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신선은 부럽지 않으나 원앙이 부러울 뿐이네
계연은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감사 인사를 올리던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백약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과 흰 사슴의 형상이 얼핏 겹쳐 보였다.
“하하, 어쩐지 꼬리가 이리 짧더라니. 나는 또 어떤 종류의 요물인가 했더니, 사슴 낭자였군요!”
계연은 방금까지 짧은 흰 꼬리를 보고서 이게 어떤 동물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람쥐, 족제비, 이리 등 온갖 동물이 추측 대상에 올랐다. 두 번의 생을 사는 동안, 여태껏 사슴의 꼬리는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백약은 이 말을 듣고 몸을 떨며 바닥에 붙은 몸을 일으켜 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눈앞의 선장이 자신을 구한 목적을 알 수 없었으므로, 어쩌면 이는 그저 호랑이 굴에서 용이 사는 못으로 옮겨진 것과 비슷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일어나세요. 소도 말도 필요 없으니, 그저 제가 묻는 몇 가지 말에 대답만 해주시면 돼요.”
백약은 상체를 일으켜 무릎만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계연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백 낭자. 당신의 내력과 주염생과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다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저는 이야기 듣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백약은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마음을 다잡고서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가며 입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와 문발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백약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의해 흩날렸다.
“60년도 더 전에 남황(南荒)의 큰 산에 살던 한 요괴가 어떤 수단을 썼는지 몰라도 천기각(天機閣)에서 만든 현단(*玄丹: 현묘한 환약)들을 훔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천기각 선인들은 이를 눈치채고서 구름을 타고 남황으로 쫓아왔었고, 당시 장검산(長劍山)에서 검선으로 이름난 이가 두 명 있었는데, 이들까지 요괴를 추격했지요. 그 요괴는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사로잡혀 천기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에 죽었는지 탑에 갇혔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백약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도 천기각에서는 선인들을 남황으로 계속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요괴가 훔쳐 간 현단을 그들이 아직도 찾지 못한 거라는 소문이 퍼져, 이로 인해 남황의 온갖 요괴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중 소수의 요괴는 그 단약을 먹고 정말로 수행에 큰 진전을 얻어, 자신을 요왕(妖王)으로 칭하는 자도 생겼지요.
그 뒤 20년이 넘도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사방에 요기가 솟구치며 요괴들이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요괴 떼들은 남황의 각 작은 나라에서 난을 일으키며 참혹한 일들을 벌였습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형산(衡山)의 산신이 진노하였고, 몇 곳의 선부(仙府)가 나섰지요. 불문(佛門)의 명왕(*明王: 사바세계의 중생을 수호하는 왕으로 여러 종류가 있음)께서도 현현하여 요괴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후 도망친 요괴가 몇이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계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백약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그녀의 묘사는 매우 자세했다. 계연이 법안을 열고 의식 속의 산하에 겹쳐보자, 눈앞에 남황의 십 수만 리 산맥이 펼쳐지며 요괴와 마귀의 기운이 넘실대는 광경이 그려지는 듯했다. 각자 수련에 몰두하던 온갖 요괴들과 마귀들이 현단을 얻기 위해 들고 일어나, 솟구친 요기와 마염(魔焰)이 하늘을 뒤덮어 해를 가릴 정도였다.
이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요괴와 마귀들이 뿜어내는 흉악한 기운이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계연은 이것이 잘된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가진 작은 목패를 떠올리고는 이는 분명 나쁜 일임을 되새겼다.
“……저는 그들과 연관될까 너무 두려워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대정국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그때 저는 원기가 크게 상하고 다친 곳도 많았지만, 겪은 일로 인하여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사람을 해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후 도성에 과거를 보러 가는 주 낭군을 만났고, 미인계를 써서 그의 무리에 낄 수 있었습니다. 대정국 각지의 신령들을 피하려는 목적이기도 했고, 나쁜 생각도 조금 있긴 했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백약의 내력에 관한 내용이었고, 이제 주염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 부분이 시작되었다.
“당시 저는 그가 아주 재미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저에게 관심이 있었는데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저를 떳떳하게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이겠다면서요.”
백약의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서렸다.
“그는 저에게 정말 잘해 주었습니다. 요괴로 태어나서 그런 관심과 진실한 애정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있는 돈을 다 써서 저를 위해 각종 기이하고 진귀한 약초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때 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실수로 제 정체가 드러났고…….”
그렇게 말하는 백약의 표정은 화가 난 듯도, 웃긴 듯도 했다. 계연은 점점 더 호기심이 커졌다.
“원래는 분명 그가 놀라서 저를 두려워하리라 여겼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그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저 그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 얼간이가…… 조금 놀라기만 할 뿐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저에게 물었습니다. 요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고요. 풉!”
백약은 참지 못하고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계연은 나이 들어 병든 주염생의 모습만 봤기에, 젊었던 시절 그가 그렇게나 간이 큰 사내였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워했다.
‘간이 크다고 해야 할까,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백사전의 허선 형님보다도 한 단계 더 높다고 쳐줘야겠지?’
“그의 질문을 듣고 저는 반나절은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미 그와 아침저녁으로 반년이 넘도록 함께 지냈으니, 이미 그가 제게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는 걸 알겠더군요. 그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내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마음을 놓고 있었고 그날 밤에는 순간적으로 잠시 놀란 것뿐이라고 말했죠.”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제가 원래는 흰 사슴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째서인지 낭군은 기뻐하더군요. 그가 말하기를, 자신의 고향에서 흰 사슴은 상서로운 동물이며 산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 흰 사슴을 만나 곤경에서 벗어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완전히 저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았습니다.”
백약의 얼굴에는 그때의 의혹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이 흰 사슴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왜 자신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계연은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주염생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 핑계를 찾았던 것뿐이었다고.
“그 후 낭군은 결국 과거에 붙지 못하였고, 우리는 혼인하여 이곳 도성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떠올리는 백약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지만, 약간의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도 몰랐고 저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그의 원기는 이미 상해 가고 있었습니다.”
계연은 적당한 시기에 그녀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를 알고 나서 다른 처첩을 맞아들인 겁니까?”
백약은 잠시 당황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요괴이기 때문에 낭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을 수 없어 속세의 여인을 맞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불효 중에 후사가 없는 것이 제일 크다 하여, 저는 주씨 집안의 향불이 끊어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동의했습니다.”
‘아하,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과연 봉건사회구나.’
계연은 비아냥대려다가 이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대략 7, 8년 후, 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해가 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정을 나눌 때도 요기를 철저히 감추고 그에게 조금도 닿지 않도록 최대한 보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원기가 새어나갔고 수명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남황에 있을 때보다도 두려워져서, 그를 살릴 방법을 찾으러 사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평탄했고 끝에 이르러 저승까지 그를 배웅하러 갔던 부분이 그나마 가장 파란만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백약의 이야기를 듣던 계연은 그들의 사이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비극도 아닐뿐더러 꽤 원만하게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백약과 주염생처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과 부부가 과연 속세에 몇이나 되겠는가?
백약은 이야기를 마치고 멍하니 묘사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니, 그녀는 왠지 모르게 실의에 빠진 것 같았다. 계연의 생각대로, 그녀는 만약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백약은 점점 더 슬퍼졌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이건 저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워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계연은 이야기의 여운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고쳐서 윤 훈장님께 <약낭전(若娘傳)>을 쓰라고 해볼까?’
계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별안간 백약이 자신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고 몸을 일으킬 생각은 한 치도 없어 보였다.
“백약 낭자, 왜 이러십니까?”
백약은 머리로 바닥을 찧으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백약은 선장께서 신통하기 이를 데 없으며 도력도 높은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생에서 수행을 닦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도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두 줄기 눈물을 계연은 볼 수 있었다.
“저는 경기부 성황신이 다스리는 저승에 가고 싶습니다. 부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전에 한 번 도망쳤으니 지금 제가 스스로 그곳에 나타난다면, 혼백이 흩어질 때까지 두들겨 맞을 것입니다. 부디 제가 성황신께 말씀을 올릴 수 있도록 데려다주세요. 저승에 있는 낭군의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후에는 제 혼백을 연옥에 넣든 다른 벌을 내리시든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쿵쿵-!
백약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가 누각의 나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 요구가 과하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오직 선장께 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쿵쿵.
계연은 당황하여 잠시 눈앞의 여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성황신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쌓아볼까 하는 게 아니라, 시 한 구절이었다.
“홀로 달을 바라보며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니, 신선은 부럽지 않으나 원앙이 부러울 뿐이네…….(*對月形單望相互, 只羨鴛鴦不羨仙: 당시(唐詩)의 한 구절로, 영화 천녀유혼의 노래에도 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