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5화 (75/892)

75화. 축하연

한참 뒤에야 옅은 실망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하하. 검의첩과 장검 청영이 둘 다 내 손에 있으니 이걸로 충분하지, 뭐. 좌 대협은 나를 충분히 도와준 셈이야!”

비급을 보따리에 집어넣고, 장검과 녹나무 상자를 든 계연은 가볍게 바위를 밟고 내려왔다.

칼자루가 없는 장검을 보니,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는 적당한 굵기의 넝쿨을 꺾어, 이것을 칼 끄트머리에 연결했다. 영기를 주입하고 법력을 움직이자, 어렴풋이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넝쿨은 이슬을 머금은 듯 파릇파릇해졌다. 이렇게 넝쿨로 된 특별한 칼자루가 완성되었다.

“너한테 영성이 있긴 하지만, 금과 철 때문에 자유자재로 변할 수가 없어. 이 넝쿨이 장검에 뿌리를 내리면, 네게 기세를 더해주고 앞으로 네 칼자루가 되어 너와 한 몸이 될 거야. 나도 가끔 영기를 불어넣어 줄게.”

말을 마친 계연은 칼을 들고 생전에 좌광도라 불렸던 좌리의 묘를 벗어나기로 했다. 잡초를 뽑고 갈까 고민도 했지만, 한쪽에 서서 묘지를 바라보니 지금 이대로도 썩 나쁘지 않았다.

묘비 앞에 과자 하나와 마지막 남은 토끼 고기를 남겨둔 뒤, 계연은 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좌 대협, 천천히 드세요!”

묘지 안에 영혼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연은 묘지를 향해 소리쳤다.

녹나무로 만든 상자를 팔면 은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비급은 아무래도 좌광도의 후손에게 물려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직 후손이 남아있다면 말이다.

지금 계연은 떠나기 전보다 짐이 늘어났다. 그의 회색 보따리엔 강호 사람들이 탐낼 만한 절세 무공의 비급 한 권이 더해졌고, 지우산은 여전히 그의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었다.

계연은 보따리에 가지고 다니던 옷 몇 벌로 넝쿨을 두른 칼을 칭칭 감싼 뒤, 칼을 등에 비스듬히 메었다. 신발 상자만 한 크기의 묵직한 녹나무 상자에는 보따리를 넣어 들고 갔다.

좌리의 묘지를 찾기 전까지는 자주 걸음을 멈추었지만, 지금은 좌리의 유물을 몸에 지닌 만큼, 계연은 걸음을 더욱더 재촉했다. 비급과 귀한 검을 얻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 개학을 앞두고 밀린 방학 숙제를 끝마쳤을 때의 개운함이랄까.

검의첩에 따르면 좌리의 본적은 의주 균천부(均天府)로, 그는 어려서부터 부도(府都)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글을 배우고, 부유한 사람은 무술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좌리가 자유롭게 무도를 접하고 이로 인해 비범한 인물이 된 것은, 좌리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좌씨 가문이 충분히 뒷받침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한 걸음 물러나서 말하자면, 좌광도는 균천부에서 큰 명성을 날렸을 것이다. 현재 좌씨 가문의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은거하던 좌리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는 한동안 강호 협객들에게 시달렸을 터였다.

관도를 따라 걸어가는 계연은 느린 속도로 걷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땅에서 발을 살짝 띄운 채, 날아가듯 전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선 굉장히 높은 무공 조예도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경지에도 도달해야 했다. 느리게 걷는 것 같지만 사실 빠르게 나아가는 상태는 상당히 모순적이기에,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가 축지법을 사용하는 줄 알 수도 있었다.

* * *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자, 아침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계연은 어느새 왜두산과 멀리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때, 계연의 귓가에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금까지 마주쳤던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계연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인가가 밀집된 곳에 들어섰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저 멀리,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 보니, 인근 촌락의 주민들끼리 모여 함께 축하연에 가는 중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양 두 마리랑 돼지 한 마리를 잡았대. 고기는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겠어!”

“아이고, 그만해.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앞사람의 말에 옆에 있던 사람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축하연처럼 큰 연회 정도는 열려야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었다.

“조동목(趙東木), 그놈은 복도 많지. 이웃 마을 련(蓮)이와 혼인하다니, 웬만한 사내보다 농사일을 잘한다고 소문난 처녀잖아!”

“그러게 말이야. 중매를 서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복 받은 놈!”

옆에 있던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얼른 가자, 얼른! 이러다 해가 지겠어. 아저씨께서 엄청나게 기다리실걸? 빨리 가자!”

“그래, 곧 있으면 식사도 시작하겠네. 술이 떨어지면, 아저씨께서 분명 우리 때문이라고 그러실 거야!”

“하하, 걱정하지 마! 시간 안에 갈 수 있어. 이따가 우리 금일봉을 받을 수 있잖아.”

“하하하……. 난 그냥 빨리 가서 뭐라도 먹고 싶어. 아저씨가 주는 돈이라고 해봤자, 고작 엽전 몇 개가 전부일걸!”

“으하하, 그건 그래!”

숨소리와 묵직한 걸음걸이를 들어보니 저들은 무거운 물건을 짊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두 명씩 짝을 지어 단지를 하나씩 들고 오는 사내들의 모습이 계연의 시야에 희미하게 들어왔다. 앞서 저들이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아, 저 단지에는 술이 한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축하연이라니, 가서 밥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나도 축의금을 내면 되지 않을까?’

이윽고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간 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앞에 가시는 분들! 잠깐만요!”

앞에서 술단지를 들고 가던 네 사람이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관도 뒤쪽에서 문인 행색을 한 사람이 한 손에는 지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나무 상자를 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계연은 숨을 헐떡이는 척하며, 일부러 땀을 흘렸다.

“제가 한참 동안 걷고 있는데, 촌락이나 상점 같은 게 도통 보이질 않아서 말이죠. 그나마 당신들이라도 마주쳐서 다행입니다. 두 시진(*二時辰: 약 4시간)만 지나면 날이 어두워질 텐데, 이 길에 혼자 남는 건 너무 무서워서요!”

“아……. 선생은 어디서 오시는 건데요?”

그들은 보폭을 늦추며 계연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리에 멈춰 서진 않았다.

“영태현(永泰縣) 방향에서 왔습니다. 균천부에 가려고요.”

“아이고! 오신 곳이며 가시려는 곳이며, 다 좀 머네요. 혼자 그 먼 길에 오르시다니, 정말 용감하신데요!”

계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근데 다들 주변에 사는 분들이시면, 저 하룻밤만 재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물론 값은 제대로 치를게요!”

계연이 이렇게까지 말하였으니, 젊은 청년들은 자연스레 그를 자신들의 집성촌으로 초대할 터였다.

“선생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같이 조씨 가문의 집성촌으로 가시죠. 그곳에 오늘 축하연이 열리거든요. 딱 보니 문인이신 것 같은데, 저희 아저씨께서 흔쾌히 환영해 주실 거예요.”

“그래요, 선생. 그런데 서두르셔야 해요. 아저씨 댁에 술이 부족해서, 저희가 술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좋아요, 좋아요. 빨리 가는 건 문제 없죠. 다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앞장서세요. 저는 알아서 잘 뒤쫓아 갈게요!”

계연은 웃으며 그들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는 향촌의 음식을 기대하며, 청년들과 가볍게 한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왜 달구지를 끌지 않고, 무겁게 짊어지시는 거예요?”

“아휴, 이건 회모산(盔帽山) 쪽에 있는 마을에서 사 온 술이라, 달구지를 끌 수가 없어요. 산길은 소보다 사람이 더 빠르잖아요!”

“아이고, 되게 멀리 다녀오셨네요?”

“맞아요. 종일 옮기는 중이에요!”

젊은이들은 하나 같이 입담이 뛰어났다. 계연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선생이자 계주처럼 먼 곳에도 가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더욱 신이 나서는 청년들의 아저씨께서 분명 축하주를 나눠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말주변이 좋은 계연과 그들은 짧은 시간에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갈수록 주변에 황무지가 점점 줄어들고, 논밭과 수로가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도를 벗어나 작은 오솔길을 일각(*一刻: 약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앞에 조씨 집성촌이 보였다. 길을 두리번거리던 중년의 사내가 술 단지를 들고 오는 네 청년을 발견하고선 냅다 달려왔다.

“참 일찍도 온다. 조금만 늦었으면 저녁 연회가 시작할 뻔했어!”

뒤이어 계연을 발견한 사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이분은 누구……?”

계연이 자연스레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저는 계연이라고 합니다. 길을 지나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하룻밤 신세 좀 지러 왔습니다!”

“조 백부님, 계 선생께선 학식이 있는 분이세요. 계주에서 오셨대요!”

한 젊은이가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중년의 사내, 조 백부가 계연을 다시 살펴보았다. 많이 고생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사이에서 고상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청년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사실 그것이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이처럼 좋은 날에 사람을 내쫓을 순 없었다.

“선생께서는 참으로 멀리서 오셨군요. 마침 오늘 경사가 있는 날이니, 오셔서 축하주라도 한 잔 받으셔야죠. 자, 어서 갑시다.”

그는 계연을 향해 공수한 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여섯 사람은 서로 예의를 갖추며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신랑과 신부는 이미 길시(吉時)에 맞춰 혼례를 올린 상태였다.

정원 담벼락 안팎에 다양한 모양의 탁자 20여 개가 놓여 있었고, 붉은 비단을 비롯한 색색의 비단과 ‘희(囍)’ 자 장식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향촌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며 연회가 열리기를 기다렸고, 열댓 명의 부인들이 한데 모여 바삐 음식을 준비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열띤 분위기였다.

“손님 오셨습니다!”

안에서 굉장히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축하연의 주인공들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계연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그들은 편안히 연회를 즐기라며 계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날이 아직 밝았지만, 전등이 없는 이 시대에는 해가 지기 전까지 야외 연회를 끝마쳐야 했다.

저녁 연회가 시작되기 전, 계연은 가장자리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촌락 사람들이었지만, 방금 길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함께 앉은 덕분에 그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향촌 밖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던 그들은 계속해서 계주의 이야기를 물었다.

모두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본채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누군가 소리쳤다.

“잘못 썼네, 잘못 썼어. 왜 왼쪽이 오른쪽보다 글자가 두 개 더 많은 거야?”

이어서 ‘아이고 정신 좀 봐.’ 같은 말이 이어졌다.

“참, 방금 다른 마을에서 온 그 선생은 글을 쓸 줄 알잖아? 그 사람한테 써달라고 할까?”

“그래요, 그래요. 그 선생께서는 마을 훈장과도 아는 사이라고 하셨으니까, 분명 학식이 있으실 거예요!”

“아저씨, 얼른 가서 선생님 모셔오세요!”

저녁 연회 전 축하 대련(*對聯: 한 쌍의 대구(對句)를 적어 문이나 기둥에 붙이는 종이)을 쓰는 것이 이곳의 풍습이었다. 매우 한미한 집안이 아니라면, 대부분 아낌없이 화려한 혼례를 열었다.

그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곧 중년의 사내들과 노인 행색을 한 사내가 계연에게 다가왔다. 미안함 섞인 미소를 짓던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계연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 대련을 적어야 하지 않나요? 축하연에 초대해주신 것에 대한 답례로 제가 대련을 써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야 정말 고맙죠, 선생!”

“자, 자……! 선생께서 대련 쓰시는 거 보러 갑시다!”

“저도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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