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천일춘과 번화한 춘혜부를 향한 그들의 동경을 눈치채고, 계연은 춘혜부의 근황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향촌에 사는 사냥꾼들은 간혹 거대한 사냥감이 잡힐 때나 도시를 찾지, 웬만해선 마을에서 거래를 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고기가 노릇하게 익었다. 사냥꾼 하나가 작은 칼로 토끼 다리를 잘라, 계연에게 건네주었다. 식사를 시작하자,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졌다.
그때, 계연은 방원(方愿)이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떠나려던 그를 붙잡던 그 사람이었다.
“형씨. 눈 밑이 붓고 거뭇한 것 같은데, 요즘 푹 쉬지 못하셨나 봐요?”
사실 산에서는 마음 놓고 잘 수가 없는 터라, 사냥꾼 무리는 모두 피로한 상태였다. 계연은 이 화제를 빌려, 자신의 궁금증을 확인하기로 했다.
“아, 맞소.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거든. 자더라도 꼭 악몽을 꾸고……. 벌써 달포째 그렇소이다. 그래서 우리 모친께서 내게 더러운 게 붙었을지도 모른다며, 사당에서 염주를 하나 가져다주셨지요. 한심하게 잃어버렸지만 말이오.”
“처가 없으니 조급해서 그렇지!”
옆에 있던 사냥꾼이 농을 던지며 말했다.
“꺼져, 장가갔다고 지금 텃세 부리는 거냐?”
“당연하지, 하하하!”
이들은 사이가 돈독한 듯, 서로 거리낌 없이 농을 주고받았다. 한참 방원을 조롱하던 사내는 결국 자신이 방원에게 배필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계연은 방원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고작 스무 살 안팎밖에 되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겉모습만 보면 서른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말이다.
“악몽에서 보았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해몽은 못 하지만, 그런 거에 관심이 많아서요.”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사냥꾼들이 조용해지자, 계연은 계속해서 방원의 일을 물었다. 방원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말했다.
“악몽이 다 거기서 거기죠. 그래 봤자 악귀이나 귀신이 나오고, 놀라서 깨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고, 낮이 되면 잊어버리고, 뭐 그런 거 아니겠소?”
“아, 그렇군요……. 그럼 꿈에 매번 다른 게 등장하나요?”
계연의 질문에 방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언젠가 핏발이 가득 선 초록색 눈동자를 본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꿈을 회상하던 방원의 팔에 어느덧 닭살이 돋았다.
“성황당에 절을 드린 적은 없으세요?”
“성황당이요? 이 좁은 청수현에 성황당이 있겠소? 그냥 토지신당 하나랑 와산사(臥山寺)가 전부요. 아, 와산사에 가서 명왕불(明王佛)께 절을 올린 적은 있지.”
‘성황당이 없다니!’
계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그만 마을에는 성황당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기억될 만큼 대단한 인물이나 조정에서 추봉할 만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향촌 사람들은 덕행이 있는 웃어른으로 성황당을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성황신은 웬만하면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곳처럼 성황당이 없는 마을은 마을이 소속된 부의 성황신이 함께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부의 행정중심지가 되는 곳은 본디 인구가 밀집해서 잡다한 일이 많은 곳이었고, 부의 절반이 이렇게 작은 현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 순시관이 며칠에 한 번 순찰을 돌러 오는 것도 다행일 노릇이었다.
작은 마을의 불당 상황은 더 암담했다. 불법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다스리는 진정한 사당이 이런 곳에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는 천궁(天宮)과 현선(玄仙)도, 천주와 부처도 없었다. 사당의 불상은 대부분 널리 알려진 고승명왕상이었다. 이것은 정신적 산물이긴 했지만, 고승명왕도 평범한 신과 동일한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물론 상황은 더 심각했다. 관할 구역이 정해지지 않은 사당은 도처에 분포되어 있으니, 그 많은 사당을 다 돌보려면 고승명왕의 몸이 수십 개여도 부족했다.
한참의 대화 끝에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계연은 잠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밤이 내려앉자, 서서히 침묵이 깔렸다. 불더미 옆에 누워있던 계연은 망을 보다 꾸벅꾸벅 조는 사내를 슬쩍 쳐다본 뒤, 식은땀을 철철 흘리는 방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법력을 이용해 모은 영기를 방원의 이마에 살며시 흘려보내자, 방원의 표정이 빠르게 평온해졌다.
‘나도 아직 못 자고 있네.’
* * *
이튿날 아침, 계연은 사냥꾼을 따라 그들이 파둔 함정을 차례대로 확인했다. 이렇게 잡은 짐승은 고작 노루 한 마리뿐이었지만, 수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이 정도에 사냥꾼들은 만족하기로 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뒤, 사냥꾼들은 계연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갈림길 너머로 그들이 사는 촌락이 보였다.
촌락은 엄격히 말하면 산촌(山村)이었다. 멀리서 보면 외부와 연결된 길만 하나 나있을 뿐, 그 흔한 논밭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촌락 사람들이 모두 사냥꾼인 것인지, 아니면 밭은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갈림길 앞에 멈춰 섰다. 방원은 계연에게 청수현으로 가는 길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계 선생, 이 길을 따라 5리 정도 가다 보면 관도가 하나 나올 거요. 그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쭉 걸어가면, 날이 저물기 전에 청수현에 도착할 겁니다.”
“네, 다들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촌락에 들러서 점심 좀 사 먹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계연이 이대로 떠날 리 없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저희 집으로 가서 드시죠!”
“그래요, 계 선생. 우리 집으로 오셔도 되오!”
“복잡하게 그럴 거 뭐 있습니까. 다 같이 오늘 잡은 노루 고기나 먹읍시다!”
“자, 자, 그럼 얼른 가세!”
“좋아요. 그럼 실례할게요!”
“어휴, 실례랄 것까지야……. 괜찮소. 역시 학문이 깊으신 분이라, 예의가 바르시네!”
사냥꾼들은 다정하게 계연을 데리고 촌락으로 향했다.
산촌에 들어선 계연은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이 산촌은 계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다. 곳곳에 여염집이 자리하였는데, 사냥꾼들에게 듣기로는 이 촌락의 인구는 200여 명에 달했다.
땅이 무척 넒어서인지 촌에는 담벼락이 둘러있지 않았지만, 집집마다 울타리나 낮은 담이 세워져 있었다. 사냥꾼 넷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달려 나와 구경을 했다. 계연이 문인이라는 말에, 모두 따듯하게 계연을 반겨주었다.
원래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한 그들은 정흥(丁興)이라는 사냥꾼의 집에서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준비하였고, 결국에는 저녁이 되어서야 식탁 앞에 앉았다. 네 사냥꾼의 가족들이 정흥네 정원에 모여, 노루 요리를 즐겼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계연이 고이 간직해두었던 20년산 천일춘을 꺼냈다. 한 사람이 한 잔씩 나눠 마시니, 술이 금세 절반이나 사라졌다. 그제야 천일춘이 아까워진 계연은 단지를 집어넣고, 계속해서 촌락의 토속주를 들이켰다. 한편, 천일춘을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 허풍 떨 거리가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 하늘은 이미 깜깜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로가 계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려 했지만, 계연은 당연히 두 모자가 지내는 방원의 집으로 향했다.
방씨 모자를 따라 어두운 길을 걷던 계연은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원이 타고난 불의 기운이 아닌 붉은빛이 검은 기운을 뒤덮었다. 그의 어머니가 드러내는 불의 기운은 다소 약했지만, 불결하거나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야옹!”
이때, 한쪽에서 처량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계연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붕 위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요사스럽거나 악한 기운을 품지 않은 평범한 동물이었다.
방씨네 집은 지극히 평범했다. 방 두 칸이 딸린 본채와 곁채, 그리고 땔감을 놓는 방을 지닌 집은 다른 여염집에 비하면 그리 누추한 것도 아니었다. 계연은 곁채에서 묵기로 했다.
밤이 깊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미야옹!”
“냐앙!”
“아옹!”
선잠을 자던 계연은 연이은 고양이 울음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선,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본채 쪽을 바라보았다.
본채 지붕 위에는 들고양이와 집고양이 십수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전부 평범한 동물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계연이 시린 눈을 애써 부릅떠보니, 본채 창문을 통해 음산한 녹색 기운이 가득 찬 방원의 방이 보였다.
‘저게 대체 뭐야!’
계연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놓인 등잔에 있는 기름을 손가락에 묻혔다. 법력을 이용해 기름을 흡수한 그는 중지와 엄지를 맞댄 뒤, 방씨네 본채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슈욱!
기름 방울이 소리 없이 본채 안으로 날아 들어가, 방 안에 놓인 등잔에 정확히 떨어졌다.
똑!
등잔에서 기름이 스무 방울 넘게 튀어 오르더니, 기름 방울들은 독특하고 느리게 움직여 등잔을 벗어나 천천히 방 곳곳으로 날아올랐다.
무예와 어수술이 조화를 이루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계연은 화절자를 꺼내 소매 사이로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냈다.
소매 밖으로 왼손을 쭉 뻗은 계연은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검은 재를 손에 묻힌 다음, 환영술을 이용해 불씨가 내뿜는 불빛을 가렸다.
그가 다룰 수 있는 술법은 고작 네 개가 전부였기에, 모든 술법을 최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다루어야 했다.
“후!”
계연이 가볍게 입김을 불자, 불씨를 숨긴 검은 잿더미가 곁채를 벗어나, 대략 3초 만에 방씨네 본채로 들어섰다.
그의 단로에 맹렬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고, 게슴츠레 뜬 그의 희뿌연 두 눈에 뜨거운 불빛이 반짝였다.
쿵!
방씨네 본채에 순간적으로 불빛이 번쩍였다.
“끼아악!”
소름 끼치게 공포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음산한 녹색의 기운은 불빛을 번쩍이며 창문 밖으로 멀리 달아났다.
“쳇! 별것도 아니네,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음산한 녹색 기운이 하늘로 날아 도망갔지만, 계연은 그것을 뒤쫓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더 간단하고 효과적인 해결 방법 또한 터득하였으니, 굳이 야밤에 추격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방원에게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
* * *
그 무렵, 방씨네 본채.
두 모자는 모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방원의 어머니 정(丁)씨 부인은 허겁지겁 겉옷을 걸치고 아들의 방으로 뛰어갔다. 방원은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앉아 바들바들 떨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원아, 괜찮은 거니? 무슨 일이야, 방금 그 소리는 또 뭐고?”
방원의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상에 앉아 아들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보니, 아들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 어머니……. 악몽을 꿨어요. 후우…….”
방원은 정신이 없는 탓에 멍하니 말했다. 그는 분명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악몽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돌연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끝없는 불길이 미친 듯이 그를 덮쳐왔다. 그러는 사이에 꿈속에 나타나곤 했던 썩은 내를 풍기던 두려운 괴물이, 불길에 처참하게 타 버렸다.
괴물의 비명은 꿈과 현실에서 모두 울려 퍼졌고, 방원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고 만 것이다.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계연의 놀란 목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왔다.
똑똑, 똑똑똑.
“방 씨, 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 방금 이상한 비명을 들었는데, 다들 괜찮은 겁니까?”
방 안에 앉아있던 두 모자는 계연의 맑은 목소리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사람이 많으면 공포심이 절로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어머니, 얼른 선생님께 문 열어주세요.”
방원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하자, 정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무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계연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
“별거 아니에요. 원이가 악몽을 꾼 것 같아요…….”
“아, 별일 없으면 다행입니다. 온 김에 잠깐 들어가서 아드님 좀 뵐게요.”
그 말을 끝으로 계연은 정 씨와 함께 방원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