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검선
잠시 침묵하던 계연이 갑자기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그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중저음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시 좌씨 일가가 언씨 가문과 그리 친하게 지냈던 거군요. 벌써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좌씨 가문의 혈통을 보호하다니, 정말 존경스러워요!”
애매모호한 말을 마친 계연이 주위를 에워싼 언씨 가문의 철공들을 향해 차례대로 정중히 읍했다. 언씨 철공들은 이에 경악하면서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명성이나 이익을 좇는 강호의 무인이 아닙니다. 좌씨 일가로부터 무언가를 갈취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웃으며 말하던 계연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남을 무시하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선자’인 척하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잠시 후, 계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평범한 인간의 무예는 제게 큰 의미가 없어요. 단지 늦게나마 좌리에게 설명을 해주고자 그의 후손을 찾아온 겁니다.”
계연의 입에서 다소 아득하고 의심스러운 말이 나오자, 탁자 위의 넝쿨검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붕 떠올라 계연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침내 칼은 아래를 내려다보듯 계연의 앞에 멈추었다.
우우웅-.
검신은 연신 소리를 울리며 밝은 빛을 드러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장검의 심정을 대변하듯, 높낮이에 기복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지를 꽉 부여잡았다. 모두가 숨을 꾹 참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검선……!’
계연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신령스러운 것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언씨 철공소의 모든 철공은 똘똘 뭉쳐 적개심을 불태웠고, 계연을 좌씨의 혈통을 끊으려고 하는 강호의 반역자로 여겼다.
철공들이 생각하기에 어쩌면 이는 섣부른 판단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좌씨 일가를 보호하는 최고의 방법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상대에게 좌씨 가문이 모두 죽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언씨 상점의 철공들은 겉으로 좌씨 가문을 비난하며, 심지어 좌씨 가문이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문제는, 계연은 좌리의 덕택을 본 강호인일 뿐만 아니라 법안(法眼)으로 사람의 기운을 보는 수선자라는 사실이었다.
계연은 비록 기운만으로는 저들의 말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저들이 진심으로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철공들의 기상 또한 이상하리만큼 똑같이 변했다.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좌씨 가문에 불이익을 끼치지 않을 겁니다’라는 외부인의 말을 믿고 좌씨 가문 후손의 일을 술술 털어놓았다면, 좌씨 가문은 일찍이 사라져 버렸을 터였다.
이러니 현재로서 계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를 아주 절대적인 높이까지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좌씨 가문의 이익에 눈독 들일 리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까지 말이다.
선인, 선인이야 말로 그 위치에 부합하는 존재이지 않겠는가!
선검이 움직이자, 주변 사람들은 일찍이 숨소리를 죽였다. 그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중년의 철공은 침을 꼴딱 삼킨 뒤, 다소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손님, 손님이 바로 좌 선협…… 아니, 좌리가 생전에 찾던 그 선인이십니까?”
당시 무림을 장악한 좌리는 노년이 되어서도 이미 정상에 오른 지위를 돌파하고 싶어 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지만, 대부분 허망한 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오직 선인을 찾고 귀신이 되는 일념만을 품었다.
“선인이라…….”
계연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선자라고 할 수 있죠.”
계연이 휙 손짓을 하자, 넝쿨검이 천천히 탁자 위로 날아와 차분히 내려앉았다. 중년의 철공과 주변의 늙은 철공을 둘러본 그는 술법을 부리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우물처럼 잔잔한 자신의 희뿌연 눈동자를 드러냈다.
“좌씨 가문의 후손은 아직 살아있나요? 만약 그들이 정말 죽어 버렸다면, 전 이만 균천부를 떠나야겠군요. 아마 다음에 저를 찾으실 때쯤엔, 전 이미 제2의 좌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탄식 섞인 목소리로 그가 내뱉은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공상을 하게 했다. 이번에는 그들 중 누구도 그의 말을 허풍으로 여기지 않았다.
계연은 일부러 사람들이 지난 일을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 당시 좌리는 정말 선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는 무공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천하무적의 인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좌리가 노년이 되어 다시 선인을 찾으려 하였을 때, 선인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때의 한을 묻고 지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선인이 찾아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이다!
사람들은 ‘단지 늦게나마 좌리에게 설명을 해주고자 그러는 것’이라던 계연의 말을 떠올렸다.
철공들 사이에 있던 두 사람이 파르르 떨리는 호흡으로 희뿌연 눈을 한 ‘선인’을 바라보았다. 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바지를 붙잡은 그들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늙은 철공 하나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선, 마침내 계연이 기대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선장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좌씨 일가의 후손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천(佑天), 우심(佑心), 앞으로 나와 선장을 뵙거라. 언화(言華), 너는 가서 옥랑(玉娘)과 박연(博然) 부부를 모셔와!”
계연의 옆에 웃통을 벗고 서 있던 중년의 철공이 마음을 가다듬은 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좌씨 가문의 후손이 적지 않은 듯했다.
* * *
반 각 정도 지나자, 철공소에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철공소 뒤편에 위치한 정청에서 계연은 드디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좌씨 일가와 마주했다. 현재 그들은 모두 언씨 성을 따르고 있었다.
쉰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 한 쌍, 서른 정도로 보이는 사내와 스물 정도로 보이는 사내, 그리고 그들의 처로 보이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열여덟 살의 여인, 긴장했지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제 어미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와 세 살배기 여자아이는 모두 서른 살 사내의 자식이었다.
그 밖에도 젊은 부인의 처가 식구들 또한 모두 정청 밖에 모여 있었다.
계연과 연배가 가장 많아 보이는 늙은 철공은, 정청에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탁자에는 뜨끈한 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계 선생, 이들이 좌씨 가문의 남은 후손들입니다. 물론 어딘가에 혈통을 이어받은 사생아가 있을 지도 모르지요. 당시 가문 안팎이 혼란스러웠고 가문에 큰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그들 중 한두 사람이라도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계연은 선장이라는 호칭보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에 더 익숙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호칭을 바로 잡아달라며 타일렀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선인이 속세의 놀이를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계연의 흐릿한 시선이 정청 앞에 묵묵히 일렬로 서 있는 좌씨 가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보아하니 이 자리에 오기까지 크나큰 부담을 겪은 듯했다.
좌씨 일가는 그 희뿌연 시선을 감히 마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예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네. 뭐,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몰라.’
계연이 휙 손짓하자, 탁자에 올려져 있던 넝쿨검이 휘리릭 날아와 좌씨 일가 앞에 멈춰 섰다.
“좌씨 혈통을 가진 자라면, 이 칼자루를 만져 보세요. 그래야 당신들이 진짜 좌씨 가문의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계연에게도 대책이 있었다. 장검 청영은 수십 년간 좌리를 따랐고, 노년에는 심지어 영성을 잉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좌씨 혈통에 특별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누군가 감히 좌씨 일가를 사칭하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서 바로 들통날 것이다.
그들이 차례대로 넝쿨검에 손을 대자, 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이로써 그들이 진정한 좌리의 후손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편, 계연은 그들에게 <좌리검전>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돌연 망설여졌다.
‘비록 성씨를 감추고 숨어 지내지만, 생활이 안정을 찾은 만큼 이 절세 비급을 손에 얻으면 그들이 다시금 강호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성씨를 바꾸어 이제는 언박연이라고 이름을 바꾼 노인은, 좌씨 가문의 웃어른이었다. 그가 감격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쓸어내린 뒤,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었다.
“선장…… 아니, 선생님. 이건 저희 할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비결서 <좌리검전>입니다. 선장께서 확인해 보시지요! 저희 좌씨 가문은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정도의 재앙을 맞아야 했습니다. 다만, 오래전 저희 집안 어르신께서는 이것을 통해 세상 제일의 검법을 익혀 복수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지켜야 한다고 하셨죠. 그러나 이 늙은이를 비롯한 후손들은 조부님과 같은 재능이 없었습니다. 이제 저희 중 누구도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강호에선 좌광도가 절세 비급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아, 좌씨 가문이 몰락한 것이라고 이야기가 돌았다. 심지어 당시 좌씨 가문마저도 그것이 몰락의 까닭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좌리가 아무리 선인을 찾는 데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양심이 없는 자는 아니었다. 그가 제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진실은 이러했다. 좌리는 후대에 비급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좌씨 가문의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좌리는 한 사람뿐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공일지라도 누가 수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결국 좌씨 가문은 더 이상 고수를 배출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가문이 몰락하고 가족이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좌씨 가문의 사람들의 분노는 상당했다. 다른 이들에게 잡아 먹힐 지경이 되었으니,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다. 중간에 발생한 일련의 복잡한 일들로 결국에는 이리되었지만 말이다.
계연은 그들이 건넨 비급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얼핏 보아도 이것은 좌리가 직접 쓴 책이 아니었기에, 굳이 가지고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글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계연은 책장을 넘기며 대충 내용을 훑었다. 책자의 두께와 기술된 양은 원본과 비슷했고, 안에 그려진 삽화 또한 잘 보이진 않지만,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좌리가 비급까지 남긴 마당에, 비급의 내용으로 후손을 음해하진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면 정말 다들 미쳐 버렸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