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27화 (127/892)

127화. 뜬금없이 나타난 바둑돌

대추를 이미 맛본 그는 더욱더 먹고 싶어졌다. 그는 단번에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라 손을 뻗더니 가장 가까운 대추를 잡았다.

한번 가볍게 비틀어 보았는데, 대추는 나뭇가지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자 나뭇가지가 둥글게 휘어졌으나, 대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좀 떨어져라! 으윽……!”

그가 젖 먹던 힘을 짜내 당기자 나뭇가지가 점점 더 크게 굽었다. 나뭇가지가 받는 탄력이 점점 커지다가 돌연 그가 잡고 있던 가지의 힘이 강해지더니, 끝내 활시위에서 튕겨 나가는 것처럼 그의 몸이 내던져졌다.

“아악!”

그는 나뭇가지에 튕겨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잡을 곳이 없어서 공중에서 팔다리를 휘젓다가 결국 떨어지고야 말았다.

다행히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는 떨어질 때 나뭇가지를 잡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손에 쥔 나뭇가지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워서, 그가 깜짝 놀랐을 때는 이미 손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후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쓰읍……. 분명히 가지를 잡았는데……. 오히려 그게 내 중심을 흩뜨렸어…….”

두형의 아우는 잇새로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나뭇가지를 잡았을 때, 원래대로라면 땅에 선 채로 착지할 수 있었다.

솨아아…… 솨아……!

이때, 대추나무의 가지와 잎이 바람도 없는데 혼자 흔들렸다. 좌우로 흔들리며 ‘솨아’ 하는 소리가 나자 두형을 비롯한 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의 진동이 더욱더 세지더니, 그림자가 크게 하나로 합쳐지며 햇빛을 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세 사람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마치 대추나무가 그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나무의 흔들림은 얼마간 계속되었는데, 주위에는 여전히 어떤 바람도 불고 있지 않았다.

“흥, 어디 봐요. 대추 땄어요?”

윤청의 목소리가 세 사람이 느끼던 희미한 공포감을 희석했다. 다시 한번 이들이 나무를 바라보자 이미 흔들림이 멎어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형은 돌연 우규산에서 만난 호랑이가 생각났고, 이어서 ‘요괴’라는 글자가 마음에 떠올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무는 요물이 아닌 것 같았다. 탁자 위의 대추를 바라보는 그는 일종의 선과(仙果)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 * *

곧 새해가 다가오기 때문에 영안현의 연말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윤청은 집안의 먼지를 털면서 거안소각도 때때로 돌보았다.

두씨 집안의 세 사람은 윤청을 도와 계연의 처소를 청소한 후 곧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윤청의 어머니가 자신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지 않게끔 영안현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윤청은 아직도 어린 나이였고 당시 계연의 설명도 완전하지 않아서, 기록해 놓은 신조대협의 이야기는 몇 글자 되지 않았다. 대부분 간략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어서 전개와 중간 부분은 한 번에 써 내린 듯했고, 마지막 부분만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윤청과 같은 상상력은 없었지만, 두형의 일행은 그자가 그렇게도 많은 고난을 겪고서 결국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데에 몹시 놀랐다. 그러나 감정이입이 될 정도로 현실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대추나무 사건을 겪고서 최소한 두형만은 신조대협의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한 의심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는 자기의 두 동생보다는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팔이 잘린 고통에 대해서 말이다. 호랑이 요괴 일이 있고 나서 집에 돌아온 반년 후, 결국 팔을 잘라야 했을 때 그가 느낀 절망과 슬픔은 아직도 밤에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러나 위씨 집안의 만월 연회에서 위무외와 나눈 대화와 거안소각에서 듣고 본 일들이 두형의 메마르고 적막한 마음에 불씨를 지폈다.

세 사람은 외투를 입고 말을 탄 채로 매서운 바람을 뚫고 달렸지만, 대추를 먹어서인지 온몸이 따뜻했다. 그중 세 알이나 먹은 두형은 끊이지 않는 힘이 생긴 것처럼 열이 계속해서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진기(眞氣)가 온몸의 혈 자리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양과라는 분은 대단한 분이셨고, 대협께서 바로 두 번째예요!’

윤청의 맑은 목소리가 두형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다. 기이한 대추의 힘이 그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간략하게 서술된 이야기에 나온 양과라는 인물은 그를 도울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두형 자신에게는 최소한 두씨 집안이 있었다!

“왼손 검법이 없으면 어때, 우리 집안의 오른손 검법은 뭐 하늘에서 떨어졌나!”

두형은 낮게 혼잣말을 했다. 무언가 내뱉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돌연 왼손으로 등 뒤의 칼을 뽑고는 말 등 위에서 공중으로 회전하며 솟구쳐올랐다. 그 후 전방을 향해 매섭게 칼을 휘둘렀다.

스슥-!

칼끝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르자, 두형의 칼이 지나간 자리에 희미한 반달 모양의 선이 생겨났다.

다시 몸이 내려앉는 순간, 말 등에 발을 디딘 후 다시 한번 공중으로 솟구쳐오른 두형은 다른 방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의 몸이 잇따라 공중으로 오르내리며 셀 수 없이 연습했던 광도십이식(狂刀十二式)을 왼팔로 재현해냈다. 초식을 한 번씩 따라 할 때마다 힘과 기세가 점점 더 맹렬해졌고, 몸속의 열이 솟구쳐 경맥을 따라 넘쳐흘렀다.

마지막 초식인 번운답랑(*翻雲踏浪: 구름을 뒤집고 파도를 타다)을 표현해내던 두형은 큰 소리로 포효했다.

“이 난관은 오늘로 끝이다!”

솨앗-!

칼끝의 날카로움이 정면을 덮쳐오는 북풍을 산산이 베어냈다. 그리하여 잠시간은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서부터 다시 가볍게 말 등에 내려앉으며 칼을 갈무리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두형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3년 동안 십이 식을 연습했으나, 오늘 처음으로 완벽히 표현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말 등 위에서 따라 한 초식이라고 자위해 보아도 오른팔이 완전했을 때처럼 물 흐르듯 막힘없는 수준과는 비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두형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얼마간 퇴보한 내공도 다시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하아…… 후우…!”

찬 바람이 그의 호흡에 따라 뱃속으로 들어왔지만, 곧 그 안의 열기에 녹아들었다. 방금 공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베면서, 그는 피폐하고 나약했던 자신을 한 칼 한 칼 베어 나갔다.

두 동생은 뒤에서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확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지만, 두형이 처음 칼을 뽑았을 때부터 후에 칼을 거둬들일 때까지의 미친 듯한 몸짓을 보며 두형이 그사이에 변한 것을 느꼈다.

“그만 꾸물대고 어서 덕승부로 돌아가자. 남은 대추 한 알은 위 가주께 드리고, 우리는 집으로 가자꾸나. 섣달그믐까지는 맞춰가지 못하겠지만, 새해는 집에서 보내야지!”

심경의 변화로 인해서인지 두형의 목소리는 더욱 짧고 날카롭게 변했다.

* * *

경기부의 어느 기원(棋院)에서 두 노인의 대국을 보고 있던 계연은 돌연 무언가를 느끼고 손안에 나타난 바둑돌을 바라보았다. 바둑돌을 통해 두형이 팔 하나로 칼을 휘두르며 매서운 바람을 가르는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바둑돌…… 너무 뜬금없이 나타난 것 아닌가?’

그렇다 해도 손안에 쥔 바둑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계연은 두형의 바둑돌을 얻게 되어 기뻤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덟 사람을 일부러 찾아갈 계획은 없었다.

바둑돌은 억지로 구해서는 얻을 수 없었고, 바둑돌이 될 만한 이들도 다들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인연의 영향이 더 컸다. 육 산군과 아홉 소협이 맺은 약속 또한 계연이 그들과 연이 닿아 생긴 일이다.

“아이, 안 되지, 안 돼. 한번 내려놓은 걸 무르는 게 어디 있소!”

“좀 봐주게, 방금 내가 딴생각을 좀 해서 그래. 이건 무효로 쳐줘!”

그때 바둑을 두던 두 노인이 말다툼을 시작했고 계연의 생각도 거기서 끊겼다.

‘저 두 사람 또 시작이네.’

한 명은 판을 무르고 싶어 하고 한 명은 물려주기 싫어하는 일은 바둑 대국 중에 흔하게 일어났다. 요 며칠간 계연은 특히 이 두 사람의 대국을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두 노인이 이 기원에서 그들을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력과는 달리 바둑을 두는 방식은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다.

일단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이 두 노인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해결을 보았다.

“알았네, 알았어. 싸우지 마세나. 우리 규칙대로 하지!”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단숨에 말싸움을 멈추고 그 규칙에 따라 계속해서 바둑을 두었다.

고수들은 대국 후반으로 갈수록 돌 하나 내려놓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어지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하루에 몇 판 두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대국이 끝날 때가 되자 이미 반 시진이 넘게 지나 있었다.

돌을 물리고 싶어 했던 노인은 끝의 끝까지 고민하며 한 수를 두었고, 봐주지 않던 노인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돌을 내려놓았다. 후반부에 접어들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승부가 났는데도, 두 사람은 고집을 부리며 결국 승부가 끝날 때까지 두었다.

계연이 좌우를 살피자 노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 있었다. 이들 모두 이제 곧 재미있는 장면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것 보게, 내가 이겼잖나. 내가 아까 무르게 해줬으면 이겼을 거라고 생각하나?”

“흥, 어서 복기(*復棋: 패인을 분석하기 위해 바둑을 두었던 그대로 다시 한번 두는 것)나 시작하지!”

두 노인은 몇 마디 입씨름을 하며 돌을 거둬들인 후, 다시 하나씩 바둑판 위에 놓기 시작했다. 곧이어 돌을 물리느냐 마느냐 다퉜던 그 지점에 이르렀고, 상대 노인은 이번에는 이를 허락해 주었다.

“잘 보게, 내가 아까 잠시 딴생각을 해서 잘못 놓지 않았다면 자네는 반드시 졌을 거야!”

“웃기는 소리! 어디 두고 보지!”

두 노인의 대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전 판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전 판에서 여유로웠던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모양새였고, 다른 한 명은 이번 판에서는 진지하게 응수했다. 둘의 바뀐 표정이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구경꾼들은 이번 판의 결과가 과연 뒤집힐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긴 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돌을 내려놓지 않을 때도 있어서,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우 지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뺏고 빼앗기는 승부는 소리 없는 전쟁과 같아서, 그들에게는 모든 대국이 다채로웠다.

계연의 눈에는 두 노인이 두는 대국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보였다. 다른 이들에게 바둑판은 가로세로 각 19줄로 흑과 백이 서로 다투는 삼백여 개의 지점이 있을 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달랐다.

바둑판은 시시때때로 그의 의식 세계와 중첩되어, 흑과 돌이 각각 퍼져 나갈 수 있는 범위가 무한대로 늘어났으며 빼앗을 수 있는 곳도 무한대였다. 두 돌이 바둑판에서 서로 맞설 때마다 음양의 변화가 일어났다. 두 노인이 바둑을 두는 과정이 계연에게는 상생(相生)의 과정으로 변화하여 보였다.

그래서 계연이 겪고 있는 것은 중첩된 두 경계의 현묘함이었다. 하나는 규칙에 따라 두는 바둑판 위의 대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의식 세계 안에서 흑과 백의 다음 수가 무한히 보이는 장면이었다. 체험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게 대국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번 대국은 결국 처음에 졌던 노인이 이기게 되었다. 두 노인은 자연히 또 다른 입씨름을 시작했고, 주변의 구경꾼들은 말을 얹거나 보태며 토론했다.

“인제 그만두고 집에나 가야겠네. 섣달그믐날 아닌가.”

“그래야지. 내 아직도 춘련(*春聯: 신년에 문이나 기둥 등에 써 붙이는 글)을 사지 못했다네!”

“시험 보러 온 서생들에게 써 달라고 하면 되지. 글 잘 쓰는 이에게 말일세!”

“그러면 되겠군!”

이렇게 떠들며 그들은 기원을 나섰다.

이에 정신을 차린 계연이 기원 안을 둘러보자, 그사이에 많은 이들이 떠난 상태였다. 대국 몇 판 관람한 사이에 시간은 어느새 오후가 되어있었다. 한 종업원은 찻잔과 바둑판 등을 정리하고 있었고, 다른 이는 기원 앞에 춘련을 붙이고 홍등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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