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외팔이 대협(大俠) (2)
잠시 후, 윤청은 다시 신이 나서 책 한 권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저 왔어요!”
윤청은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에 책을 내려놓았다. 손이 건조해 종이가 잘 넘어가지 않자,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헤헷, 이건 제가 쓴 거예요. 계 선생님께서 이야기해주신 재미난 일들을 잊어버릴까 봐 여기에 적어 놓았거든요.”
윤청은 위쪽에 두형의 이름과 간단한 소개가 적힌 책장을 폈다. 그 외에도 그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과 겪은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서체가 가지런했다.
“히히, 여기 보세요. 계 선생님께서 제게 외팔을 가진 두 명의 대협 이야기를 해주셨거든요. 그중 한 명이 바로 대협이고, 다른 한 명은 양과(楊過)라고 하는 분이에요.”
“양과? 그자는 어떤 사람이냐?”
“대협은 모르실 거예요. 흠, 그분은 우리 대정국 사람이 아니고, 이 시대의 사람도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분명 옛날 사람일 텐데, 일단 그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쨌든 그분은 대단하신 분이었대요. 계 선생님조차 대단하다고 하는 그런 분이요!”
윤청은 책을 뒤적이며 자신이 적은 불완전한 내용의 이야기를 두형에게 보여주었다.
어려서부터 기인의 밑에서 자랐고, 괴롭힘과 무시를 당했으며, 백부의 자녀들에 의해 팔이 잘렸고, 혈혈단신으로 도망쳤는데 기이한 독에 당해 수모를 겪다가…….
여기까지 읽은 두형과 두 아우는 머리털이 다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저리 수많은 고난을 겪고도 죽지 않았어. 계속해서 살아갈 투지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지?’
그는 고되게 수십 년을 수련하였고, 항상 도량이 넓고 정의로운 자였다고 한다.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의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신조 대협(神雕大俠) 양과(*<신조협려>라는 무협 소설 주인공)’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적던 때 윤청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계연은 성년이 된 양과의 사랑 이야기를 많이 줄여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양과가 무공을 닦는 과정과 천하의 대의를 세우는 부분이 더욱 강조되었다.
“옛날에 정말로 이런 자가 있었다고? 계 선생님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윤청은 두형의 한 아우가 하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다.
“지어냈다고요? 계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꾼인 줄 아세요? 계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나 있으신 줄 아세요? 선생님은 심지어 성황……!”
여기까지 말한 윤청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어쨌든 이건 전부 사실이에요, 믿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윤청은 다시 흥분에 차서 두형에게 말했다.
“두 대협, 계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외팔이 대협은 딱 두 명뿐이에요. 양과라는 분은 대단한 분이셨고, 대협께서 바로 두 번째예요!”
‘그쪽이 두 번째’라는 한 마디에 두형은 잠시 넋이 나간 듯했다. 그는 기가 찬 듯 몇 번 실소하다가 곧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참, 마침 두 대협께서 오셨으니 제가 대추를 몇 개 따드릴게요. 대추나무도 동의할 거예요. 저도 이참에 한 번 더 맛볼 수 있겠네요, 하하하!”
윤청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하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대추나무 아래로 총총 뛰어갔다.
‘대추나무가 동의한다고?’
이 말을 들은 두형의 일행들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상 깊이 생각지는 않고 윤청이 날렵하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윤청은 앉아 있는 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이야말로 저 대추를 딸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추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했는데, 불타는 듯 빨간 대추들이 초록 잎 사이에 숨었고 대부분이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이 대추들은 일반 대추보다 훨씬 컸는데, 지금 시기에 비교할 만한 다른 대추는 없지만, 대략 보통 크기의 파란 대추보다 세 배 정도의 크기였다.
두세 번 만에 높은 곳에 오른 윤청은 신이 나서 가장 가까운 대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대추를 잡았는데, 그 모습이 조금 힘겨워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세 사람은 이 소년의 동작이 별안간 부드러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소년이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혼잣말인지, 아니면 황당하게도 대추나무에 대고 하는 말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추나무야, 아래에 계신 두 대협과 일행분들은 계 선생님의 옛 친우시래. 선생님과는 알게 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이삼 년 만에 오늘 처음 방문하신 거니까 대추를 좀 먹어도 괜찮겠지?”
윤청은 아래에서 호기심에 찬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보다가, 말을 마치고는 조심스럽게 열매를 땄다.
‘탁’ 소리와 함께 큰 대추 열매가 가지에서 꺾였다.
“헤헤헤……. 잘됐다! 따게 해줬구나, 정말로 허락해줬어!”
나무 위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면, 윤청은 손과 발을 흔들며 뛰어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손뼉을 치며 몸을 몇 번 뒤흔드는 것으로 흥분을 표출했다.
이를 본 두형의 일행은 놀라 넘어질 뻔했다.
‘저 아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러지?’
“나무 아래로 가서 서 있자. 만약 저 아이가 떨어지면 얼른 받아야 한다!”
“네!”
“그럽시다!”
두형의 건의대로 세 사람은 급히 몸을 일으켜 윤청이 몸을 흔들다가 떨어질까 봐 대추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윤청은 개의치 않고 대추 열매의 향기를 맡더니 침을 꿀꺽 삼킨 후 두형에게 던졌다.
“두 대협, 받으세요! 땅에 떨어뜨리지 마시고요!”
두형은 빨간 것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왼손으로 가볍게 받아냈다. 자세히 대추를 살펴보니 동그랗고 실한 것이 빨갛게 윤기가 나서, 보고만 있어도 식욕이 일었다.
윤청은 한 개를 따고 나서 담이 좀 커졌기 때문에 손을 뻗어 또 하나를 잡았다.
“두 대협께 대추 하나만 주려는 건 아니지?”
이렇게 말하며 열매를 비틀자 ‘탁’ 소리와 함께 대추가 손에 들어왔다.
“헤헤! 한 개는 한 입이면 끝나버리니까 사실 맛도 잘 안 나거든. 저 일행은 세 사람이고 또 나도 대추 따느라 힘들었는데…….”
윤청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을 뻗어 대추를 잡아챘다. 하나, 둘, 셋, 넷…… 모두 일곱 개를 따고서 윤청이 여덟 번째 열매에 손을 댔을 때, 나뭇가지가 약간 몸부림치는 듯 느껴졌다.
‘이런, 나무가 허락을 안 하네!’
“하나만 더, 응? 딱 하나만 더 딸게!”
윤청은 진심을 담아 간청했고, 손에 힘을 풀지 않고서 온 힘을 다해 대추를 떼어내려 했다.
솨아아…… 솨……!
그러자 약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윤청이 있는 힘을 다해 당겨도 대추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나뭇가지 하나가 윤청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으아아……!”
목에 간지러움을 느낀 윤청이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래에 있던 두형의 아우 중 하나가 서둘러 손을 뻗어서 윤청을 품 안에 받았다.
윤청은 나무에서 떨어진 후에도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따지 못한 대추를 바라보면서 탄식하며 불평을 내뱉었다.
“에잇, 일곱 개만 주다니. 정말 쩨쩨해!”
두형 일행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혼자 나무에 올라 대추를 따는 것도 위험했는데, 혼잣말하다가 나무를 단단히 붙잡지 않아 떨어진 마당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방금 자신들이 아니었으면, 이 소년은 떨어져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얘야, 이렇게 나무에 올라가면 위험하단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 있어서 다치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는 절대 그러면 안 돼!”
두형의 아우 하나가 윤청에게 충고했지만, 윤청은 그다지 귀 기울여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대협 일행이 있어서 떨어진 거예요. 아니었으면 안 떨어졌을 거예요.”
이를 들은 두형 일행은 그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기가 떨어진 게 우리 잘못이라는 뜻인가?’
“아이, 알았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헤헤, 이 대추 좀 보세요. 예전에 먹었던 건 전부 잊으세요. 이런 건 보지도 못했을걸요!”
윤청은 호주머니를 열어 안에 있던 대추 여섯 알을 보여주었다. 이것과 두형 손에 든 것을 합치면 모두 일곱 개였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였다.
다시 탁자 앞에 앉은 이들은 대추 일곱 알을 한 줄로 세워놓았다. 윤청은 즉시 손을 뻗어 한 개를 가져갔다.
“이건 제 수고비예요!”
윤청은 이렇게 한마디 하고서 두형의 두 아우를 보다가 다시 두형에게 말했다.
“남은 여섯 개는 대협이 네 개 가지시고, 다른 두 분은 운 좋게 됐으니 하나씩 가져가세요!”
이렇게 근엄한 태도로 말하는 윤청은 마치 애어른처럼 보였다.
“왜 우리는 하나씩만 주는 거야?”
두형의 두 아우 중 하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불평했다.
“한 개 얻은 것도 운이 좋은 거예요! 저도 달랑 하나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만약 두 대협과 함께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도 못 먹었을 거예요!”
윤청은 이렇게 간단히 그의 불평을 무마시켰다.
“달랑 하나라고? 너는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딸 수 있잖아!”
그도 윤청보다 겨우 서너 살 많을 뿐이었으므로, 아이와 말다툼하는 것이 유치한 줄은 알지만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러자 윤청은 열이 바짝 올라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직접 가서 한 번 따 보세요. 따올 수 있으면 대단하다고 인정해 드릴게요!”
“그깟 대추 따면 따는 거지!”
두 사람은 입씨름을 했고, 두형은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두월(杜越), 여기가 우리 집도 아닌데 왜 이리 불평불만이냐?”
아우를 잘 단속한 다음 두형은 윤청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대추는 한눈에 봐도 보통 대추가 아니니, 이를 손수 따와 그들에게 대접한 것은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헤헷, 두 대협께서 사리에 밝으시군요. 자,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드셔보세요. 이런 대추는 황상께서도 보시기만 하면 먹고 싶어 하실걸요!”
윤청은 농담을 한마디 하고는 자신의 대추를 급히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한 소리와 함께 향긋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를 본 세 명의 두씨 집안 사내들도 식욕이 솟구쳤다.
그들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대추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아삭’ 하고 한 입 베어 물고서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선하고 향긋한 맛이 혀끝에서 터지자, 그들은 더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베어 물었다.
대추즙과 과육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온몸이 따뜻해졌다. 마치 뜨끈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을 흐르는 것 같았다.
‘이 대추는 혹시 천재지보(*天材地寶: 희귀하고 특수한 효능이 있는 식물 또는 광물)인가?’
두형이 몹시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손안에 든 대추를 이미 깨끗하게 먹어 치운 후였다.
그의 두 아우들도 흐르는 침을 삼키며 탁자에 남은 세 개의 대추를 바라보았다.
두형은 아까웠지만 두 개를 아우들에게 밀어주었다. 아직 먹으라고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윤청이 다가와 대추 두 개를 다시 되돌려 놓았다.
“안 돼요! 이 대추는 두 대협만 먹을 수 있어요! 양과 대협에게 기이한 뱀 쓸개가 있었다면, 두 대협에게는 이 대추가 그런 거예요. 저들은 더는 먹을 수 없어요!”
두 아우 중 하나가 뭐라고 입을 떼려 했으나, 윤청은 그가 하려는 말을 알아챈 듯 머리 위의 대추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먹고 싶으세요? 그럼 스스로 가서 따세요, 따는 것 허락해 드릴게요. 해보세요!”
“따는 게 뭐가 어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