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좌씨 가문의 예기
“그럼, 다들 결정하셨나요?”
박연이 한 발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히며 읍하였다.
“선생님,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박연, 자네……!”
옆에 있던 언씨 노인이 박연의 말에 버럭 화를 내자, 박연이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진정하세요. 곧 결정할 겁니다…….”
이윽고 박연은 다시 한번 계연을 향해 물었다.
“계 선생님.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께 답을 묻고 싶습니다.”
“말하세요.”
계연은 평정을 유지했다. 만약 그들이 고민할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허락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일은 좌씨 가문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시 조부님의 무예는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겁니까, 혹은 조부님 스스로 타고나신 겁니까?”
그 질문에 계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평온하게 대답했다.
“좌리는 타고난 재주가 뛰어난 자이니, 당연히 스스로 타고난 것이지요!”
계연의 대답에 박연은 두 아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곧이어 그는 계연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훗날 저희 가문이 원래의 성씨를 잊지만 않는다면, 좌씨 성을 언젠가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첫 번째를 택하겠습니다!”
계연은 웃으며 좌씨 일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만스러워하던 두 청년은 아버지의 말에 망설임을 멈추었다. 옥랑 또한 그러했다.
“역시…… 예기가 돌아왔군요!”
계연의 칭찬은 오묘하면서도, 의미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계연은 탁자에 놓인 붓에 먹물을 묻힌 뒤, 선지(宣紙)에 법령을 적었다. 이후 그가 온 힘을 다해 법령을 휘두르자,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안녕과 평강이 자리한 이곳은 어떤 사악함도 침범하지 못하나니, 포부를 안고 나아가면 노력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으리다! 좌씨 가문의 후손에게 연분을 주겠노라!》
크고 작은 글씨들이 한 획에 쓰였다. 중간에 붓에 먹을 묻히느라 선지에 튄 먹물 자국까지 어우러져, 계연의 필체는 보는 이들에게 실로 벅찬 감정을 안겨주었다.
법령이 완성되자, 빛 한 줄기가 종이 위에서 번쩍이다 사라졌다. 그 순간, 현기증을 느낀 계연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였다. 가볍게 숨을 고른 계연이 목을 쭉 내밀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법령을 좌씨 가문의 후손들께 드리죠. 이 법령은 다른 사람이 훔쳐 가도 소용이 없고, 좌씨 가문의 혈통이 끊기면 스스로 사라질 겁니다!”
우르르!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기분이 매우 좋았던 계연에겐 아직 이들을 위한 선물이 남아있었다.
“하하하……! 다들 잘 보세요!”
계연은 붓을 내려놓고 마치 희뿌연 연기처럼 단숨에 정청 밖으로 나갔다. 그가 휘릭 손짓하자, 넝쿨검이 스스로 날아 그의 손에 쥐어졌다.
“눈 감으시면 안 돼요!”
농을 한마디 던진 계연은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정청 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의 형체는 마치 환상 같았고, 경신술은 마치 취한 것 같았으며, 넝쿨검은 마치 푸른 비단처럼 계연의 손에서 빛을 그려내었다.
솨아아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빗방울은, 계연의 주변에서 춤추는 넝쿨검에 의해 사방으로 흘러갔다.
‘유룡송우무(游龍送雨舞)’를 따라 요동치던 한 마리의 용은 유유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정청 안의 좌씨 일가와 언씨 노인은 빳빳하게 얼어붙은 채, 빗속에서 검무를 추는 선인을 바라보았다. 차마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못하던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는 사이, 푸른 장포를 입은 계연은 검무를 추었다. 장포의 소매는 넓었지만, 이는 칼을 휘두르는 동작에 방해가 되긴커녕, 외려 멋들어진 자태를 한껏 돋보이게끔 했다. 과히 부드럽지도, 과히 경직되지도 않은 동작이 이어졌다.
규칙과 틀에 박힌 검술에서 벗어난 듯이 움직이던 칼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무수한 실선으로 만들어 내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니, 날카로운 칼도 계연의 마음과 의식을 따라 움직였다.
모든 빗방울이 칼이 되었고, 칼의 움직임이 비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보던 이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검무를 끝마친 계연은 소매를 펄럭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 순간 빗방울이 계연의 주변을 둥글게 회전하더니, 그의 다리 아래에 고리 모양으로 10척(*약 3m) 폭의 물결을 만들고는 이내 천천히 바닥에 고인 빗물 속으로 흘러가 사라졌다.
칼은 멈추었지만, 떨어지는 빗물은 여전히 계연을 피해 떨어졌다.
계연은 건물 안 좌씨 일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유룡신의(游龍神意)라는 겁니다. 틀도 형식도 없어, 천하의 모든 무도와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지는 당신들에게 달렸죠.”
그 말을 끝으로, 계연은 빗물을 뚫고 사람들에게로 걸어왔다. 다시금 그가 정청에 들어섰을 때, 계연의 몸과 옷에는 빗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이왕 사람들에게 선도의 고인으로 여겨지는 김에, 끝까지 고매한 자태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좌씨 일가와 언씨 노인은 여전히 선인의 오묘하고 비상한 검무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들은 마치 빗속에서 검무를 추는 환영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정청 밖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고,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박연이었다. 곧이어 우천과 우심을 비롯한 사람들이 차례대로 정신을 번뜩 차렸다. 두 아이는 계속해서 멍한 얼굴로 밖을 주시하였다. 좌씨 일가 중 누구도 입술을 떼지 못했다. 두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에게 칭얼대기 시작한 뒤에야, 좌씨 일가와 언씨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연은 탁자 앞에 앉아 자연스레 차를 마시고, 주전자를 들어 텅 빈 찻잔을 채우기도 하였다. 좌씨 일가가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계연이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언씨 노인의 난처한 표정을 본 계연이 다급히 말했다.
“어르신,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좌씨 가문의 것을 뺏으신 것도 아니고, 저도 개의치 않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이만 앉아서 차를 드시지요.”
“선생의 검무를 본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언씨 노인은 붉어진 얼굴로 공수한 뒤에야, 제 의자에 앉았다. 그는 황급히 차를 들이마시며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사실 선인의 검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좌씨 일가보다 언씨 노인이 더 잘 알았다.
비록 언씨 철공소가 무기 제련 사업을 접은 지 오래되었지만, 언씨 노인이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곳 철공소에선 칼을 제작하곤 했었다. 그렇기에 언씨 노인은 검법에 대한 견해가 상당했다.
노인은 그저 속으로 탄식하였다.
‘저리 신묘한 검의 경지는 속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데!’
좌씨 일가는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조금 전 빗속의 장면을 곱씹고 있었다. 계연의 동작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전율만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잠시 후, 정청에 나란히 선 좌씨 일가는 박연을 따라 90도로 계연에게 인사를 건네며 읍하였다. 두 아이도 부모님을 따라 두 손을 모았다.
“선생님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 균천부 좌씨 일가는 선생님의 선위(仙位)를 대대손손 모시겠습니다!”
박연은 여전히 옹골찬 목소리로 정중하고도 엄숙하게 말하였다.
그 말에 계연은 당황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계연은 그들이 생사당을 세워 자신을 향해 절하는 것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됐어요. 당신들에겐 이미 끝난 일일지 몰라도, 저에겐 아니에요. 균천부 부도(府都)의 성황신이 어떤 분이실지도 모르고 말이죠!”
계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미 입 밖에 뱉은 일이니, 어찌 되었든 약속한 바를 이행해야 했다.
사실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성황신을 만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아무 판관이나 한 번 만나서 좌씨 일가의 사정을 봐달라고 말하면, 균천부 부도(府都)의 성황당에서 계연의 편의를 봐줄지도 몰랐다.
원칙을 거슬러 이곳 성황당에 간사한 자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은 착한 귀신이지 않은가. 계연이라는 수선자가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는데, 그 누가 선심을 쓰지 않겠는가. 원칙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성황당에서도 충분히 개인적인 인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는 계연이 멋대로 추측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외도전>에 적힌 내용과 계연이 접한 몇몇 성황당의 체계를 고려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물론 성격이 고약한 기관장이나 성황신을 맞닥뜨린다면 큰일이겠지만 말이다.
다만 계연은 우선 이 일을 고민하지 않기로 하였다.
눈을 게슴츠레 뜬 그는 탁자 위 놓인 선지를 보며 좌씨 일가에게 말했다.
“이만 법령을 가져가세요.”
한 가문의 가장으로서 박연이 정중하게 걸어 나와, 탁자 위에 놓인 법령을 쥐어 들려고 두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계연이 손을 뻗어 법령을 붙잡았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만약 좌씨 가문이 안정적인 생활만을 추구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법령이 만능은 아니지만, 모든 좋고 나쁜 것은 사람이 자초하는 것이니까요. 훗날 진정 강호에 발을 들이고 싶다면, 올곧은 협심(俠心)을 계승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법령이 홀로 소멸할 테니 말이죠!”
계연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정청 안의 누구도 부담스러운 그 말에 대고 함부로 농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박연이 대답을 마치자, 뒤에 서 있던 좌씨 가문의 사람들이 빠르게 읍하며 결연한 마음을 전하였다.
계연이 손을 떼기가 무섭게,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박연이 두 손으로 법령을 잡아 들었다. 곧이어, 계연의 오른팔 소매 속에서 바둑돌의 환영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계연은 속으로 외쳤다.
‘역시……!’
박연이 서첩을 들고 조심스레 제자리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고개를 쭉 내밀어 계연이 적은 법령을 구경했다. 그 순간, 계연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가 수염을 쓸어내리는 언씨 노인을 보고 물었다.
“어르신, 제 칼집은요?”
“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계연과 탁자에 놓인 넝쿨검을 번갈아 쳐다보던 언씨 노인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생각했다.
‘칼집 제작을 의뢰한 게 진심이었나?’
“하하하하……. 천천히 하셔도 돼요. 며칠 뒤에 다시 찾으러 오도록 하죠. 소박한 칼집 하나이니, 금방 완성되겠죠?”
“그럼요, 물론이지요! 선생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잘 준비해 놓겠습니다!”
언씨 노인은 황급히 장담하고선, 고개를 숙인 채 어떤 목재를 사용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그는 스무 종에 달하는 칼집을 제작한 다음, 선인에게 그중 하나를 고르게 하기로 정했다.
언씨 노인이 이것을 설명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 계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텅 빈 찻잔만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편, 좌씨 일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신기한 듯 서첩만을 구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