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호연(浩然)하디 호연하다
이번 토론은 장장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윤재성은 이러한 열기에 큰 만족을 느꼈다.
‘계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즐거움 속에서 공부하니, 역시 효과가 있구나!’
모두가 충분히 대답을 마친 뒤, 윤재성은 서탁 앞으로 걸어가 수십 명의 학동을 향해 말했다.
“오늘 대답한 내용을 잘 적어두거라. 말이 서툴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은 옆 사람이나 나에게 물어도 좋다. 이번 문장 시험은 이것으로 대체할 것이다.”
잔뜩 들떠있던 아이들은 ‘문장 시험’이라는 단어에 습관적으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반응에 웃으며 고개를 젓던 윤재성은 엄숙하고 굳건한 눈빛으로 서탁을 바라보았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사직을 돕는 것과 같다!’
붓을 쥔 그는 서탁 위 선지에 큼지막하게 글을 적었다.
<군조론(群鳥論)—학동의 대답>
* * *
그 무렵, 영안현 성황당.
공과사(功過司)에서 관리 감독을 담당하는 성황당의 문판관(文判官)과 무판관(武判官)은 기록 첨삭에 한창이었다. 각 기관의 상황과 주야순시관의 보고 내용, 현 내 누구에게 죽음이 임박했는지, 누구의 운명이 바뀌어 주의해야 하는지, 각 기관 업무에 어떠한 애로사항과 수요가 있는지 등, 일의 경중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듬어야 했다.
두꺼운 기록을 모두 확인한 무판관은 거침없이 문자 절반가량을 삭제하며, 책 몇 권으로 내용을 요약했다.
“어서 가져가고……. 다음, 다음 거 가져오게!”
아무리 일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성격이 급한 무판관이 버럭 호통치자, 옆에서 꼼꼼히 기록을 첨삭하던 문판관이 웃으며 말했다.
“됐네, 됐어. 판관 나리, 진정하시게나. 곧 가져오겠지!”
옆에 있던 하급 관리들은 죽을 맛이었다. 책을 돌려주고, 가져오고, 또 쉼 없이 각 기관에 맞게 분류를 한 다음, 각 기관장에게 가져가 첨삭을 받아야 했다. 거의 하루의 절반은 길에서 보내는 셈이었다.
더구나 글의 내용은 무게와 직결되어 있었다. 내용이 적절히 삭제되면 괜찮지만, 선악이 극에 달한 내용의 서류일수록 묵직해서, 들고 나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두 하급 관리가 종종걸음으로 저승 부회당(簿匯堂)에 도착했다. 문턱을 넘으려던 그들은 안에서 다급히 뛰쳐나오던 문직 관리들과 쾅 부딪히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뭐가 그리 급해?”
“책에 문제가 생겼네! 야단이 났어! 안 들려, 도무지 들 수가 없다고! 판관대인과 복록이사대인(福祿二司大人)을 모셔와야 해!”
하급 관리들은 모두 귀신의 형체를 하고 있으므로, 서로 부딪혀도 살짝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각 기관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각 기관장이 공과사에 모였다. 문판관의 탁자에 놓인 공과부(功過簿) 한 권과 복록책(福祿冊) 한 권이 어렴풋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판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두 책에 손을 뻗은 그는 앞부분을 모두 넘기고, 빛이 새어 나오는 책장을 펼쳤다.
그곳에서 이해하기 힘든 기류가 흘러나왔다. 아주 옅었지만, 굉장히 현묘하고 기이한 기운이었다. 그 위의 문자들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복록과 덕업이 크게 부푼 상태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모든 기관장의 시선이 그 책장에 적힌 이름으로 향했다.
“윤재성!”
* * *
청수현 남쪽 100리(*약 50km) 밖의 관도를 걷던 계연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감각에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 끝에 나타난 바둑돌 형체를 바라보았다.
계연은 희미한 바둑돌 형체를 통해, 종이를 짚고 붓을 쥔 길쭉한 손이 적어내리는 문장을 엿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계연의 손끝이 저릿해지더니, 희미하던 바둑돌 형체가 응결되기 시작했다.
“윤 훈장!”
주변에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한 계연은 매섭게 속도를 높이다가,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풀쩍 뛰어올라, 우거진 숲 상공에 도달했다. 뒤이어 그는 낙엽처럼 가볍게 나무 위에 착지했다.
커다란 나무 위에 오른 계연은 두꺼운 가지를 골라 앉았다. 그는 의문 속에서 손을 뻗으며, 윤재성에 의해 나타난 바둑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늘날 계연에겐 총 세 개의 바둑돌이 있었다. 하나는 형체가 애매한 흑돌, 하나는 신기루처럼 희미한 흑돌, 마지막 하나는 윤재성의 투명한 바둑돌이었다. 바로 그 투명한 바둑돌이 손끝에서 응결되고 있었다.
좀 전의 기이한 감각은 마치 윤재성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했다. 비록 현묘한 법결이나 기이한 빛 따위는 없었지만, 윤재성의 기운이 한데 모여 고스란히 계연에게 전해졌다.
윤재성은 단순히 생각이 트인 것이겠지만, 영안현 성황당에는 그것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드러났다. 계연에게 전해진 느낌은 더욱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형용하자면, 학자가 잉태하고 있던 호연한 기운이 폭발한 것이었다.
계연이 이렇게 보니, 바둑돌의 색이 변한 것은 자신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바둑돌이 응결된 것은 온전히 윤재성 때문인 듯했다. 좀 전의 감각을 통해, 계연은 이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계연은 자신의 바둑돌을 한층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연은 사색에 빠지지 않고, 바둑돌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런 벗을 두다니, 실로 행복하구나!”
혼잣말을 마친 계연은 그제야 자신의 말투가 과히 예스럽고 점잖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습관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좋은 벗 윤재성을 둔 덕분에, 계연 또한 생각이 탁 트였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에서 수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 세계의 수련은 현대의 소설 속에서 보았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기초적인 연기결과 심오한 수련의 가장 큰 차이는 그저 오행(五行)과 음양(陰陽)의 운용, 그리고 수련의 효과 정도였다. 더구나 수련의 경지가 세밀하게 나뉘어 있지도 않았다.
선도를 닦으며 수련하는 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묘한 과정이었다. 누군가는 순간의 깨달음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지만, 누군가는 기나긴 세월 동안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기 일쑤였다.
어떤 수행인은 힘으로 기교를 돌파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또 일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행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함을 이르는 말.) 노력을 기울이며, 진중하고 성실하게 연마하고, 각종 술법을 수련했다.
간혹 자연스럽게 수행의 경지를 돌파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영문도 모르고 수행을 이어가야 했다. 유명한 선문에서도 각기 다른 수련에 대한 견해와 규범을 지니고 있었다.
요괴가 된 짐승들의 수행은 더욱더 어려웠다. 선술을 수련하는 사람들보다 이런 존재들은 도력을 쌓기가 힘들었고, 수행을 위해 사람으로 둔갑하는 건 상당히 가혹한 시련이었다. 의지할 곳도 없는 데다가, 영혼과 육신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이런 요괴들은 극심한 고통을 얻곤 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억센 의지로 꾸역꾸역 도력을 쌓았다. 정통 선도보단, 속세의 무공 훈련법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요괴는 영지가 발휘되기 전의 습성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비록 이들 중에는 마음이 순수한 자가 대부분이었지만, 극악무도하게 변하여 업보에 시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요괴가 다른 생명을 해치며 살아가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특히 영지가 생겨서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보양을 시작할 때, 이 존재들은 마치 마약을 하는 것처럼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런 존재들에게 살육은 더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것과 같은 본성이 아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해치면 자신도 화를 입기 마련이었고, 나아가 사람이나 다른 요괴들의 미움과 두려움을 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속세의 무공은 계연이 지난 생에서 소설에 나왔던 것과 꽤 비슷했다. 경맥을 뚫고, 진기를 모으는 등, 모든 동작에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이곳의 무예는 분명한 돌파구와 기준을 지닌 동작들로 이루어져 몸의 족쇄를 푸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연이 쓸데없는 생각에 잠길 리 없었다. 통장에 백만 원도 없는 사람이 일억이 생기면 무얼 할까 걱정해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계연은 그저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이 최고의 선도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계연의 결코 높지 않은 기개를 대변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시간을 통해, 자신이 동경하던 ‘자유’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게 되었다.
한편, 바둑돌이 살며시 희미해졌다. 세 개의 바둑돌은 보이지 않은 바둑판에 올려진 듯, 삼각형을 이루었다. 계연이 생각을 바꾸자, 희미한 영기가 곧바로 모이기 시작했다.
계연은 기를 이용해 천지를 만들어 내었다. 영기를 체내로 주입하자, 몸속 단로에 불이 타올랐다. 체내의 소우주에는 찬란한 별빛이 반짝였고, 화려한 불빛이 이따금 단로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단전 깊이 기가 요동쳤다.
어느새 관도에 안개가 깔리고, 한 번의 낮과 밤이 지나갔다.
* * *
마차 세 대가 천천히 관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마부들은 마차 위가 아닌, 마차 아래에서 말을 끌며 걷고 있었다. 아마도 자욱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말을 몰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맨 앞쪽 마차에는 하얀 옷을 입은 공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마차가 매우 천천히 나아가고 있으므로, 차 안은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그 옆의 사내종은 무료한 듯, 멍하니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느린 거야?”
조그맣게 투덜대던 사내종이 문발을 들치고 마부에게 소리쳤다.
“빨리 좀 갈 수 없어요? 청수현 관문을 지난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느린 거예요!”
마부가 고개를 돌리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 그러십니까. 저라고 느리게 가고 싶어서 이러겠습니까? 이 안개 좀 보십시오. 지금은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갈수록 안개가 짙어진단 말입니다. 안개가 걷혀야 말을 몰죠!”
사내종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개 사이로 10장(*약 30m) 거리 밖까지 내다보이니, 시야가 많이 흐린 편도 아니었다. 그가 마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설마 날짜대로 돈을 받아가셔서 이러는 건 아니죠?”
이번에 마차를 고용할 때, 날짜대로 계산해 품삯을 주기로 했다. 제 공자께서 언제 갑자기 마차를 세우고 주변을 노니실지 모르니, 거리로 계산하는 건 마부에게 큰 손해였다.
마부는 사내종의 불평에 기분이 상했지만, 버럭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성질을 꾹 누르고 설명했다.
“아까 청수현에서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청수현을 벗어나 남쪽으로 가는 길은 벌써 며칠 전부터 안개에 뒤덮여 있었답니다. 지금은 그나마 괜찮지만, 해가 지고 나면 안개가 더 짙어질 겁니다. 이곳을 오가는 행인과 상인들도 길을 잃을 수 있다며 조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됐어요, 됐어. 최대한 빨리 가기나 하세요!”
“예, 예! 그럴 겁니다!”
서로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마부는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만하거라, 위동(衛同). 괜히 마부를 난처하게 하지 마. 마부가 날씨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조용히 있거라.”
“아, 예. 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