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21화 (121/892)

121화. 법은 어길 수 없으나 사정은 봐줄 수 있지

백약은 더는 무릎을 꿇지는 못했지만, 토지신의 말을 듣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토지신께서 저를 돕겠다고 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저 낭군을 한 번 더 보고 싶을 뿐이니, 만약 성황신께서 제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더라도, 그 자리에서 제게 벌을 내린다더라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토지신께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백약은 이전에 계연이 한 말을 단단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꿇어앉는 것은 괜찮지만, 토지신에게 어떤 부담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토지신이 그녀를 돕는다면,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니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의 원망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백약이 정중하게 대답하자 토지신도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계연과 그 뒤에 떠 있는 선검을 바라보다가 다시 사슴에게 위로를 건넸다.

“낭자는 안심하시게. 성황신이 돌로 된 심장을 가졌다 해도, 나와 낭자의 주인이 그곳에서 무사히 나가도록 해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동물이 도를 얻기는 본래 힘들고, 기회와 인연이 따라서 저 사슴처럼 스승 겸 주인을 둔 동물은 더욱 희귀했다. 비록 저 사슴이 심오한 도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정을 가진 중생 중에서도 가장 진실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토지신은 이 일에 대해 계연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는 저 사슴이 계속 도를 닦을 수 있기를 바랐다.

토지신은 다시 한번 한쪽에 서 있던 계연을 보면서, 주인 된 자로서 그도 분명 저 사슴의 앞길이 위험해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도력을 예측할 수 없는 데다 아주 예의 바른 자야. 성격도 소탈하니 저리 기이한 사슴을 가르쳐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토지신이 돕겠다고 약속하고 놀란 사슴의 감사 인사가 이어진 후, 계연도 주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곧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토지신을 향해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대의(大義)를 위해 토지신께서 친히 나서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번엔 제 사슴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을 쓰게 되었는데 부디 토지공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를 거두시게. 나도 이리 아름답고 진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손해를 본 것은 아니지. 자네들을 위해 체면 한 번 세우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나? 가세, 지금 바로 성황당으로 가지!”

“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지요!”

계연은 즉시 대답했고, 사슴은 더욱 감격해 어쩔 줄을 몰랐다.

토지신이 간다고 말하는 것은 황토와 나무뿌리가 가득한 이 저택에서 나와 성황당으로 걸어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들고 있는 넝쿨 지팡이를 땅에 대고 가볍게 쳤다.

계연과 사슴은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들이 잠깐 몸의 중심을 잃은 순간 노란빛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이들은 묘사방의 성황당 바깥에 도착해 있었다.

묘사방에 있는 성황당과 성 서쪽의 토지신당 사이에는 일고여덟 개의 방이 있었다. 그러나 토지신이 손을 한 번 움직이자 그들은 순식간에 이곳으로 이동했다. 같은 터주신인 성황신이 가진 향불의 힘도 이렇게 강력하진 않았다. 이는 산수신들만이 가지는 힘이었다.

성황당 바깥에 도착하자 계연은 토지신을 바라보았고, 토지신은 계연을 향해 웃었다.

“계 선생, 내가 말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쪽이 더 좋겠습니다.”

계연보다는 토지신이 입을 여는 게 더 효과적일 터였다.

저승의 각 기관은 밤에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곧 관리 하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당연히 토지신을 알고 있었고, 그 옆에서 토지신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토지공과 선장을 뵙습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토지신은 형광색으로 빛나며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흰 사슴을 지팡이로 가리켜 보였다.

“별로 큰일은 아닐세. 이틀 전에 도망친 자를 데려왔다네. 그러나 알고 보니 저 사슴은 사악한 요괴가 아니라, 이 선장이 오래전 잃어버린 선록이었지. 그래서 선장과 함께 사슴을 데리고 죄를 청하러 왔네. 부디 성황신께 우리가 왔다고 고해주게!”

관리는 이를 듣고 몹시 놀랐다. 일전에 벌어진 그 일은 저승에 파다하게 퍼져 그도 알고 있었다. 사슴을 다시 한번 자세히 바라보니, 요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비범하기 이를 데 없어 한눈에 봐도 선가(仙家)에서 머무는 동물이었다.

“토지공과 선장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즉시 성황신께 알리겠습니다.”

낮은 관리인 그로서는 바로 성황신을 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성황신께서 직접 나서실 만한 일이니, 토지신께는 일단 이렇게 말하고 바로 그는 판관에게 고하러 갔다.

성황이 다스리는 저승 내부에서는 문무 판관 모두 미심쩍은 얼굴로 이를 고하러 온 관리를 바라보았다.

“토지신과 선장 한 사람이 같이 왔다고? 그 선록은 며칠 전의 그 범인이고?”

“토지신께서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문무 판관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주간 순시관이 말하기를, 그 요괴가 공격당할 때도 반격하지는 않았다더군. 도망칠 때도 반격하지 않았다 하니, 수행할 때 어떤 구속이 있었나 보군.”

“일단 먼저 성황신께 가서 아뢰세. 이 일은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닌 듯하네.”

“그리하지!”

두 판관은 몸을 일으켜 저승의 주전(主殿)으로 향했다.

잠시 후 토지신과 계연, 그리고 사슴은 함께 저승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경기부 성황신과 문무 판관, 일전의 두 주간 순시관은 함께 입구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함께 성황신이 머무르는 주전으로 향했는데, 범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건물의 건축 양식은 윤재성이 묘사한 것과 비슷했다. 전체적으로 경기부 성황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내부의 장식만 조금 차이가 있었다.

계연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저승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음산한 분위기에 각종 원한과 악기(惡氣)가 특정 장소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에 사슴은 점점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 스무 명의 기관장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자 24개의 기관 중 한 곳에 속해있었다.

성황신은 주인 자리에 앉았고, 토지신과 계연도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이들은 전부 서 있는 상태였는데, 사슴 백약은 그들의 기세 탓에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가 계속해서 불안에 떨며 계연과 토지신을 바라보자, 그때마다 그들은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계연과 토지신은 몇 번이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다 이런 상태가 계속될수록 단칼에 거절당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경기부 성황신은 준수하고 우아한 외모를 가진 비범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토지신과 계연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안건에 대해 물어왔다.

토지신은 계연과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친 다음,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요물이 사라진 순간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군. 당시 영혼을 묶는 그물 아래에서 이 사슴이 돌연 사라졌고, 그래서 나도 필시 이 사슴을 돕는 고인(高人)이 있다고 짐작했네. 그 후 계 선생이 찾아와 만나게 되었는데…….”

토지신이 주로 이야기를 했고, 계연은 시시때때로 말을 보탰다. 둘은 서로 도와 가며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기관장들은 때때로 작은 소리로 의견을 나누거나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성황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계연과 토지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전은 소곤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긴 침묵에 잠겨 있던 성황신이 기관장들을 향해 물었다.

“법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벌해야 할 건 반드시 엄하게 처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 저승이 정이 없는 곳은 아니니, 정상을 참작해줄 만한 점이 있다면 마땅히 고려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악인을 벌할 때 확실히 해야 하듯이, 선한 이에게 상을 내릴 때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옳은 말입니다. 주염생이 이번 생을 선하게 살아온 것에도 분명 저 선록과의 관계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사슴은 긴박한 상황에도 우리 저승의 관리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그 심성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부군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도 귀히 여길 만합니다.”

상선사, 벌악사는 물론 음양사와 공과사의 기관장들이 모두 ‘법도는 지엄하다’라고 외쳤지만, 은근히 사정을 봐주는 태도였다.

백약도 이를 느끼고 기관장들이 모두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향해 낮게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성황신은 각 기관장이 저 백록을 동정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평소에 너무 엄한 모습만을 보여, 저자들이 내 심장이 정말 돌로 만들어졌다고 여기는 것인가?’

“좋다, 이만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다!”

성황신이 말하자 모든 이들이 말을 멈췄다. 계연과 토지신도 약간 긴장하여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앉았고, 백약은 더욱 몸을 낮추며 차마 성황신을 바라보지 못했다.

“쉬혼편(*淬魂鞭: 혼을 담금질하는 채찍) 260대를 벌로 내리겠다. 이를 버텨내면 주염생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마.”

성황신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는 모두 경악에 찼다.

“260대라니, 성황신이시여……. 이는 너무 중한 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성황신님, 그렇게 때린다면 저 사슴의 혼백은 모두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계연과 토지신은 쉬혼편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각 기관장이 연이어 주청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아주 무거운 형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성황신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제지했다. 곧이어 그는 사슴을 바라보았다.

“네 도력이 꽤 괜찮고 혼백도 단단한 편이구나. 그러나 쇠혼편에 맞는다면 기껏해야 200번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200번이 넘어가면 채찍 한 번마다 9할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주염생을 만나고 싶으냐?”

성황신은 몸을 일으켜 사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만약 네가 지금 후회한다면, 토지신과 계 선생의 체면을 생각해 떠나도록 해주마! 백약, 이래도 주염생을 만나고 싶으냐?”

토지신은 사슴의 눈빛을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몸을 막 일으켜 말리려는 찰나, 계연이 그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백약은 눈물이 어른거리는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

“만나고 싶습니다!”

“하하하! 좋다, 주염생이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은 26년이니, 너는 매년 채찍 열 번을 맞는 것으로 하자. 만약 어느 날 버티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떠나게 해주마. 어떠냐?”

성황신은 크게 웃은 후 이렇게 말했다.

자리에 서 있는 모든 귀신이 멍해졌다. 그중 계연과 토지신은 가장 정신을 먼저 차리고는 웃으며 멍하니 서 있던 백약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서둘러 백약에게 말했다.

“어서 머리를 조아리고 성황신께서 베푼 은혜에 감사 인사를 올리거라!”

이를 듣고 정신을 차린 백약은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계속해서 성황신을 향해 절했다. 그 후 몸을 돌려 계연과 토지신을 비롯한 각 기관의 기관장들에게도 성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마음에 그녀의 영혼이 맑아지면서 더욱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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