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6화 (76/892)

76화. 누런 종이책

조씨 집안의 집성촌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곤 촌장 한 사람이 전부였다. 예전에는 큰일이 있을 때마다, 촌장이 나서서 글을 쓰곤 했다. 비록 촌장은 배운 게 많진 않았지만, 적어도 글자 하나만큼은 반듯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눈이 침침해졌다.

향촌 사람들의 순박함과 다정함에 감동한 계연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계연이 본채에 들어서자, 커다란 팔선상(八仙床) 위에 잘 오려낸 붉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중 두 장에는 반듯한 글씨로 ‘경사로운 신혼’, ‘일찍 아이를 낳자’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낳’ 자에 필획이 하나 부족했고, 글자가 주변의 다른 글자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이를 보니, 계연의 얼굴에 절로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선생, 여기 붓이요!”

붉은 꽃이 잔뜩 수 놓인 옷을 입은 신랑이 그에게 직접 붓을 건네주었다. 그의 기상을 보니, 딱 좋은 운이 무르익을 시기였다.

“신랑, 잘 보세요!”

계연은 오른손으로 붓을 쥐고, 왼손으로는 소매를 붙잡았다. 뒤이어 평평하게 놓인 붉은 종이 위로 그가 축하 대련을 적어 내렸다.

《백 년이 넘도록 은애하리. 천 리에 이어진 부부의 연.》

마지막으로 계연은 붉은 종이 한 장을 더해, 가로로 ‘신혼 축하’ 네 글자를 적었다.

붓은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힘차게 종이 위를 누볐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빼어난 기운 또한 그 필체에 흘러넘쳤다.

촌장은 계연이 적은 대련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렸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선생의 필체가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아이가 손뼉을 치고, 그 옆의 어른들은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백부는 심지어 계연을 주인 자리로 안내했다. 주변 사람들의 재촉 아래, 드디어 저녁 연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주방을 도와 음식을 내어왔다.

“연회 시작합니다!”

손님을 맞이하던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붉게 저무는 노을 속에서 축하연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계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회석 곳곳을 살펴보았다. 연달아 솟구쳐 오르던 ‘행복한 기운’은 축하 대련을 붙이자,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더 폭발했다.

바로 그때, 움찔거리는 기운에 계연이 소매 속을 살펴보았다.

공중으로 흩어지려던 행복한 기운이 계연의 바둑돌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아, 좋아. 바로 이거지!”

시종일관 등에 지고 있던 보따리 속 넝쿨검 또한 반응하기 시작했다.

축하연의 주인공들과 같은 자리에 앉은 계연은 제일 먼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갓 만든 뜨끈뜨끈한 요리들이 입맛을 자극하는 향기를 풍기며, 건장한 체격의 주방 보조의 손에 들려왔다. 특선 요리가 나올 때면, 조백부가 특별히 음식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건 고등어구이고 이건 고기를 넣고 지어낸 밥인데, 맛이 끝내주지요. 그리고 이건 양의 사골로 우려낸 국입니다.”

신랑과 양측 부모, 그리고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계연을 귀빈처럼 여겼다. 다들 신혼부부에게 문인의 재기가 옮겨붙어야, 부부 사이에서 난 아이가 출세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계연은 축하를 아끼지 않으며, 제 소맷자락에 나타난 바둑돌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바둑돌은 흰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활짝 웃음을 지었고, 축하연엔 기쁨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이 술잔을 모두 채우자, 사람들은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외진 촌락에서 열리는 축하연에는 대도시처럼 솜씨 좋은 주방장이 따로 없었지만, 이곳만의 색다른 풍미 덕분에 연회 내내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때마침 복날이라,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며 맛 좋은 음식들로 몸보신을 했다.

이에 계연은 사람들이 목에 물수건을 두르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아예 웃통을 벗고 있기도 했다.

신랑은 돌아다니며 축하주를 받아 마시고, 신부는 신방(新房)에서 홀로 신랑을 기다렸다.

축하주를 받고 자리로 돌아온 신랑은 처가댁 어르신들께 술을 올렸다. 신랑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계연을 찾아와 또 한 번 술을 올렸다.

“계 선생님, 오늘 축하 대련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고로 좋은 대련이었어요. 제가 한 잔 올릴 테니, 잔 받으시죠!”

또박또박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취하진 않은 듯했다. 아마도 계연에게 올리는 술을 마지막으로, 신랑은 신방에 들어갈 것이다.

계연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얼굴로 술을 받고 또 따라주었다.

“예쁜 아이들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사세요!”

* * *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자, 축하연 또한 끝을 향해 달려갔다.

무더운 복날에 냉장고도 없었지만, 남은 음식이 상하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향촌 사람들은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탁자 위에 놓인 모든 그릇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주방 보조는 뒷정리에 한창이었고, 신혼부부의 친인척과 이웃들은 잔뜩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흡족한 걸음을 옮겼다. 계연은 길에서 만난 네 명의 사내 중, 조동량(趙東亮)이라는 청년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조동량의 집은 집성촌 어귀와 매우 가까운 집이었다. 조동량은 계연에게 작은 안뜰에 있는 곁채를 내어주었다. 작지만 침상도, 의자도, 이불도 갖춘 곳이었다.

술과 음식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에 해가 저물었는데도 사람들은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대부분 집안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바깥에 나와 바람을 쐬곤 했다.

계연 또한 의자 하나를 들고나와서는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왼쪽 멀리에 있는 세 개의 점이 반짝이는, 특이하게 생긴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촌락에 들어올 땐 몰랐는데, 인제 보니 조그만 사당인 것 같았다. 성인의 허리 정도 높이밖에 안 되는 것을 보니, 이곳의 토지신 사당이 분명했다.

날이 푹푹 쪘지만, 계연에게는 열을 식힐 부채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붙잡은 채, 아래로 세게 흔들며 바람을 일으켰다. 계연이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본 조동량이 조그만 의자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가 부들부채로 부채질을 해주며 말했다.

“계 선생님, 등에 그건 대체 뭡니까? 계속 가지고 다니면 덥지 않으세요?”

조동량은 민소매를 입고도 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소매통이 넓은 장포에 막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까지 몸에 동여매고 있는 계연을 보기만 해도 땀띠가 날 것 같았다.

“아, 이건 칼입니다. 내려놓는 걸 깜빡했네요!”

사실 넝쿨이 아직 불안정해서, 계연은 수시로 영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물론 그동안은 넝쿨검을 몸에서 떼어놓을 순 없었다.

“칼이요!?”

조동량의 눈이 번쩍였다.

“선생님께서는 무술도 할 줄 아세요? 지붕 위를 날아다니고, 벽을 타고 그런 것 말이에요. 그래서 혼자 그 먼 길을 떠나신 거군요!”

“하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간단한 호신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그의 말에 조동량이 흥분했다.

“계 선생님, 그럼 칼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지난번에 현에서 장검을 하나 봤는데, 정말 멋있더라고요!”

계연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이윽고 그가 꽁꽁 묶어놓은 매듭을 풀어, 잘 싸매어둔 넝쿨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푸른 천을 걷어내자,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3척 6촌(*약 1.2m)에 폭이 1촌 8분(*약 6cm)에 달하는 넝쿨검은 전체적으로 곧게 뻗은 직선형을 띄었다. 칼자루 앞쪽에는 아무런 굴곡이 없었고, 끝부분에도 화려한 장식 따위는 없었다. 칼자루엔 이슬을 머금은 푸른 넝쿨이 감겨 있었다. 상당히 간결하고 소박한 칼이었다. 물론 칼날에는 여전히 얼룩과 녹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 계 선생님의 칼은 제가 현에서 보았던 것만큼 멋있지 않네요. 칼집도 없고, 이거 녹슨 것 좀 보세요…….”

역시나 조동량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하……. 말했잖아요, 실망하실 거라고 말이에요. 다만, 그런 말은 삼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야 상관없지만, 얘가 불쾌해할 수도 있거든요!”

계연은 웃으며 칼을 가리키면서, 칼이 요동치지 못하도록 왼손으로 칼날을 꾹 눌렀다.

자신의 말에 계연의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조동량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제 말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계 선생님 칼도 나름 멋있어요!”

계연은 아무런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별이 잔뜩 수놓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바깥 이야기 좀 해주세요. 맞다! 강호 무림도 되게 멋있고 화려하죠?”

“음……. 아마도요? 근데 꼭 이곳보다 좋은 건 아니에요!”

대수롭지 않은 대화들이 오고 갔다. 대부분 조동량이 질문하면, 계연이 선택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마치 신화를 이야기하듯, 춘목강에 사는 강청어가 사람을 구한 일과 춘혜부 밖의 늙은 거북, 그리고 교룡이 한 지역의 바람과 비를 다스리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조동량은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계연이 해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더위를 식히러 나왔던 촌락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들어갔다. 조동량은 계연과 담소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내일 일찍부터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이만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원에는 계연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 멀리 토지신 신당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허리가 잔뜩 굽은 노인이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계연을 향해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네었다.

“선장께서 이런 외진 곳에 직접 걸음 해 주시니, 직접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유, 아닙니다! 이곳 주민들께서 저를 받아주신 덕분에, 축하주도 한잔 얻어 마셨습니다.”

계연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인사했다. 토지신 신당에선 엷디엷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신조차 모시지 않는 빈 신당인 줄 알았는데, 토지신이 있었다니…….’

다만 산수 신령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계연이 토지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한 가지 의문이라면, 눈앞의 토지신은 살아서 수행을 한 게 아니라 죽고 난 뒤 수행을 이룬 영 같다는 점이었다.

그는 계연의 무릎 위에 놓인 넝쿨검을 보고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왔다.

“선생의 선향(*仙鄕: 선인의 거처)은 어디입니까?”

“선향이랄 건 없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토지신께서는 본토 출신이시죠?”

노인이 옆에 놓인 바위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노부(老夫)는 생전에 이 조씨 마을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 마을의 토지신으로 섬겨졌지요. 아마 300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제 관할 지역도 조씨 집성촌 부근입니다. 마을 주민 중 숨은 덕행이 있어 죽고서도 영혼이 이승을 떠도는 자가 있으면, 간혹 저승사자와 함께 그 영혼을 저승까지 인도하기도 합니다.”

‘300년? 그렇게나 오래되었다니!’

다만 관할 구역이 제한되어 있어서인지, 이곳의 토지신은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소유한 향불이나 법력이 매우 적었다.

“그런데, 토지신께서 무슨 용무로 현신하셨는지요?”

토지신이 흥미로운 듯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선자가 참 드물지 않습니까. 한번 뵈러 왔습니다!”

계연이 실소를 터뜨렸다. 인제 보니, 상대에겐 자신이 신기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럼 토지신께서 실망하셨겠네요. 저는 그저 한낱 수행자일 뿐이지, 토지신께서 생각하시는 선장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노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신걸요!”

알랑거리는 게 아니라고 할 순 없었지만, 토지신은 진심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고이 접힌 누런 종이 한 뭉치를 품에서 꺼내었다.

“혹시 여기에 적힌 글을 봐주실 수 있으신지요? 뭐라 글이 적혀있지만, 노부의 법력이 부족해 도통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단순히 호기심에 찾아온 건 아니었다. 계연은 토지신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네, 한번 보죠!”

토지신이 건넨 누런 종이를 펼치자, 짙은 먹으로 적힌 글씨가 나타났다.

<정덕보공록(正德寶公錄)>

“이거 천록서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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