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7화 (77/892)

77화. 자손을 낳는 법

완전한 천록서를 만드는 게 어렵긴 했지만, 그리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보기 드물 뿐이었다. 계연은 이것이 천록서의 재질이 아닌, 천록서를 책으로 엮는 자에 대한 조건이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천록서를 읽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토지신이 수행에 정통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현묘한 이치를 꿰뚫어 보지도 못할 것이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이 토지신은 혜연자(慧緣者)와 비슷할 터였다.

계연의 입에서 ‘천록서’라는 단어가 나오자, 토지신이 흥분하며 말했다.

“선생, 그건 대단한 보물이지 않습니까?”

“천록서는 그저 문자 내용을 기술하는 일종의 방식일 뿐이지, 그 자체만으로 무조건 귀한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지요. 토지신의 책에는 <정덕보공록>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계연이 누런 종이책을 가리키며 토지신에게 설명했다. 뒤이어 내용을 대강 살펴본 뒤, 설명을 덧붙였다.

“귀신과 지맥 수행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인 것 같습니다. 첫 줄에 신도(神道)의 실증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고, 뒷부분은 더 자세히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신도에 관해 아는 게 없었던 계연은 흥미가 끌리질 않았다. 게다가 이것은 토지신의 책인 터라, 그의 의견을 묻기 전까지는 뒷부분의 내용을 읽기가 어려웠다.

“선생!”

바위에서 벌떡 일어난 토지신이 공손히 읍을 하며 말했다.

“노부 대신 책을 한 번 읽어주시겠습니까? 이 책을 100년 넘게 보관하는 동안, 찢어지지도 삭지도 않고, 물이나 불에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영기나 향불을 흡수하지도 않습니다. 노부가 지내는 현의 성황신님을 찾아가 여쭤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습니다. 부디 선생께서 한 수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네? 성황신께서도 보지 못하셨다고요?”

계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허언이 아닙니다. 사실 성황신께서 천록서에 관해 언급하긴 하셨으나, 이것은 절대 천록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책에 적힌 내용을 읽으실 수 있다니, 선생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우선 진정하세요. 한번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계연이 토지신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표지도 없이 접힌 종이 더미를 쳐다보았다.

천록서가 읽기 어렵긴 하다만, 한 현의 성황신이라면 잡념을 비우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성황신은 실력의 높낮이나 법력의 강약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신위를 지닌 존재였다.

‘그 말인즉슨, 이것이 평범한 천록서가 아니거나, 이것을 읽으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건가?’

자신의 눈은 특이하므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은 물론 혼자서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가장 그럴싸한 원인은 책에서 찾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제가 우선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네. 선생, 편히 보시지요. 꼼꼼히 읽어 보십시오!”

토지신은 계연에게 당장 책을 완독해 내용을 설명해주라며 재촉하고 싶었다. 물론 내용을 요약해서 글로 적어주면 더욱더 좋고 말이다.

한편, 계연은 이미 누런 종이에 몰두해 있었다. 종이를 활짝 펼치고 나니, 크기가 후대의 종이 신문과 비슷했다.

읽을수록 계연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전체적인 내용은 다른 천록서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헤아려 보면 간혹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학식이 높지 않은 동생(*童生: 지방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생원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실수였지만, 현묘하디 현묘한 천록서에서 이런 실수가 발견될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간격을 두고 상관없는 단어를 끼워 넣은 것 같은데?’

토지신은 찍 소리도 내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신비로운 고인의 게슴츠레한 눈이 점점 커지자,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하고 창백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계연의 시야에선 누런 종이책이 변하고 있었다. 글의 중간중간 끼워져있던 어색한 단어들이 순식간에 기세를 몰더니, 누런 종이 위에 흐릿한 그림을 펼쳐냈다.

여러 색채가 끝없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순서대로 구분하자면, 백금색의 금(金)의 기운, 먹물과 같은 수(水)의 기운, 푸른 목(木)의 기운, 붉은 화(火)의 기운, 누런 토(土)의 기운, 그리고 마지막은 단순한 흑백의 색채가 대비되며 나타났다. 누런 종이는 계연의 시선 속에서 완전한 하얀색으로 물들었고, 이내 그 중앙에는 검은색의 커다란 글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칙(勅)…….”

무의식적으로 글을 읊고 나니, 계연의 심장이 쿵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굉장히 옅은 빛이 반짝이더니, 누런 종이에 동시다발적으로 탄 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글을 어색하게 만들었던 단어들이 깡그리 사라지고, <정덕보공록>의 원문만 남게 되었다.

“허어…….”

계연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토지신의 책을 훼손한 건가?’

한쪽에 서 있던 토지신 또한 고이 모셔두었던 책을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보았다. 그가 화를 내거나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누런 종이에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문장의 처음과 끝을 잇는 기가 토지신에게 느껴졌다. 토지신이 다시금 종이를 살펴보니,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내용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덕보공록>……! 나도 보인다! 저도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토지신은 연신 읍을 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혔다. 계연이 아직 난처해하는 동안, 토지신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스레 인사를 올렸다.

정신을 차린 계연이 재빨리 손을 뻗어 토지신에게 누런 천록서를 돌려주었다.

“토지신, 제게 인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글이 보이는 건 토지신의 연분이니까요. 그런데, 저 때문에 천록서에 탄 자국이 남아 버렸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선생의 법력은 도가 텄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훼손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늙은이는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잔뜩 흥분한 토지신은 두 손으로 누런 종이를 건네받은 뒤, 계속해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계연도 타버린 부분은 본문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정덕보공록’의 기운을 건드린 것인지, 토지신 또한 천록서를 쉬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방금 그 기운이 제약하고 있던 게 이 책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계연의 심장이 또 한 번 움찔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자신의 천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현묘한 하늘의 중심이 반응하여, 그에게 믿기 어려운 것을 선사했다.

토지신은 어느새 수백 글자를 읽어내렸다. 그는 짧은 글만 읽어보아도 이것의 내용이 얼마나 비범한지 알 수 있었다. 죽어서 토지신이 된 그는 진정한 수행을 통해 산과 물의 신령이 된 자들과 달리, 촌락 사람들이 공양한 땅에 붙어살아야 했다. 조그만 조씨 집성촌에서 향촌 사람들이 올리는 향불은 겨우 신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죽어서 토지신이 되었기 때문에 수행으로 성과를 얻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덕보공록>은 죽어서 신이 된 자가 수행을 통해 산과 물의 신령이 되어가는 일련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책을 통해 이렇게 진정한 신령으로 변화하는 방법을 보고 나니, 일개 토지신인 그도 이상을 좇을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토지신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지만, 그는 이것이 얼마나 큰 경사이고, 자신이 얼마나 운 좋은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진정한 고인을 만나다니. 아마 다른 선문의 사람이라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토지신. 다소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 책이 어디서 나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좀 전까지 넋을 놓았던 고인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지자, 토지신은 배움의 충동을 잠시 억누른 채, 계연의 질문에 정중히 대답했다.

“선생, 이것은 이 늙은이가 생전에 밭을 가꿀 때 발견한 것입니다. 당시 책에 흙 한 톨 묻지 않았고 종이가 귀하던 터라,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후에 책을 놔둔 장소를 잊어버렸지만, 굳이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죠. 한참이 흘러 이 늙은이가 토지신이 되고 난 뒤, 이 누런 종이책이 토지신당의 지하 속에서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보아하니, 토지신과 인연이 있는 물건이 확실하군요. 사실 이 책의 제약이 희한했습니다. 토지신께서 직접 제약을 풀어내시는 것만으로도 비범한 뜻이 토지신께 전달되었을 텐데, 괜히 저만 덕을 보았네요.”

노골적으로 자신이 그 책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기가 꺼려졌던 계연은, 그저 짧게 언급했다.

“이 늙은이는 알고 있습니다. 선생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몇 년이 지나도 이 책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토지신은 계연이 겸손을 떤다고 생각했다. 정말 책으로 인해 고인이 덕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고인에게는 그저 이런 책이 한낱 재밋거리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책에 적힌 법결이었으니 말이다.

계연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토지신이 얻은 물건은 죽어서 신이 된 자에겐 충분히 특별한 물건이었다. 거기에 연분까지 더해진다면, 아무리 토지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까닭을 설명할 순 없었지만, 계연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그가 토지신에게 정중히 경고했다.

“이 책의 유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것을 남에게 보여주어선 안 됩니다. 이것으로 법결을 얻어 성과가 있더라도, 토지신의 초심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오늘의 행동으로 인해 뒤탈이 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계연의 말투에 토지신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적잖은 부담감까지 느껴졌다.

눈앞의 선생이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말은 이런 의미로 토지신에게 다가왔다.

‘오늘 내가 당신을 도와주었지만, 당신이 함부로 법결을 휘두른다면 내 손으로 당신을 처단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조씨 집성촌의 토지신 조덕(趙德),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겠나이다.”

그의 경고를 등한시할 수 없었던 토지신 조덕(趙德)은 또 한 번 정중하게 읍을 했다. 토지신이 한참 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자, 계연도 하는 수 없이 읍하며 답례를 건네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바둑돌이 둘 사이에서 반짝이다 사라졌다.

‘왜 정덕보공록을 건네줄 때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계연은 또다시 깊은 고뇌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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