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0화 (80/892)

80화. 눌리지 않는 기운

다박사가 떠나자, 계연은 제 앞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꾼이 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야기꾼은 한 장군이 이름을 날리게 된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적군은 수백 개의 뗏목을 타고 쫓아와, 아군이 약점을 잡히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 속에서 100명의 군인을 이끌던 황 장군은 좋은 수를 떠올리게 되죠. 황 장군은 본영에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수하의 정찰병을 여러 조로 나누어 인근 숲에 배치하였습니다…….”

이야기꾼은 부채를 내려놓고 찻잔을 들어 잠시 목을 축였다. 그가 손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던 그때, 참을성 없는 손님 하나가 다급히 물었다.

“설마 황 장군이 고작 병사 100명으로 적군을 격퇴한 거요?”

“아이 끼어들지 마세요!”

“맞아요. 선생이 이야기하게 조용히 계세요!”

이야기꾼이 찻잔을 내려놓고 부채를 들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조용해졌다. 덕분에 계연은 이곳에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황 장군에겐 병사가 몇 없었습니다. 고작 그 정도 병력으로 적군에 대항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죠. 그러나 장군은 지혜와 계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숲에 불이 붙을 만한 마른 장작을 모으라고 한 뒤, 수주의 병력을 이용해 숲속의 새들을 모두 내쫓았죠!”

이야기꾼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을 건너오는 적군 또한 이름 없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강을 반쯤 건넌 그들은 맞은편 물가의 새들이 놀라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상한 기색을 느끼자마자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적군은 뗏목 열댓 개를 먼저 보내 주변을 탐색하기로 했죠. 바로 그때…….”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가 딱따기를 세게 부딪혀 ‘탁’ 하는 소리를 내자, 이야기를 듣던 손님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황 장군은 준비해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순식간에 숲에는 시커먼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죠…….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적군은 놀라 아연실색하였습니다. 매복이 들킨 것을 알아차린 그는 속히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수십 개의 뗏목에 타고 있던 병사 중 여럿은 연기를 보고 겁에 질려 물에 뛰어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꾼은 다채로운 말들로 당시 치열했던 전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황 장군의 계략과 용감무쌍함이 이야기를 통해 재연되었고, 다루를 찾은 손님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계연 또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꾼의 얘기는 예술이 따로 없었다!

이야기꾼은 시간이 흘러 이야기를 마쳤다.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계연과 주변의 호쾌한 손님들처럼 시원하게 돈을 건네는 사람도 많았다. 다루에서도 이야기꾼에게 정해진 비용을 지급하였으니, 이야기꾼의 수익도 썩 괜찮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인 ‘동산(東山) 전투’는 잠시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야기꾼은 잠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계연은 식탁에 차려진 과자를 모두 한 접시에 옮겨 담은 뒤, 찻주전자를 들고 이야기꾼에게 다가갔다.

“선생, 잠시 담소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다과를 들고 찾아온 고상한 행색의 계연을 본 이야기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지요!”

계연은 탁자에 다과를 내려놓고, 새 잔을 가져와 이야기꾼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드세요! 과자도 마음껏 드시고요!”

그는 냄새만 맡아도 다루에서 이야기꾼에게 오래 묵은 차를 제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주문한 차가 수십 수백 배는 더 좋을 것이다.

이야기꾼은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달콤한 떡 하나를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선생,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다름이 아니라, 선생에게 균천부의 좌씨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수십 년 전,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그 좌씨 가문 말입니다. 좌광도의 후손들이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이야기꾼이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를 아래위로 자세히 훑어보니, 소매통이 넓은 푸른 장포에 나무 비녀로 단정히 올려 묶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게다가 몸과 손은 굉장히 가늘었다.

“선생께서는 강호의 협객이신가요?”

“하하. 강호와 인연이 있긴 하지만, 강호의 협객은 아니에요. 단지 좌씨 가문의 선조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셔서, 특별히 그의 후손을 만나러 온 거였어요.”

‘좌씨 가문의 선조?’

이야기꾼이 다시금 인상을 찡그리며 계연을 자세히 헤아려 보았다. 이야기꾼은 황당하게도 상대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계연이 살며시 뜬 눈이 창백한 하얀색이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꾼은 이만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은 자가 진정한 강호의 고수일지도 몰랐다. 더구나 좌씨 가문이야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 않은가.

“좌씨 가문이 한때는 명성을 널리 떨쳤는데, 이제는 그들에 대해 아는 사람도 몇 없어요. 안타깝게도 좌검선은 검에 홀려 버렸고, 사후 남겨진 검의첩은 강호에 피바람을 불어 일으켰죠. 좌씨 가문도 큰 재앙을 입었어요. 이 모든 것을 예측한 좌구 대협은 미래를 대비했지만, 좌씨 가문은 재앙을 벗어날 수가 없었죠…….”

일각(*一刻: 약 15분) 정도가 흐르고, 계연은 다루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성 서편에 있는 좌씨 가문의 가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장 두 시간(*二時辰: 약 4시간)을 들여 찾아간 그곳은 대문에도 써 붙여져 있듯 ‘전(錢) 씨 가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도 좌씨 가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날이 차차 어두워지자, 거리에 발길이 끊기고 점포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하지만 계연은 여전히 홀로 성의 서편을 배회했다.

“설마 좌씨 가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건 아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환한 불빛이 반짝이는 전방에서 떠들썩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여러 기루(妓樓)가 모여있는 그곳에 ‘賭(도)’ 자가 새겨진 등롱을 매달은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전방의 도박장 입구에서 들려왔다.

“잠깐만, 금방 올게! 금방 다녀올게!”

“낼 돈도 없으면 안 되지, 하하하!”

“그 정도는 있으니, 기다리고 있어!”

대낮에 취병을 팔던 행상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도박장을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씩씩했지만, 그의 머리 위에 일렁이던 기상은 낮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드러내었다.

“안타깝네. 저 기운이 눌리질 않는구나!”

살며시 고개를 젓던 계연은 이내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칙령’ 법을 얻은 이후로, 계연은 근본을 해치지 않는 상태에서 ‘법령’을 문필로 남길 수 있었다. 그의 법령이 그리 대단하진 않았지만, 신비롭다고는 할 수 있었다.

통명책에선 ‘법령’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도행을 이루지 못한 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연 또한 우연찮은 기회로 법령을 얻었으나, 법령의 효과가 얼마나 훌륭할지는 아직 섣불리 단언할 수 없었다.

취병을 팔던 행상인이 땀에 절어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귀한 글씨를 잘 표구한 문구점 주인은 계연이 적은 글씨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모사를 했다.

* * *

한편, 점주의 가옥 밖을 지나치던 저승의 야간 순시관은 가옥에서 어슴푸레 새어 나오는 기운을 발견했다. 그 기운으로 인해 컴컴한 밤인데도 가옥의 형체가 매우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순시관은 보통 2인 1조로 업무를 보았다. 성황당이 얼마나 세가 강한지와 지역의 성황신의 도행이 얼마나 깊고 법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각 지역의 순시관들은 간단하게는 좌우 순시관으로 직책이 나뉘었다.

조금 복잡하게는 이곳 균천부처럼 주간과 야간 순시관을 각각 좌우, 그리고 정부로 나누어 총 여덟 명의 순시관을 두었다.

문구점 주인의 집 앞을 지나던 자들은 다름 아닌 좌우 부순시관들이었다. 가옥에서 이상할 정도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그것이 악한 기운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누가 살지? 아무래도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악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같이 들어가 보자고!”

두 순시관이 음산한 바람을 일으키며 벽을 스르륵 통과했다. 썩 괜찮은 저택에 들어온 그들은 주인집 서재 앞으로 향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서재의 문과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두 저승사자는 창문 너머 편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를 발견했다. 서탁에 바짝 엎드린 채 붓으로 글을 쓰고 있는 그는 문구점의 주인 방숙(龐肅)이였다.

이곳까지 왔지만,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번쩍이던 빛줄기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두 순시관이 서재 안으로 발을 들인 그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물결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그들이 입고 있는 저승사자복의 음기가 한층 흐릿해졌다. 그들은 천천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그것은 매우 옅은 감각이었지만, 기민한 두 순시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붓을 휘두르는 자에게 다가갔다. 서탁에 펼쳐진 글에서 모호하고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종이에 적힌 ‘사불승정’ 네 글자는 상당히 광명정대한 느낌을 안겨주어, 순시관들은 글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도행이 있으면 글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글을 쓴 자의 도행 정도를 헤아리기는 어려웠지만, 마음의 경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두 순시관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뒷걸음치던 그들은 놀랍게도 서탁 위의 글을 향해 가볍게 공수를 한 다음, 서재를 벗어났다.

그들이 떠나고 계연의 글을 모사하던 문구점 주인은 뒤늦게 반응하며 저도 모르게 문밖을 확인했다.

“어라? 조금 선선해지는 것 같더니, 금세 또 바람이 멈췄네…….”

계연의 글이 이곳에 있으니, 저승사자가 가까이 다가와도 문구점 주인은 음산한 기운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공기는 무더위를 식혀줄 정도로 적당히 시원해졌다.

* * *

균천부 서쪽 성.

계연은 여전히 홀로 거리를 배회했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지고, 하늘에는 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쪽 하늘에 붉은 석양빛이 남아있었지만, 머리 위에는 반짝이는 별빛이 가득했다.

요즘 해가 길어져서 그렇지, 벌써 늦은 시간이었다. 계연이 도박장 밖에서 취병을 파는 행상인을 발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거리를 오가는 행인이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

오늘은 매우 태평한 날이고, 균천부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저녁이 되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계연은 보따리에서 술 단지 하나를 꺼냈다. 지난번 춘혜부에서 천일춘을 살 때 얻은 그 단지였다. 다만 지금 이 단지에는 균천부 평범한 주루에서 한 근에 20문을 주고 산 감람주(橄欖酒)가 담겨 있었다.

붉은 헝겊을 벗기고 나무 마개를 빼낸 뒤, 계연은 단지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는 멀리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그는 우선 객잔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다시 좌씨 가문의 후손을 찾아보거나, 수도 관아에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만약 끝까지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면,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서라도 특별한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균천부에서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점포는 기루와 도박장, 그리고 일부 객잔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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