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90화 (90/892)

90화. 바둑판 위에서 흘러간 3년

정원에 들어선 윤재성의 아내는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엎드려있는 제 남편과 텅 빈 정원을 둘러보았다.

“청아, 조금 무서운 어르신이 아버지에게 취할 정도로 술을 먹였다고 하지 않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윤청이 정원 밖으로 뛰쳐나가 노인을 찾았다.

“가셨나 봐요…….”

윤재성의 아내가 남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니, 남편의 뺨에서 약간의 열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술 냄새는 전혀 나질 않았다.

“청아, 아버지를 집까지 모셔가야겠으니, 이 어미 좀 도와주렴.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별로 안 드셨어요. 딱 한 잔 마시고 쓰러지신걸요.”

윤청이 대문 밖에서 총총 달려오며 말했다. 윤청이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를 부축하려던 그때, 조금 전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린 윤청은 재빨리 어머니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안 돼. 그 어르신께서 아버지가 오늘 밤은 이곳에서 주무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냥 이곳에서 주무시게 두는 게 좋겠어요!”

윤재성에게 담요를 덮어준 윤청은 조심스레 담요를 여며주기까지 했다.

윤재성의 아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자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떡해. 곧 과거를 치르러 갈 분이신데, 병에 걸려서 일을 그르치면 큰일이잖니!”

“어머니! 하지만 그 어르신은…….”

윤청이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살피더니, 제 어머니 옆으로 바짝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 어르신은 계 선생님의 친구라고 하셨어요. 어쩌면…… 평범한 속세의 사람이 아니실지도 모르니, 그분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아이의 말에 윤재성의 아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계연이 기인이라는 이야기는 이삼 년 전 영안현에서 이웃끼리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다소 과장된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었지만, 윤재성의 가족들은 그 사실을 굳건히 믿어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오늘, 영안현에서 계 선생의 존재는 차차 잊혔다. 아마 그를 꾸준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간혹 윤재성에게 계연의 안부를 묻는 손씨 노점의 손 할아범이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윤재성의 가족들은 한순간도 계연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윤재성의 아내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남편을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럼 아버지를 밤새 이대로 놔두라는 것이야?”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밤에 변소를 오가며 자주 확인할게요!”

윤재성의 아내가 윤청의 이마를 콩 때린 뒤 허리를 짚고 섰다.

“아버지가 이리 취하셨는데 변소를 오가며 확인하면 쓰겠니? 속 쓰려 하실 수도 있으니까, 자정까지는 네가 찻물을 가져다가 아버지 앞을 지키고 있으렴. 새벽 동안은 내가 대신 보도록 하마. 알겠니?”

윤청이 이마를 문지르며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어요.”

어째서인지 어머니가 자신보다 아버지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한밤중이 되자, 이러한 생각은 윤청의 머릿속을 더욱더 강렬하게 휘저었다. 윤청이 깜빡 조는 사이에 자정을 알리는 야경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 퍼졌지만, 윤청의 모친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입추가 오지 않아, 날이 춥진 않았다. 하지만 돌탁자에 엎어져서 자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윤청은 결국 찻물을 따라 마시며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까지)을 알리는 경탁 소리가 울려 퍼지고, 드디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어머니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튿날 동틀 무렵.

“꼬끼오! 꼬꼬오오!”

천우방에 아침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재성이 자연스레 눈을 떴다.

제 몸을 덮은 담요를 발견한 그가 고개를 돌리자, 나란히 담요를 덮은 아내가 제 옆에 엎드려있었다. 이상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던 윤재성은 그제야 이곳이 거안소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탁자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도 놓여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왜 여기서 잤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윤재성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비범한 노인 하나가 자신을 계 선생의 벗이라고 칭하며 나무 가득 열린 대추를 단숨에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술까지 권했었다. 그 술을 받아마신 것을 끝으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윤재성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보았다.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던 대추가 절반이나 사라진 것을 보아하니, 그것이 꿈은 아니었다.

‘설마 내가 겨우 한잔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건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윤재성은 문득 대추나무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어라? 대추가 붉어졌네?”

가지에 듬성듬성 달려있던 대추는 벌써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띠며, 초록빛의 나무 위에서 유난히도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윤재성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윤재성은 습관적으로 이마를 문질렀지만, 희한하게도 숙취로 인한 두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밤새 자신의 곁을 지켜준 듯한 아내를 바라본 그는 물밀듯 밀려오는 따듯한 감동에 폭 잠겼다.

아내를 깨우려 했지만, 아직 날이 어둑했기에 그는 아내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제 어깨에 걸쳐있던 담요를 탁자에 올려놓은 뒤, 윤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하룻밤을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지만, 어디 하나 쑤신 곳이 없었다. 오히려 머리가 맑고 온몸이 상쾌했다!

‘내일이면 출발이로군!’

* * *

가을바람이 또다시 불어와 대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산속 깊은 곳에 달콤한 열매와 붉은빛 낙엽을 선사했다.

의주 균천부 균원산 깊이 위치한 작은 산봉우리.

20척(*약 6.7m) 깊이의 동굴에 남루한 옷차림에 빼빼 마른 몸을 한 사람이 움직임 없이 앉아있었다. 뜬 것 같기도 하고 감은 것 같기도 한 그의 눈은 앞에 놓인 바둑판을 향해 있었다.

탁!

백돌 하나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손끝에서 가루로 변했다. 바둑판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움찔하더니,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우웅…… 우웅…….

동굴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넝쿨검이 잔뜩 흥분한 채 공명했고, 칼집과 칼날 전체가 까득까득 소리를 내며 쉼 없이 흔들렸다.

“허…….”

계연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짝 마른 목구멍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희미한 시야로 그를 둘러싼 낙엽과 마른 가지들, 산짐승이 싸고 간 분변들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가을바람의 소리, 산속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그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간혹 잘 익은 달콤한 열매와 아직 설익은 떫은 과일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정신을 차린 순간, 계연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릿속을 비워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바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흐…… 흐어…….”

동굴 벽을 붙잡은 채 흔들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 계연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동굴을 빠져나왔다. 한편 넝쿨검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공명하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과일 냄새를 맡고 계연이 도착한 곳은 한 감나무 앞이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은 흐릿하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더구나 맥을 추지 못하는 그의 몸뚱이는 비틀거리다 쓰러질 뻔했다.

지잉-.

넝쿨검이 길게 공명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넝쿨검은 산 전체를 빛으로 물들이듯, 마치 한 필의 비단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그러자 감나무 위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감들이 가지째로 우수수 떨어졌다.

계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감을 주워들었다. 산에서 난 감은 대추보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그 황홀한 주황색 빛깔이 사람을 군침 돌게 했다.

그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허겁지겁 감을 주워 입에 쑤셔 넣었다. 감을 씻거나 닦지도 않고, 심지어 씨도 뱉지 않았다. 그저 우걱우걱 감을 집어 먹던 그의 손과 입은 어느덧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일각(*一刻: 약 15분) 정도가 지나고 바닥에 떨어진 감을 모두 해치웠지만, 계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산속을 헤집으며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마침내 그는 시냇가로 걸어가서 철퍼덕 냇가에 엎어져, 냇물에 고개를 묻었다.

꿀꺽, 꿀꺽, 꿀꺽.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시자, 서서히 계연의 배가 부풀어 올랐다. 숨도 고르지 않고 물을 마시던 그는 냇물에 사는 작은 물고기와 새우, 게, 미꾸라지까지도 놓치지 않고 한입에 집어삼켰다…….

촤르르.

계연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물에 홀딱 젖은 채, 바위 위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 후우…… 후……….”

그렇게 또 반 시진(*半時辰: 약 1시간)을 누워서 쉰 다음에야 체력을 회복한 계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가 제 손바닥을 확인하니, 비쩍 말라 뼈마디가 드러났던 손에는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는 반나절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과일과 물을 먹고 마셨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계연은 다만 자신의 모든 행동이 오직 제 육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이번에 바둑을 두는 동안, 계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비록 구체적인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절대 짧지 않았음을 계연은 알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천지는 강하게 흔들렸고, 계연은 의식을 뚜렷이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가 혼탁한 집념 속에서 바둑을 두었듯이, 조금 전 계연은 정신을 차린 순간, 모든 생각을 집어던지고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에 휩싸였다.

계연은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다. 몇 달 정도는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 이어진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지난 생에 겨우 바둑판에서 헤어 나온 그때, 그는 구조대원을 마주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계연은 세원현 상하구촌의 허 노인이 말한 ‘원앙법(鴛鴦法)’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신념을 향한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런 모험을 강행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다른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알게 되기도 두려웠다. 적어도 몸이 체력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원앙법’을 통해 죽을 운명에 놓인 자를 ‘깨우고’, 자신이 살 기회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호흡을 가다듬던 계연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작은 코웃음으로 시작한 웃음은 서서히 그의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고, 그 웃음은 끝내 광기 어린 웃음으로 번졌다.

“풉…… 흐흐흐……. 흐허, 허허허허……. 흐하하하…… 하하하하하!”

우르르르…….

그의 웃음소리에 산 전체가 울리자, 그 바람에 산속의 새와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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