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웃는 얼굴의 호랑이
“두 소협(少俠), 혹 계 선생님을 아십니까?”
돌연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와 두형은 잠시 당황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살이 통통히 오른 얼굴의 위무외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 가주님? 여기는 어찌……?”
“하하하, 그저 지나는 길이었소이다. 재미있는 말을 들어서 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영안현에서 산 백호 가죽이 여러분들의 작품이었다니 놀랍군요!”
이렇게 말하며 위무외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 웃으며 말했다.
“방금 육 소협과 나누는 얘기를 조금 들었는데, 계 선생님 얘기가 나오길래 말입니다. 허허, 혹시 그 이야기를 제게 좀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두형은 마음이 조금 복잡했기 때문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위 가주님, 이 일은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당시 선생께서 최대한 다른 이에게 선생에 대한 말을 꺼내지 말아 달라고 말씀하셔서…….”
“어허! 두 소협의 그 말은 틀렸소이다. 계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저 위무외는 다른 사람이 아니지요. 저는 계 선생님과 아는 사이입니다. 선생께 술이며 간식 등을 선물해 드린 적도 있고, 선생의 정원에 자란 대추를 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위무외는 거의 즉시 그 ‘선생’이 계연임을 알아차렸다.
두형은 눈썹을 찌푸리고 좌우를 살폈다. 이 회랑과 연회석 사이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육승풍이 그를 찾아올 수 있던 것은 그와 같이 온 두씨 집안 사람들 덕분이었다.
위 가주는 오늘 하루 가장 바쁜 사람일 테니, 정말로 지나는 길이었다면 이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형은 육승풍이 계 선생의 이야기를 꺼낸 후에도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무외가 계 선생님을 안다는 말을 듣고 두형은 약간 놀랐다.
그들이 영안현을 막 떠났을 때, 그들 아홉 사람의 관계는 퍽 친밀한 편이었다. 당연히 계연이 영안현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의 후원에 대추나무가 있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무외의 말은 분명 진실일 터였다.
“위 가주님, 언제 계 선생님을 알게 되신 겁니까? 저희가 떠난 후에 육 형이 연말에 계 선생님을 뵈러 한 번 방문했다더군요.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허허, 육승풍 그자가 참 처신을 잘하는군. 자기가 먼저 찾아간 후에야 다른 이들에게 말하다니!’
위무외는 웃으며 육승풍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더니, 두형의 곁에 앉았다.
“당연히 영안현에서 선생을 알게 되었지요. 원래는 호랑이 가죽을 사러 간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강도들을 잡게 되어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을 알게 되었고 큰 가르침도 얻었지요!”
두형은 덕승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가 13인의 연지 도적과 그 배후 세력이 얽힌, 한때 떠들썩했던 그 사건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때 그 일은 위무외의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간 계기가 되었다. 위씨 집안의 새 가주가 무공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연막일 뿐이며, 그가 단순히 무공을 할 줄 아는 수준을 넘어 고수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위무외가 가진 ‘소면호(*笑面虎: 웃는 얼굴의 호랑이)’라는 강호의 별명도 널리 알려졌다.
위무외는 웃는 얼굴로 두형의 곁에 앉아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때 계 선생님께서 정말로 소협께 이 난관을 넘기면 앞길이 무한할 것이라는 말을 하셨습니까?”
“아……. 하산하며 휴식하던 도중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저를 위로하려 하신 말씀일 뿐입니다. 지금 저는 반폐인이나 마찬가지이니…….”
“혹 다른 사람에게 계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저 기세등등한 육승풍이라거나?”
위무외가 이렇게 묻자, 두형은 잠시 생각한 뒤 망설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런 말씀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쯧쯧쯧…”
위무외는 비록 아홉 명의 소협들이 어떻게 계 선생을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호랑이를 잡기 전인지 그 후인지, 또는 어떻게 해서 계 선생을 영안현으로 모시고 가게 된 것인 것 몰랐지만, 시종일관 웃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몇 마디 말로 위무외는 이자들이 비록 계 선생님과 일찍이 알게 되기는 했지만,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금세 파악했다.
춘혜부 바깥의 춘목강변에서 그 늙은 거북이 탄식하던 모습을 위무외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나도 육승풍 저자가 그리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두 소협이라면……. 허허허, 계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남길 정도였다니, 더는 자신을 비하하지 마시오.”
두형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위 가주님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저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팔이 잘린 고통을 막 견뎌냈을 때는 저도 웅대한 뜻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제는 제 가문에서도 저에게 더는 희망을 걸고 있지 않습니다.”
“달관했다고? 허허, 그렇지도 않은 듯한데……!”
위무외는 두형이 달갑지 않아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숨어있는 동안 듣고 본 것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난관’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오?”
이를 들은 두형의 마음에 잠시 파문이 일었다.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을 띤 위무외를 바라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텅 빈 오른쪽 소매를 만졌다.
위무외는 두형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도 신선에 관한 여러 고서를 연구해본 적이 있습니다. 계 선생님과 같은 신인(神人)께서 말씀하시는 난관이 육체적인 고통뿐이겠습니까? 팔이 잘린 상처가 나았으니, 그분이 말씀하신 고난이 지나간 것이라 여기십니까? 허어,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그 난관에 더 어울리는 상황이 아닙니까?”
두형은 신들린 듯 떠드는 위무외를 바라보며 한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인생을 다 산 듯한 얼굴을 하던 청년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위무외는 잠시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한 두형의 표정을 보고서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어떻게 계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계 선생님께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은인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알고 싶습니다.”
위무외는 양손을 교차해 소매 안에 넣고 퉁퉁한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로 앉았다. 이렇게 보니 그는 강호의 사람이라기보다 시골의 돈 많은 유지 같았다. 하지만 곧 두형은 상대방이 강호에서 ‘웃는 얼굴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실, 영안현에서 호랑이를 잡은 영웅이라는 칭호는 듣기 부끄럽습니다. 그때는 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두형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천천히 당시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아홉 명의 협객들은 젊고 혈기 왕성했다. 그들은 기인(奇人)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가 결국에는 호랑이 요괴를 만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이야기는 위무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백호 가죽이 사실은 호랑이 요괴가 뱉어준 것이라니, 그토록 문아한 계 선생님께서 꾀죄죄한 모습일 때가 있었다니,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인(高人)들이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를 잡기는커녕, 이 아홉 사람이 목숨이 붙은 채 돌아왔으니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홉 명의 협객들이 영안현을 떠나는 것까지 듣고서 위무외는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계연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자신보다도 아는 게 턱없이 적었다.
호랑이 요괴와 맺은 약속을 말할 때 두형은 어떤 감정의 변화도 없었고 어조도 평온했다. 그래서 위무외가 볼 때, 이들은 계 선생께서 그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일부러 호랑이 요괴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육승풍 저자가 연말에 영안현에 갔다 했으니, 혹 그에게서 대추나무가 열매를 맺어 선생께 드린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위무외가 이렇게 묻자, 두형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어허……. 육 소협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러니 말하지 않았겠지요, 하하하!”
위무외는 웃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바깥의 목소리들이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했으니 연회가 시작되려 하는 게 분명했다.
“갑시다, 두 소협! 제 아들의 만월 연회가 곧 시작되려 하니, 아비로서 빠질 수 없지요. 여기서 혼자 술 취하지 말고 함께 갑시다!”
위무외는 일어서서 한발 먼저 회랑을 걸어 나갔다. 배가 불룩 나와 길을 걷는 모습이 뒤뚱대는 것 같기도 했다. 몇 걸음 걷던 그는 돌연 고개를 돌려 막 일어서던 두형을 바라보았다.
“두 소협, 제가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호랑이 요괴와 맺은 약속 말입니다, 아마 8할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런 목숨을 건 약속을 겨우 3년도 안 되어 잊었는데, 앞으로 30년 후에는 또 어찌 되겠습니까? 소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기분에 제가 주제넘게 나섰군요. 하지만 꼭 기억하십시오, 허허허…….”
이렇게 말을 하고서 위무외는 성큼성큼 떠났다. 화원을 나서 연회석이 놓인 곳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축하드립니다’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도 예의를 갖춰 모든 이에게 인사했다.
* * *
두형이 제 가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연회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위씨 집안의 하인들이 연이어 요리를 들고 나타났고, 심지어 탁자 하나마다 숯불을 밑에 바친 훠궈(火鍋) 세 개가 올라와 연회의 온도를 높였다.
계주 지방에서 이런 방식은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모두 훠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두형도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술은 손도 대지 않고서 왼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고기를 데쳐 먹었다.
“두형 형님이 오늘 어쩐 일이지?”
“나도 모르겠어. 형님께서 저리 맛있게 먹는 모습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우리도 어서 먹자. 안 그러면 형님이 전부 먹어 버릴 거야!”
“그래, 그래. 돌아가려면 한참 걸리니 새해에도 도착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여기에서라도 많이 먹어야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형의 가문에서 두형과 친밀한 관계에 속하는 방계의 아우들이었다.
두형은 어쨌든 두씨 집안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천재였기 때문에, 지금은 비록 한쪽 날개가 꺾였다 해도 아직 그를 돌봐 주는 집안 어르신들이 있었다. 본래 그들은 그에게 무술을 닦는 것을 포기하고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는 데다 계속 피폐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가문 안팎으로 어떤 대접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오늘 위무외가 한 말이 두형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더는 그가 의기소침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어차피 덕승부까지 다시 오게 되었고 새해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테니, 만월 연회가 끝나고 나면 영안현에 한 번 가봐도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