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거안소각에서의 술 취한 밤
또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학자 차림의 늙은 서생이 서당 문을 두드렸다.
윤재성은 품에 책을 안고 공수한 뒤, 노인을 서당 안으로 안내했다.
“주(週) 훈장님! 어서 안으로 오시지요!
“윤 훈장!”
공수하며 답례를 건넨 주 훈장은 걸음을 옮겨 윤재성의 옆에 멈춰 섰다. 그는 서당을 가득 채운 예순에서 일흔 명가량의 학동들을 바라보았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쪽은 현의 주 훈장님이시다. 내가 물러나면, 주 훈장님께서 임시로 너희들을 가르치실 거야. 자, 다들 주 훈장님께 인사하거라!”
윤재성의 말에 학동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 훈장을 향해 읍을 하며, 정성 어린 목소리를 모아 인사를 건네었다.
“주 훈장님, 안녕하십니까!”
주 훈장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동들은 썩 괜찮은 첫인상을 남긴 듯했다.
어느덧 서당이 마칠 시간이 되었다. 서당 정원에 선 윤재성은 학동들에게 쓴 서신을 하나하나 나눠주며, 세심한 당부의 말도 덧붙였다.
이를 지켜보던 주 훈장은 사제지간의 정에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 또한 여러 해 동안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그와 깊은 유대감을 지닌 학동은 고작 몇에 불과했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윤재성과 윤청은 집으로 향했다. 윤청은 줄곧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천우방 오솔길에 들어선 뒤에야 멀리 거안소각을 본 윤청이 말했다.
“아버지, 대추가 열렸어요!”
고개를 들자, 거안소각 정원 나무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러네, 올해 대추도 실하겠구나!”
윤재성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요. 계 선생께서 떠나신 후로 2년 동안 대추나무에 꽃도 열매도 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올해는 어쩐 일로 열매가 열린 걸까요?”
윤청이 헤헤 웃음을 흘렸다.
“아마 아버지께서 해시를 치르신다는 걸 알고, 올해엔 특별히 열매를 맺었나 봐요! 어쨌든 덕분에 맛있는 대추를 또 먹어 보겠네요!”
“요것이!”
부자는 웃고 떠들며 걸음을 옮겼다. 거안소각을 지나던 그들은 소담스러운 대추를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대추 열매의 달콤한 향이 맡아지는 것 같았다.
윤청의 말이 환기를 시켜준 덕분일 수도 있고, 부자의 흥취가 올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황급히 저녁 식사를 마친 부자는 거안소각의 열쇠를 챙겨 들어 대추를 따 먹으러 향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윤재성이 열쇠를 구멍에 넣고 조심스럽게 거안소각의 대문을 열었다.
끼익—.
걸쇠가 돌아가며 소리가 났다. 문을 연 부자는 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놀라고야 말았다. 정원에 누군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자는 계연이 아니었다. 둥근 옷깃에 소매가 긴 겉옷을 두른 노인이 고개를 들어 대추나무를 보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자, 그가 윤씨 부자를 바라보았다.
“노인장께서는 누구십니까? 왜 거안소각에 계시는 거죠?”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은 윤재성이 무심코 거안소각의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그 높이는 노인이 거뜬히 넘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강호의 협객인가?’
윤씨 부자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노인이 환히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바로 계 선생의 벗이로군요? 훈장님의 존함을 여쭈어도 괜찮소?”
“계 선생님을 아십니까?”
윤청이 아버지보다 먼저 놀라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입에서 계연의 이름이 나오자, 윤재성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공수하며 대답했다.
“저는 윤재성, 이쪽은 제 아들 윤청입니다. 선생의 존함과 어디에서 계 선생을 마주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윤재성을 슬쩍 살피던 노인이 똑같이 공수하며 답례했다.
“제 성은 응(應), 이름은 굉(宏), 이웃 현에서 비를 피하다 계 선생을 마주쳤소. 저 또한 계 선생의 벗이외다!”
노인의 행동은 태연했고, 겉모습은 더욱이 도둑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계 선생님의 친구라고 하니, 윤 훈장은 다소 흥분에 찬 걸음을 옮겼다.
“계 선생님의 벗이셨군요. 안타깝게도 계 선생님께서 아직 안 돌아오셔서, 선생을 만나 뵙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윤재성이 웃으며 설명했다.
“아, 그런 알고 있소…….”
생긋 웃은 노인의 눈은 줄곧 대추나무를 향해 있었다.
“2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었는데, 드디어 대추나무에 열매가 맺혔구려! 지난번 계 선생이 대추를 고작 두 개 밖에 안 줘서, 턱없이 부족했단 말이오!”
“예?”
윤재성이 수상쩍다는 듯 물었다.
‘이 사람은 2년 동안 이곳을 찾아온 건가? 한데 왜 이렇게 낯선 걸까? 설마 매번 몰래 들어왔다가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돌아갔던 건가?’
다만 대추를 먹고 싶어 하는 노인의 마음은 무척이나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대추는 한 번 먹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맛을 지녔으니 말이다.
이에 윤재성이 웃으며 말했다.
“계 선생님께서 길에 나서기 전 대추를 조금만 챙겨 가셨나 보군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때마침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으니, 어르신, 마음껏 드시지요!”
계연은 떠나기 전, 윤재성에게 대추 열매를 나누어 먹으라고 당부했었다. 계연의 벗이 먼 길을 찾아 이곳까지 왔으니, 그와 나눠 먹어도 윤재성은 상관없었다.
그의 말에 맞은편에서 대추나무를 올려보던 노인이 눈을 번뜩였다. 그 순간, 정원에 우뚝 선 대추나무 가지가 또렷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얇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말이다.
“허허허……. 윤 훈장, 농도 참 잘하는구려. 이걸로 배가 찰 리 있소이까! 이리하겠소. 내 딱 한 입만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윤 훈장은 어찌 생각하오?”
“한 입이요?”
의아해하던 윤재성의 마음속에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계 선생의 벗이라는 이 사람도 속세의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걸까?’
“그렇소, 딱 한 입……! 괜찮겠소?”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맛만 볼 것이라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다.
“하하,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저도 계 선생님을 대신해 대추 열매를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어르신께선 계 선생님의 벗이시니, 드시고 싶은 만큼 마음껏 드셔야지요! 청아, 어르신께 열매를 따다 드려라.”
“네. 앗싸, 대추 따야지!”
한참 전부터 몸이 근질근질했던 윤청은 이제야 대추를 따도 된다는 말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바로 그때, 노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럴 필요 없소, 그럴 필요 없어!”
이윽고 고개를 올린 노인은 입을 쩍 벌리더니, 윤청의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하하하……! 대추 따야지! 크르릉!”
후우, 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용의 울음소리 속에서, 마당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대추나무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무수히 많은 대추가 바람에 휘날리며 노인의 커다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친 바람에 휘청거리던 윤재성과 윤청은 손으로 눈앞을 가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바람이 멎었다.
곧이어 윤 부자가 눈을 뜨니, 대추나무에 한가득 열려 있던 대추가 절반이나 사라진 상태였다. 다행히도 나뭇가지는 대부분 멀쩡했다.
다만 대추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쩝쩝…… 쩝쩝…….”
노인의 입에서 대추를 씹어 먹는 소리와 함께, 대추의 달콤한 향기가 주변에 퍼졌다.
“역시 맛있군, 맛있어. 정말 맛있어!”
윤재성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윤 훈장, 내가 말한 대로 딱 한 입만 먹었소. 오늘 일로 계 선생에게 나를 모함해선 안 되오. 으하하하하…….”
윤재성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애써 부여잡은 채, 노인을 향해 공수했다.
“물론이지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딱 한 입만 드신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저와 제 아들이 다소 놀랐지만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어르신께서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전 대추를 먹을 때, 윤재성을 자세히 관찰한 응굉은 윤재성에게서 공정하고 떳떳한 태도를 엿보았다. 윤재성의 목소리에선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그 말은 상당히 소탈했다.
응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현에 사는 계 선생의 유일한 벗이구려. 이 늙은이가 윤 훈장을 놀라게 하여 미안하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윤재성은 마음이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지만,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대추를 한가득 딴 그들은 돌탁자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담소의 주제는 계연을 알게 된 사건과 어떻게 그와 우정을 맺었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윤씨 부자는 서로 이야기를 덧붙이며 계연이 붉은 여우를 구한 것과 윤청이 함께 산으로 가 여우를 방생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노인은 환한 얼굴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노인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윤재성은 그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니, 그저 지금처럼 화목한 분위기로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이 한창 즐거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때, 응굉이 무언가 떠오른 듯 머리를 탁 치며 소리쳤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곧이어 그는 마치 마술을 부리듯, 등 뒤에서 목이 가느다란 술병과 도자기 잔 두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 늙은이가 계 선생에게 술을 대접하기로 하였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 선생을 찾을 수가 없어서, 대추가 열렸는지 확인하고 계 선생이 돌아왔는지 알아볼 겸 이곳을 찾은 것이오. 한데 윤 훈장과 이리 만났으니, 훈장이 계 선생을 대신하여 술을 맛보시는 건 어떻소?”
“당연히 좋습니다!”
윤재성은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건네었다.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계 선생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이 웃으며 잔에 술을 채웠다.
“받으시오!”
“어르신도 드시지요!”
두 사람은 각자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달콤한 향이 밴 짙은 술향기가 온 내장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몸속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윤재성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좋은…… 술입…….”
짧은 한마디도 끝마치지 못한 윤재성은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한쪽에서 맛있게 대추를 먹던 윤청이 잔뜩 당황한 채 노인과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노인이 아버지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르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 괜찮으신 거지요?”
“하하하……. 괜찮다, 괜찮아. 윤 훈장이 술에 약해 취한 것뿐이야!”
노인은 벌컥벌컥 술을 들이마시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집에 가서 네 아버지께 덮어드릴 모포를 가져오너라. 오늘 밤에는 아마 이곳에서 주무셔야 할 것이야! 어서, 어서……!”
윤청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윤청은 그대로 정원을 뛰어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윤청이 떠나자, 노인이 서서히 웃음을 거두었다. 또다시 술잔을 채운 그는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정원의 커다란 대추나무를 향했다.
“허허, 너도 한잔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대추나무 뿌리를 향해 술을 한 잔 흩뿌렸다. 흙 속으로 스며 들어간 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포를 챙긴 윤청이 걱정 가득한 어머니와 함께 거안소각에 도착했을 때, 정원에 있는 것은 탁자에 엎어져 있는 윤재성 한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