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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112화 (112/892)

112화. 누선에서 들려온 이야기

통천강 어느 곳에서 계연은 검은 지붕이 덮인 작은 배의 뱃머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는데, 이는 방금 소매 안에서 바둑돌 하나가 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 세계 속에 있는 자연 속에서 실체가 있는 바둑돌을 바라보았다. 다만 아직 흑백이 분명하지 않아 지금은 흐릿한 회색 정도로 보였다.

의식 속에서 바둑돌을 손에 쥐자 느껴지는 무게는 가볍지 않았고, 하얀 교룡의 울부짖음이 은은히 들려왔다.

배 옆의 수면 위에 서 있던 응약리는 계연이 돌연 먼 곳을 바라보며 웃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서 은은한 도력이 느껴져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계연이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후에 입을 열었다.

“계 숙부님, 저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약리가 이렇게 말하자, 계연도 그녀를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강신께서도 어서 돌아가 보세요. 영존(*令尊: 상대방의 부친을 일컫는 존칭)의 생신 연회가 막 끝났으니, 수부가 무척 바쁘겠군요.”

강의 수면에 너울이 일며 응약리는 계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약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웃으며 인사한 그녀의 모습이 곧 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계연은 그녀가 물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뱃머리에 앉았다.

그는 두립을 다시 머리에 쓰고 노를 잡은 후, 보통의 낚시꾼처럼 배를 저어 먼 곳으로 나아갔다.

수면 아래의 응약리는 일렁이는 수면 아래에 서서 머리 위의 작은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연은 어떤 신묘한 술법도 쓰지 않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천천히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다.

만약 저 배에 탄 사람이 계연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녀는 어떤 특별한 점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계연은 지난 생에서는 노 젓는 법을 몰랐지만, 배를 빌려준 어부에게 배운 후 꽤 그럴듯하게 배를 몰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실체가 있는 바둑돌을 얻은 그는 지금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이 외에도 계연을 기쁘게 하는 일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응굉에게서 용연향(龍涎香)을 조금 얻은 일이었다. 이는 용의 침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용이 용의 본체로 잠이 들 때, 용의 몸에서 나오는 침을 먹고 자란 수초가 용연향의 주재료였다. 여기에 각종 진귀하고 영험한 약초를 더하여 발효한 것이기 때문에, 용연향은 담그기 쉽지 않아 수량이 극히 적었다.

늙은 용이 윤재성에게 마시도록 한 것도 이 술이었다. 계연이 응굉에게 부탁해 이를 몇 잔 얻은 것은, 술을 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어떤 도인이 생각나서였다. 용연향은 청송도인의 손상된 원기를 조금 보충해줄 수 있으니, 이를 마시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일은 계연이 늙은 용의 서고에서 좋은 책 몇 권을 골라 빌려온 것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권뿐이고 다른 것들은 옥으로 된 서표나 옥으로 엮은 책이었다. 이것들에는 모두 계연이 알고 싶었던 내용이나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계연은 앞으로 계속 고기를 못 잡아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윤 훈장님을 기다리다가 내년 과거시험이 끝나면, 청송도인을 찾아가 제 입단속을 하지 못하는 그자의 명을 붙여줄 것이다!

그래서 현재 노를 젓는 계연의 모습은 시원하고 유유자적했다. 물결을 일으키며 나아가다 보니, 당시 배를 빌려 춘혜부에 가는 길에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기분도 좋고 풍경도 좋으니 그의 입에서 절로 가락이 흘러나왔다.

“낚싯배야~ 노를 저어라~ 낚시꾼은 유유자적……!”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구성져서, 그 늙은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보다 귀를 즐겁게 했다.

응약리는 물 아래에서 한참을 듣고 있다가, 작은 배가 멀리 떠나자 몸을 돌려 수부로 향했다. 그녀는 용의 몸으로 변신하지 않고 꾸물거리며 아래로 헤엄쳐 갔다. 넓은 소매와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 뒤로 파도처럼 일렁였다.

‘아버지와 계 숙부님이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떤 광경이었을까?’

응약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디에서부터 계연을 데리고 용궁에 왔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용궁에서 북쪽으로 십수 리(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배와 계연을 강물 위로 올려보냈다.

계연은 노를 젓고 또 저으며 흐릿한 시선으로 주위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강 근처에서 눈 덮인 논밭과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예전에 낚시하던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계연은 천천히 노 젓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노를 젓자 배의 속력이 점차 빨라졌다.

사실 평범한 어부들은 잠깐은 계연과 같은 속도로 배를 몰 수 있었다. 그러나 계연처럼 거의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계속 같은 속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노를 저으면서 계연은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 쌓인 풍경을 보니 3일 전 내린 그 첫눈이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내린 것 같았다.

계연이 모는 작은 배는 일반인이 가볍게 뛰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다시 도롱이를 걸친 계연은 더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용궁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용연향도 마셨기 때문에, 통천강 끝까지도 이 속도를 유지하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윤 훈장도 아직 장원 나루터에 다다르지 못한 것 같았다. 바둑돌의 영향인지, 계연은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대략 70리에서 80리(*약 27~31km)를 뱃길로 노를 저어 왔는데도 장원 나루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는 누선(*樓船: 2층 여객선)이 보였다.

이렇게 추운 날 배를 끌고 나오다니. 강가의 눈을 감상하기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누선의 선미에는 거대한 노가 양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배 안에서 발판을 밟는 사공이 그리 높은 속도를 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도 누선에서는 이미 하인들이 나와 등롱을 걸고 있었다. 계연은 등롱의 불빛 덕분에 모든 등롱 위에 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리가 있어서 도통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모두 같은 글자인 것 같았다.

저 누선은 어떤 부자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배가 분명하니, 그렇다면 등롱 위의 글자는 성씨임이 틀림없었다.

계연은 무료한 참에 노를 저어 저 누선을 쫓아가기로 했다. 계연은 저 글자가 도대체 무슨 성씨일지 추측하면서 누선이 자신의 배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따져보았다.

200번쯤 노를 젓자 거리는 많이 좁혀져, 글자가 전처럼 한 덩이로 뭉쳐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읽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200번쯤 노를 저어 가자 슬슬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반듯하게 적힌 글씨의 획수가 적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다시 300번 정도 노를 젓자 계연은 드디어 글자를 추측할 수 있었다. 윗부분의 부수와 아랫부분의 크기를 따져봤을 때, 아마 ‘소(蕭)’씨인 것 같았다.

이제 계연의 배와 누선 간의 거리는 꽤 가까워져서, 계연은 누선 위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연주 소리와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를 뚜렷이 들을 수 있었다. 해가 지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도 사람들은 객실에서 나와 강의 운치를 즐기고 있었다.

* * *

누선의 맨 위층에 있는 갑판의 뒤쪽에서는 몇 사람이 서거나 난간에 기댄 채로 있었다. 한 남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머리에 방관(*方冠: 사대부가 쓰는 관의 한 가지)을 쓴 차림이었고, 그보다 약간 젊은 남자는 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은 공자였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그래도 꽤 따뜻하게 껴입은 하인들이었다.

나이 든 남자는 손에 술을 한 잔 들고, 먼 곳에서부터 노 저어 오는 작은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술을 마시자마자 하인 하나가 다가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중루(仲樓)야, 어떤 일들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는 법이다. 너는 어려서부터 금의옥식(錦衣玉食) 하며 이 아비와 네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랐으니, 네가 문무를 배웠다고 해도 진짜 고생을 몇 번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

한쪽에서 부친의 말을 듣고 있던 공자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했다.

“아버지, 제가 무술을 연마할 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술을 닦으신 적이 없으니 모르실 거예요.”

공자의 아버지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배 후미 쪽의 검은 지붕이 덮인 작은 배를 가리켰다.

“이렇게 뼈가 에이는 날씨와 추운 강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부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배를 띄운단다. 그렇게 며칠간 배를 탔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잡지 못할 수도 있지. 저들은 배를 곯고 몸이 얼어붙어도 쉬지 못하고 배를 끌고 나와야 한다. 이런 고생을 네가 해봤느냐?”

그 공자는 아버지의 손을 따라 강에 떠 있는 작은 배를 바라보았다. 뱃사공은 계속해서 노를 저어 왔는데, 아마도 강이 점차 어두워지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탄 누선의 등불을 보고 따라온 것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반박할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공자는 얼마 전에 자기 집 하인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장에서 신선한 생선을 팔지 않은 지 이미 며칠이나 흘렀고, 가끔 생선을 파는 사람이 있어도 먼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했다. 듣기로는 통천강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은 지 여러 날이 흘렀지만, 자신들과 같은 고관 가문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강에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저 어부도 분명 먼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아 올 생각이었겠지.’

“중루야, 너와 나는 가죽과 솜으로 껴입고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데, 저 어부를 한 번 보아라. 저 어부는 도롱이 안에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있구나. 만약 저 어부가 노 젓기를 멈춘다면, 여태껏 흘린 땀으로 인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단다. 한데 저 어부는 노를 꽤 빨리 젓는구나…….”

부친이 한창 가르침을 전하는 와중에, 작은 배는 그들이 탄 거대한 누선 곁으로 다가왔다. 공자가 보아하니 그 속도로 볼 때 자신들이 탄 누선을 어부는 따라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계연은 작은 배에서 누선의 맨 위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관기(官氣)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경기부에서 꽤 권력 있는 집안인 듯했다.

곧 계연의 귀에 높은 관직에 오른 귀인들만이 할 수 있는 고민거리가 들려왔다.

그 공자는 계연의 배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반박했다.

“저도 홍수(紅秀)를 제 정실부인으로 맞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첩으로라도 맞아들이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술을 마셔 몸을 데운 다음,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떤 신분이고 그 여인은 또 어떤 신분이냐? 창기(娼妓)를 우리 소(蕭)씨 가문에 들인다면 네 어머니가 앞으로 네 혼처를 어찌 구하겠으며, 조정에 몸을 담은 이들은 우리 가문을 어찌 보겠느냐? 네 앞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 대정국 율법 어디에 관직을 가진 집안에서 청루(靑樓)의 여인을 들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까? 게다가 홍수는 기예를 파는 아이지, 몸을 파는 이가 아닙니다!”

공자는 마침내 조금 화가 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 그래 봐야 천적(賤籍)에 이름을 올린 여자가 아니냐! 게다가 예를 팔고 몸은 팔지 않는다는 것은 소문에 불과하지. 너에게는 치마를 열어주지 않았느냐?”

“아버지……. 이는 그야말로 궤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번 더 냉소를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이 강으로 데리고 나온 것은 찬 바람을 좀 쐬고 머리를 식히라는 뜻이었다. 만약 네가 그 길을 택한다면, 앞으로 네가 겪을 고초는 저 작은 배의 어부보다 작지 않을 것이고 그보다 더한 고생을 할 수도 있다. 이 아비는 한 번도 너를 속인 적이 없다!”

배가 가까워지자, 계연은 공자가 꽉 쥔 주먹에서부터 콰득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를 듣고 계연은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하,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고민이란…….’

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한번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배의 속력이 점차 빨라지며 계연의 배는 누선의 선체 중앙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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