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일 났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를 듣던 윤재성은 앉은 몸을 다시 일으켜 성황신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성황신께서 삿된 요괴들을 멸하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소생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다.”
“윤 해원은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네. 어쩌면 내가 자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지.”
이를 들은 윤재성이 의혹에 찬 얼굴로 성황신을 바라보자 그는 이어서 말했다.
“윤 해원, 이전에 자네가 한 기인(奇人)을 벗으로 둔 적이 있다고 말했었지. 어젯밤 요괴가 자네를 해치려 할 때 그가 어떤 수단을 써서 요괴를 공격했고 말이야. 자네의 벗이 혹시 검을 들고 다니지는 않나?”
일반적으로 영지를 가진 선기(仙器)는 수행할 줄을 알아서, 세상 속에 잘 숨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윤재성이 어쩌면 이전에 선검을 본 적이 있을 수도 있어 성황신도 이렇게 물은 것이었다.
“검 말씀입니까?”
윤재성은 계연의 일상을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검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언젠가 선생께서 검무를 추시는 것을 보았다 했습니다. 꽃과 나뭇잎이 검을 따라 흐르며, 노을이 아침 해를 보는 듯, 꽃이 피고 지는 듯, 물이 구부러지듯 흐르는 듯한 느낌이라 하였지요.”
윤청은 태어나서부터 영특했고 나이가 어려 마음이 순수하니, 계연이 추는 검무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남다른 기운을 더욱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윤재성은 본 적이 없으니 자세히 말할 수가 없어, 대략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들은 성황신은 안색이 숙연해지며, 품고 있던 추측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윤 해원. 자네의 벗은 아마도 이 일에 대해 이미 알 것이고, 어쩌면 그런 고인은 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혹 그를 다시 보게 된다면, 나를 대신해 이것을 전해주게.”
윤재성은 성황신이 건넨 엄지 크기의 오목패(*烏木牌: 흑단 나무로 만든 검은색 패)를 살펴보았다. 위에는 검은 술이 달렸고 양쪽 모두 어떤 도안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성황신이 그에게 전해준 것이니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작은 목패를 받은 다음 공손하게 답했다.
“만약 선생을 뵙게 된다면 소생이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 이제 돌려보내 주겠네.”
윤재성도 저승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깊이 읍하며 작별 인사를 올렸고, 성황신도 그를 향해 가볍게 공수했다.
그 후 윤재성은 조금 전의 두 관리와 다시 만났다.
그들이 어느 곳을 지날 때, 벌악사(罰惡司)가 있는 방향의 불그스름한 어둠 속에서 억울하다며 외치는 소리와 비명이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돌연 무언가를 톱니로 절단하거나 후려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더니, 혼잡한 소리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허윽……! 전부 말했다고요, 이미 다 말했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흑흑흑…….”
여인의 날카롭고 처참한 비명에 윤재성은 놀라 몸을 떨었다.
“윤 해원, 멈추지 마시고 저를 따라오세요!”
관리가 그를 일깨우자 윤재성은 급히 뒤쫓아갔다.
“네,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 * *
객잔의 한 객실 안.
윤재성은 잠에 빠져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졸다가 ‘쿵’ 소리와 함께 탁자에 머리를 부딪쳤다. 이어서 그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주변을 살펴보니 객잔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고 자신은 아직도 한 손으로 책을 쥐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인가?”
윤재성은 아직 의혹에 휩싸여, 자신이 오른손에 서늘한 오목패를 하나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 *
한편, 균천부의 한 객잔에서 침상에 앉아 수행 중이었던 계연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눈을 떠 창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흐르는 빛과 함께 넝쿨검이 실내로 날아 들어왔다. 넝쿨검은 계연의 눈앞에 떠서 흥분하며 날카롭게 울었다.
우웅-!
넝쿨검이 한껏 흥분한 모습을 보며 계연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었다. 보아하니 요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응?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어?”
넝쿨검과 계연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러나 계연은 검의 정서만 느낄 수 있을 뿐,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만 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음, 모두 해결됐다고?”
우웅…….
넝쿨검은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듯이 검신을 돌리며 빙빙 회전했다.
“그래그래, 정말 대단하구나!”
계연은 웃으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선검에는 영지가 있으니, 일이 해결됐는지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판단할 것이다.
계연은 손을 뻗어 넝쿨검을 쥐더니 가볍게 검날을 뽑아 살펴보았다. 그가 남긴 무형의 ‘참(斬)’ 자는 조금 흐릿해졌을 뿐, 하늘과 땅의 기운은 아직도 검을 은은하게 휘감고 있었다.
“일검(一劍)에 기운을 다 쓰지 않은 건가?”
계연이 묻자 넝쿨검에게서 으스대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요괴를 벨 때 모든 힘을 다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연이 생각해봐도 일전에 자신이 기운을 너무 많이 불어넣은 것 같았다. 의식 속 산과 하천에 존재하는 천지의 기운을 적지 않게 끌어다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넝쿨검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고, 따지고 보면 결국 자신에게도 이득이었다.
아무래도 전생에 인터넷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지식을 쌓다 보니, 사실이든 추측이든 공덕(功德)으로 의심되는 천지의 기운이 선검을 휘감고 있었다. 이는 넝쿨검 본체를 이루는 재료의 부족함을 강화하고 보충한 것 외에도 더욱 현묘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계연은 검을 검집에 넣고 머리맡에 놓은 다음, 온몸의 근육을 풀어주면서 창밖으로 하늘에 뜬 별을 살폈다.
“이제 자야겠군.”
그는 손을 베고 옆으로 누워, 호흡과 동시에 토납(吐納)하면서 오행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했다.
일반인은 가슴으로 호흡하고 무인은 배로 호흡한다는 말이 있다. 계연은 매번 토납할 때마다 영험한 기운이 발끝까지 다다르도록 온몸으로 흐르게 했다.
* * *
다음 날, 닭이 처음 울 때 계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걱정하던 일이 해결되자 지난 밤에는 아주 깊게 잘 수 있었고, 덕분에 수행하며 얻은 수확도 적지 않았다.
“하하, 잘되었다. 이제 슬슬 외출해야겠어.”
일어서서 외투를 걸친 후 머리맡에 걸린 배낭을 든 계연은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내내 조용하던 넝쿨검은 공중에 떠서 검신을 비스듬히 한 채로, 두 뼘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계연을 따라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객잔의 방문이 열렸다. 문밖의 의자에는 객잔의 점원이 미리 준비한 버드나무 가지와 소금 한 줌, 얼굴을 닦는 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계연은 지금 때 하나 묻지 않았기 때문에 세수나 양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만 조금 얼굴에 묻혔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퇴실 절차를 밟은 후, 보증금을 돌려받고 문을 나섰다.
이곳 홍안객잔은 계연이 과거 묵었던 곳으로, 다시 이곳에 왔을 때 계연은 그때 잃어버렸던 짐을 되찾으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3년이나 지났으니 그 배낭과 우산은 당연히 찾을 도리가 없었다. 계연은 그 안에 있던 송(宋) 성황신이 준 죽간으로 엮인 기경(棋經)이 조금 아쉬웠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불쏘시개로 쓰였을 것이다.
균천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번화했다. 성안을 거닐던 계연은 어느 집 정원의 계수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몰라도, 은은한 계수나무꽃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객잔 입구에 난 길을 따라 성의 서문으로 통하는 길을 걸으며, 그는 중간중간 마른 전병과 죽통(竹桶)에 담긴 절인 채소, 우산을 샀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균천부를 나서 먼 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성에서 나와 6~7리(*약 2.5km) 정도를 걸었을 때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뒤돌아보았다. 성이 있는 방향에서는 온갖 사람들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다양한 색깔이 성 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안에는 사랑, 욕망, 미움과 원한들이 섞여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의 풍경이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축지법을 쓰는 듯 속도를 높였다. 그러며 입으로는 읊조리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하세 떠나니~ 인연을 찾아가~ 천하에~!”
의식 세계에서의 대국을 치른 후, 계연은 종종 현실 세계를 의식 안의 세계처럼 바라볼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랬다. 장안법(障眼法)을 쓰지 않았는데도 계연의 신형은 안개처럼 변했고, 계연은 세상과 하나가 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원래 계연은 일단 덕승부로 한번 돌아갈까 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고쳤다.
얼마 전 백돌이 이상해졌을 때, 계연은 요괴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공격을 주고받으며, 짧은 감응을 느꼈었다. 그때 계연은 윤재성의 문기(*文氣: 문인으로서의 기운)가 왕성함을 알아차렸고, 그에 더해 성황신의 분노에 찬 포효를 들었다. 그래서 계연은 윤재성이 영안현의 옛집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나 공교로운 시기에 윤재성이 새로이 문기를 얻었다는 것은, 발가락으로 추측해 보아도 그의 이름이 계방의 높은 곳에 걸렸다는 뜻일 터였다. 그렇다면 내년 봄 윤재성은 반드시 상경하여 회시와 전시에 참여할 것이다.
윤재성이 시험 명단의 높은 곳에 이름을 올렸으니, 일단 그는 먼저 영안현으로 돌아갈 것이다. 평범한 사람인 윤재성이 영안현에서 먼 경기부까지 가려면 중간에 배를 타거나 마차를 타더라도, 바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대정이라는 나라는 계연의 좋은 벗인 윤 훈장과 계연이 인정한 인간 세상의 중요한 강대국 중 하나였으니, 어차피 이곳의 황성에도 한 번쯤은 가서 그 기상(氣像)을 보아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계연은 내년 봄 윤 훈장을 만나러 경기부에 가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가는 길에 이 생애에서 계연이 두 번째로 얻은 친우인 용이 있는 통천강(通天江)에 들를 수도 있었다. 그가 강의 신인지 아니면 강에 살고만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이날은 계연이 균천부를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로, 때는 정오였다. 관도(官道) 옆에는 마차 몇 대가 서 있는 노상 찻집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지나는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계연은 멀리서 찻집을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을 통해 대충 몇 명이 찻집에 있는지는 판별해낼 수 있었다.
손님이 붐벼서, 찻집의 주인인 한 노인과 아이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연이 도착했을 때, 한 명은 차를 끓이고 한 명은 식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중간중간 화덕에 장작을 더 넣어 끓는 물이 떨어지지 않게끔 했다.
“손님, 먼저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곧 주문받으러 가겠습니다!”
차를 우리고 있던 노인이 계연을 향해 소리쳤다.
“저는 괜찮으니 먼저 일 보세요!”
대답한 후 계연이 실내를 살펴보니 탁자 여덟 개는 모두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거나 했다. 한구석에는 탁자 두 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빈자리가 있어 계연은 그쪽으로 갔다.
두 개의 탁자 한쪽에서는 두 여인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아이는 찻잔을 거꾸로 뒤집어 놓고는 젓가락으로 ‘탕탕!’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그런데도 두 여자는 아랑곳없이 모양이 그다지 예쁘지 않은 간식과 함께 차를 마셨다.
다른 한쪽에는 체격이 우람한 사내가 탁자 위에 두립(斗笠)을 놓아둔 채로 앉아 있었다. 계연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가 앉은 탁자 앞으로 향했다.
“대형, 제가 이쪽에 잠시 앉아 쉬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이미 계연이 오는 것을 알아챘고, 그가 정말 여기에 앉으려는 것을 보고는 표정 없이 대답했다.
“편한 대로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계연은 그를 향해 공수한 후 자리에 앉아, 우산을 탁자 옆에 기대어 세우고는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길 기다렸다.
“선생께서 괜찮으시다면, 제 차를 조금 마셔도 됩니다.”
남자는 자신의 찻주전자를 앞으로 밀어, 찻잔을 가리키며 계연에게 말했다.
“마침 목이 말랐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험상궂다고 느낄 수 있는 인상의 남자를 앞에 두고도, 계연은 어떤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하하하……! 선생께서는 다른 서생들과 달리 참 소탈하시군요. 관도를 통해 먼 곳에서부터 혼자 걸어오신 듯한데, 탈것도 없이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남자가 말하는 어조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안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 탁자를 보니, 아이는 아직도 찻잔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가벼운 옷차림을 한 두 여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연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남자가 한 말이 무언가를 촉발한 듯, 찻집 안의 많은 사람의 기운에 변화가 생긴 것이 느껴졌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차 한 잔 마시러 왔는데도 일이 벌어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