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날카로운 톱니를 가진 두 개의 강철띠가 보였다. 중앙의 조그만 구멍에는 기름에 담가 만든 듯한 대오리가 세워져 있었다. 잔뜩 휘어진 대나무에는 짐승의 힘줄처럼 생긴 것이 달려 있었다. 비록 지난 생의 스프링과는 확연히 다른 기술이었지만, 이 또한 짐승을 잡는 덫임은 확실했다.
“스프링도 없이 어떻게 힘을 받는 거지?”
원리가 궁금했던 계연은 옆에 굴러다니던 엄지 굵기의 나무 막대를 주워 덫의 중앙을 꾹 눌렀다.
철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계연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처참히 부서졌다.
“허억…….”
깜짝 놀란 계연이 숨을 헉 들이쉬었다. 방금 이 덫을 밟았다면 얼마나 크게 다쳤을지, 상상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쭈뼛 섰다.
하여튼 이곳에 덫이 있다는 것은 주변에 사냥꾼이 있다는 소리였고, 그것은 즉 부근에 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계연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덫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대나무와 짐승의 힘줄을 이용해 만든 덫은 몇 번 반복해 맞물리다 보면, 대나무가 탄성을 잃기 마련이었다.
전처럼 덫을 잡초로 가린 뒤,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다만, 이번에는 짐승이 다니는 길을 걷지 않기로 했다.
높이가 100척 안팎인 작은 언덕을 지나자, 계연의 눈앞이 탁 트였다. 비록 계연의 시야는 흐릿했지만, 움직이는 사물을 포착하는 순발력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올랐다. 색이 다소 검은 것을 보니, 사람이 피운 불이 분명했다.
* * *
3리 안팎의 언덕 위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간편한 웃옷을 입고, 팔다리에 피혁(*皮革: 날가죽과 무두질한 가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두른 사람 넷이 바람을 등진 채 불 옆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활을 등에 지거나,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큰 칼과 창 등을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가죽을 벗겨낸 토끼 한 마리와 털을 손질한 닭 한 마리를 꼬치에 끼우고 구웠다.
“참나. 벌써 며칠이나 됐는데 큰 짐승도 잡지 못하고, 어머니께서 주신 염주도 잃어버렸네. 이런 젠장!”
“됐어, 사당 옆에 가면 널리고 널린 게 염주야. 5문이면 살 텐데, 뭘 그리 중얼거려!”
“네가 뭘 알아! 그건 우리 어머니가 사당에서 직접 구해오신 거야, 노점상에 파는 염주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얘 좀 봐라, 내가 언제 똑같댔어? 어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비슷한 거라도 하나 사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럼 너 맞아 죽을걸?”
“어……. 일리가 있네!”
그 대화에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에게선 짐승을 잡지 못한 데서 오는 우울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숲에서의 사냥은 번번이 수확을 얻기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쉿……. 조용히 해봐. 저기 누가 있어!”
불더미 주변은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사냥꾼들은 재빨리 활이나 칼을 쥐어 들었다.
아직 날이 밝은 터라, 그들은 긴장하지 않고 그저 경계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서두르다가 길을 잃었네요. 마침 이곳에 불빛이 보이길래, 길 좀 여쭈러 왔습니다.”
먼 곳에서 계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꾼 무리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걷던 계연은 그들과 십수 보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어딜 가시려는 거요?”
칼을 쥔 사냥꾼 하나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계연을 자세히 관찰했다.
등에 보따리를 지고, 손에는 지우산을 쥔 그는 산행하기엔 다소 부적합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고상한 학자 같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의심스러웠다.
“청수현(淸水縣)이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어요? 낙월령(落月嶺)을 지나 남쪽으로 쭉 가면 강줄기가 나오고, 그 강줄기를 따라 걷다 보면 청수현에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강줄기를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강줄기?”
사냥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설마 옛날 청수하(淸水河)를 말하는 거요?”
계연이 그 강줄기의 이름을 알 리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선 대부분 저들이 말하는 이름이 맞았다.
“아마도요.”
“마을 어르신께 들은 건데, 청수하가 예전에는 청수현에서 시작해 앞고개까지 이어졌다더군. 다만, 밭을 관개(*灌漑: 농사를 짓는 데에 필요한 물을 논밭에 댐)하려고 20년 전의 현령께서 강줄기의 방향을 바꿨다지? 그래서 청수하가 더는 이쪽으로 흐르지 않고 있소이다.”
계연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곳에서 청수현까지 얼마나 걸리죠?”
“동쪽으로 이삼 십리 정도 가다 보면 관도(浩然)가 하나 나올 겁니다. 그 길을 따라 반나절 정도 걷다 보면 인가에 도착할 거요.”
‘이삼 십리라.’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았다.
“다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연은 두 손 모아 인사를 건넨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냥꾼들이 자신을 경계하는데,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밀며 고기를 얻어먹고 싶지 않았다. 이삼 십리 정도라면, 금세 도착할 터였다.
고상한 문인 차림을 한 계연이 단호하게 걸음을 떼자, 사냥꾼들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이, 선생, 그대로 가시려고? 산길을 삼십 리나 가야 하는데, 해가 곧 저물 거요!”
심성이 나쁘지 않은 사냥꾼 하나가 끝내 계연을 향해 소리쳤다. 다름 아닌, 염주를 잃어버렸다던 사내였다.
그러자 계연은 자신을 불러 세운 사람을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
법력을 갖추고 난 뒤, 계연의 두 눈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평범한 사람의 ‘노기(怒氣)’가 보였다. 통명책에선 이를 망기(望氣)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천부적으로 타고나거나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계연은 자신이 망기를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계연은 확인을 위해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했지만, 사냥꾼들이 드러내는 ‘기상’은 훨씬 또렷해졌다.
방금 그를 불러 세운 자의 머리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검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마치 머리 위를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연기처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계연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조심스레 하소연했다.
“어쩔 수 없죠.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이 황량한 산에서 밤을 보내야 하잖아요? 들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게다가 당신들이 들고 있는 무기도 꽤 무서워서 말이죠.”
계연이 긴장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들은 외려 경계심을 풀었다.
“하하하! 선생,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저 사냥꾼들일 뿐이니까. 저녁에 짐승이 나타나면 놓치지 말고 사냥을 해야죠. 선생께서 괜찮으시다면, 이리 와서 앉으시오. 내일 아침이 되면 우리도 마을에 돌아갈 건데, 이곳에서 청수현의 중심지가 멀지 않으니, 함께 가시오.”
계연은 그들이 제안이 반가웠지만, 걱정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래도 될까요?”
“하하하. 이리 오시오. 안 될 게 뭐 있소? 닭과 토끼도 거의 다 익어 가는데, 한번 사냥꾼들의 요리 솜씨 좀 맛보시오.”
다른 사냥꾼들도 선의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말에 ‘상호’ 간의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졌다. 물론 계연은 감지덕지하며 냉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계연이 불더미 옆에 앉자, 그들은 서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자기소개라고 해 봤자, 서로 이름과 본적을 밝히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자신이 바람을 가르고 질주해 왔다고 말할 수 없었던 계연은, 상인들과 동행을 하다가 갈림길에서 흩어졌는데, 혼자 걷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변명했다.
동시에 그는 환영술을 발휘하여, 자신의 눈이 비교적 정상인처럼 보이도록 했다. 희뿌연 눈을 한 맹인이 산길을 마구 뛰어다니면, 누가 봐도 무서울 것이다.
사냥꾼들은 계연이 길을 잃은 것보다는 춘혜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럼 춘혜부에서 누선은 타 보셨소이까? 우리는 두 번 정도 가 봤는데, 타 볼 기회가 없었소. 아, 그리고 원자포의 천일춘이 황제께서 만드신 술이라, 천상의 맛이 난다고 하더군!”
“맞아요, 맞아. 이리 고상하신 걸 보니, 선생께선 누선도 타 보시고, 천일춘도 드셔 보셨겠죠?”
그 말에 계연이 웃음을 지었다.
“다들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대정국 황제 폐하가 직접 술을 빚을 리 있나요. 다만, 당시 황제께서 그 술을 무척 좋아하셔서, 천일춘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내 말이, 황제께서 다른 사람한테 술을 빚어주실 리 없지!”
그들이 말을 마치자, 계연이 입을 열었다.
“누선을 타본 적은 없지만, 천일춘은 마셔 봤지요. 실로 명실상부한 술이더군요. 달콤하고 순수한 향이 마치 봄날의 바람처럼 오랫동안 혀끝을 맴돌아요.”
그는 반 정도 남은 술을 사냥꾼들과 나눠 마실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황무지에서 낯선 사람이 술을 준다면, 경계심이 많은 사냥꾼들은 섣불리 술을 마시지도, 거절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렵사리 경계심을 풀고 어울리는 중인데, 괜히 어색해질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