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홍씨 부인
“정숙!”
관리가 크게 소리쳤다.
“시험을 시작하겠소이다. 물시계를 작동하고, 징을 울려라!”
한쪽의 관리가 징채를 들고 거세게 징을 때렸다.
댕!
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모든 수험생의 심장도 아래로 쿵 떨어졌다. 수험생들은 저마다 급히 정신을 집중하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사색에 잠겨 고심했으나, 또 다른 이는 벌써 붓을 움직이기도 했다.
재능이 있는 이들만 시험장에 모였으니, 이들에게 시를 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지만, 책론은 달랐다.
그러나 윤재성에게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 아마 수험생 대부분이 가뭄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천편일률적인 답변을 낼 터였다. 정말로 유용한 책론을 써내는 서생은 많지 않았으나, 윤재성은 바로 그중 하나였다.
《가뭄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다.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고 하였다. 가뭄이 시작되면 인명 피해가 생겨나고, 이는 역병으로 이어지니 가뭄을 다스리지 못하면 백성의 원한을 사기 쉽다. 백성들의 분노에서 역병의 조짐이 비롯되니,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천하가 위태롭다…….》
윤재성은 붓을 신들린 듯 움직이며 책론을 써 내려가더니 일필휘지로 답안을 완성했다. 그 문장의 맥락이 명료했을 뿐만이 아니라, 때때로 윤재성이 계연의 글자를 모사한 덕분에, 그의 필체 또한 크게 진보해 있었다.
답안을 제출한 후 긴장되는 심의 시간이 다가왔고, 춘혜부의 적지 않은 관원들이 이에 참여했다.
윤재성의 <치한론(治旱論: 가뭄을 다스리는 방법)>은 마침내 지부(知府)이자 지주(知州) 직을 맡은 관리의 손에도 들어갔다. 계주의 날씨는 좋은 편이었지만, 관원들은 한 지방에서만 머무르는 편이 아니었고, 많은 관리가 다른 지역에서 가뭄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윤재성의 이 책론이 모든 방면을 고려한 훌륭한 문장임을 알았다.
지주인 이후(李厚)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 글은 비록 이상이 높아 공허한 부분이 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만은 뛰어나다. 재능이 얕고 권력이 적은 관원이라도, 이 책론을 따르면 가뭄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평가라고 할 수 있었다.
대정(大貞)국의 해시는 가을에 거행되어, 결과가 나올 때는 대부분 계수나무꽃이 만개할 때였으므로 합격 명단을 ‘계방(桂榜)’이라고도 불렀다.
2주 뒤, 춘혜부 과거 시험장 밖에 계방이 걸렸다.
윤재성은 다른 이들처럼 굳이 기를 쓰고 앞줄로 나가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결과이니, 누군가 저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술 기세로 결과에 항의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단의 어떤 부분은 앞으로 굳이 나서려 하지 않아도 잘 보이게 되어 있다.
계방의 상단 첫 줄에 있는 이름은 큰 글자로 눈에 띄게 적혀 있었다.
《일갑 해원(解元: 해시의 장원): 윤재성》
“윤재성이 누구지?”
“그자가 해원인가?”
“윤재성이라는 자를 아는 이가 있소?”
“모르겠소만…….”
앞줄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뒷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윤재성은 스스로 갑과에 들 것은 예상했지만, 해원이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순간, 그는 심장이 너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재빨리 가슴을 문질러댔다.
해시부터 시작해서 회시(*會試: 마지막 단계인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도읍지에서 열리는 과거시험)와 전시(*殿試: 궁에서 열리며 왕 또는 황제가 보는 앞에서 치는 마지막 시험)에 이르기까지, 1등은 ‘원(元)’자를 붙이는데, 각각 해원, 회원(會元), 장원(狀元)이라 부르며 이 중 하나만 획득해도 가문을 빛내는 영광이었다.
앞으로 다른 이들이 윤재성을 부를 때는, 존경하는 의미로 ‘윤 해원’이라고 부르게 될 터였다.
마지막 명단의 이름들도 공개되었고, 진심이든 아니든 명단의 앞줄에 이름이 오른 합격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이 과거시험의 관례였으므로 윤재성은 자연히 모든 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 * *
그날 밤, 시험에 합격한 이들과 시험 감독관들을 위해 주부의 관아에서는 녹명연(*鹿鳴宴: 해시의 합격자들과 감독관들을 위해 열리는 합동 연회)이 열렸다. 윤재성은 주량이 약하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술을 안 마실 수는 없었다.
연회 마지막에 하급 관리의 부축을 받고 자리를 뜬 윤재성은, 객잔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춘혜부 성 밖에서는 보일 듯 말 듯한 붉은 그림자가 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는 성 근처에 다다르자 마치 산책을 하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성벽에 오르더니, 가볍게 성벽을 뛰어넘어 성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는 이미 등불을 끈 곳이 많았다. 붉은 그림자는 꿈인 듯 연기인 듯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그림자는 홀연히 길을 건너는 저승의 순시관을 발견하고는 히히 웃으며 길모퉁이를 돌아 숨었다.
“호호호…….”
두 순시관이 음산한 바람을 남기며 스쳐 지나가자, 붉은 그림자는 웃으며 계속 걸어갔다.
그것은 마치 목적이 있는 듯 거리와 방(坊)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났고, 과거 시험장 근처의 계향객잔(桂香客棧)에 다다라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객잔을 바라본 그림자는 빨간 실처럼 객잔 2층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객잔 내에서는 이따금 고통스러운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어휴, 아이고…….”
잠시 후, 붉은 그림자는 윤재성이 머무는 방을 찾아냈다.
철컥, 끼익…….
방문의 자물쇠가 저절로 열리며 붉은 그림자는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림자가 탁자 위를 훑어보니, 일갑 해원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
“호호호……. 윤 해원…….”
붉은 그림자는 침상 곁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그리고 하얗고 가느다란 손끝의 빨간 손톱으로 윤재성의 가슴을 쓰다듬듯이 쓸어내렸다. 이에 윤재성의 몸에 있던 정기가 자극을 받아 뿜어져 나오며, 그의 호연(*浩然: 마음이 넓고 뜻이 큰 모양)한 기상이 드러났다.
이에 붉은 그림자의 팔이 윤재성에게서 튕겨 나갔다. 그녀가 한 번 움찔하자마자 즉시 윤재성도 눈을 뜨며 깨어났다.
방 안에 갑자기 등장한 여인을 바라보며, 윤재성은 무의식적으로 침상 안쪽으로 움츠러들며 경황이 없어 했다. 그에게는 모르는 여인이 방 안에 나타난 것이 그 어떤 괴물을 본 것보다도 더 두려웠다.
“다, 당신…… 당신은 누구요? 야밤에 사내의 방에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오?”
“호호……. 윤 해원, 저는 홍씨 부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오랫동안 당신 같은 서생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얇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여자는 윤재성의 머리맡에 옆으로 앉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여자는 윤재성의 양기와 수명만 빨아먹으려 했지만, 지금 윤재성의 깊은 눈빛을 보니 뭔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윤재성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손발은 차가워졌다. 윤재성은 자신의 호연한 정기가 자극받아 깨어났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보았던 것은 붉은색의 해골 같았다.
‘요괴로구나……!’
윤재성은 다급하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처음 떠올린 것은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눈앞의 이 여자가 인간이 아님을 확신했다.
벗인 계연이나 예전에 밤에 우연히 만난 노인과 같은 도인들과 달리, 눈앞의 이것은 요괴의 일종이 확실했다. 만약 자신이 소리를 지른다면 즉시 명줄이 끊어질 터였다.
이에 윤재성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훈장의 기세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 남녀 간에 서로 신체접촉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있고, 나 윤 모는 이미 처를 맞아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첩을 들일 뜻도 없으니, 서로의 명예를 위해 이만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속으로는 얼마나 두려운지 간에 윤재성은 일단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창하게 말했다. 그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것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눈앞의 이 여인이 알아서 나가주기를 바랬다. 게다가 이곳은 계주의 주부가 있는 곳이니 어쩌면 상대방도 꺼리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다.
홍씨 부인은 한껏 교태를 부렸으나, 이 서생은 그녀에게 매혹당하지 않고 그저 놀라기만 했다.
‘듣기로 호연한 정기를 가진 자는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먼저 이자의 호연한 기운부터 부숴야겠다!’
생각을 바꾼 홍씨 부인은 한껏 애교스럽게 입을 열었다.
“윤 해원, 당신 부인이 나만큼 자태가 고운가요, 아니면 나만 한 미모를 가졌나요?”
홍씨 부인은 일어서서 하늘하늘 걸으며, 한 손은 아랫배에 살짝 올리고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며 윤재성을 향해 미소 지었다. 동시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분홍색 기운이 퍼졌다.
윤재성은 곧 아랫배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머리는 맑은데 몸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이를 꽉 물고 홍씨 부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여인이 좋은 말 할 때 듣지 않고……! 부모가 힘들게 낳아 기른 자신을 천하게 대우하다니! 윤 모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가 아닐세!”
이 말의 반은 분노를, 반은 윤재성의 두려움을 드러냈다. 동시에 윤재성의 호연한 기운이 왕성히 퍼지며, 옅은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이 빛은 비록 그의 살벌한 기세가 담겼다고는 해도 옅었으므로, 홍씨 부인이 소매를 한 번 털자 사라져 버렸다. 그 빛과 동시에 그녀의 인내심도 사라졌다.
“흥……. 재미있군, 윤 해원. 내 사실대로 말해주지…….”
홍씨 부인은 말을 하는 동시에 손을 뻗었고, 곧 윤재성은 자신이 공중에 떠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어 윤재성은 맞은편의 붉은 그림자를 향해 끌려갔다. 윤재성은 긴 손톱이 달린 손에 목이 졸렸다.
홍씨 부인의 손이 윤재성과 닿아 그의 호연한 기운과 부딪히자, 미세한 전류가 일며 찌르는 듯한 통증을 홍씨 부인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질식당하고 있는 윤재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이 춘혜부의 성황신조차 두려워하지 않거늘, 너 따위 서생이 내 손에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하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마지막엔 목이 쉰 듯이 변했다.
윤재성의 안색은 창백해졌다가 시뻘게졌다. 목을 단단히 쥐고 있는 손가락을 통해 전달된 요기(妖氣)가 호연한 기운과 만나며 붉은 해골의 모습을 드러냈다.
목이 졸려 죽어가는 와중에 윤재성의 의식은 모호해졌다. 그의 뇌리에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 이어서 기인(奇人)이자 함께 바둑을 두던 그의 벗 계연의 모습도 떠올랐다.
“요, 요괴……! 계 선생…… 살려주십시오…….”
* * *
이 시각, 멀리 균천부(均天府)의 한 객잔에 있던 계연은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손가락 사이에는 흰 바둑돌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 위에 검은 기운이 백돌 위를 휘감아 백돌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윤 훈장님……?”
보통 계연은 바둑돌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데, 중요한 때에는 일종의 감응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의 변화는 좋은 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