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모두 모였네
“계 선생님, 저와 대국 한 판 두시겠습니까?”
기원의 주인장이 높은 사방관(四方冠)을 쓰고 계연에게 온화한 태도로 물었다.
어떤 일을 업으로 삼으면 그에 대한 이해도가 높듯, 기원의 주인장은 계 선생이 바둑을 두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 그가 고수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기질이 비범하여 주인은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몇 번 같은 대국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대국을 바라보는 선생의 얼굴이 묘하게 변할 때마다 마치 그가 대국의 방향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 알 길이 없을 뿐이었다. 게다가 주인장에게 있어 이 기원 내에서는 저 두 노인을 빼고는 눈여겨볼 만한 이도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바둑을 잘 두지 못해서 부끄러운 꼴만 보이게 될 거예요. 오늘 섣달그믐인데 일찍 기원 문을 닫지 않으시나요?”
계연은 완곡하게 거절한 후 예의 바르게 물었다. 기원은 돈을 벌어들이기 힘들기에, 진정으로 바둑을 좋아하는 고상한 이들만이 기원을 열었다. 이 주인장도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른 생업이 있다고는 해도 기원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가끔 실력이 대단한 이가 오면, 찻물과 간식을 제공하면서 돈은 받지 않고 기보(*棋譜: 두어진 바둑의 순서를 기록한 도면)에 대국을 기록했다.
주인장은 기원 안에 아직 대국 중인 일고여덟 곳을 바라보았다.
“종업원에게 맡기면 됩니다. 어쨌든 저분들이 바둑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요. 게다가 저는 문곡가(文曲街)에 가서 신년을 위한 대련을 사야 하거든요.”
“제가 마침 서법이 뛰어난 서생 한 분을 아는데, 그 길에 노점을 펼쳐 놓고 있어요. 저와 같이 보러 가시는 게 어떠세요?”
그는 계연의 제안이 마음에 든 데다 이미 예전부터 이 계 선생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문곡가로 향했다.
* * *
문곡가는 원래 시정 백성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나중에 이르러 정식 이름이 된 경우였다. 왜냐면 과거 시험을 치러 온 서생들이 많이들 이곳에 노점을 펼쳤기 때문이다.
회시와 전시가 삼 년에 한 번이라지만, 경기부에 항상 머무르는 자들도 적지 않아 문곡가는 점점 더 번성했다.
이곳은 글을 파는 곳일 뿐만 아니라, 여러 서생의 실력을 음미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실력에 자신 있는 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곳에 노점을 열 수 있겠는가?
단청(*丹靑: 중국 고대 회화(繪畵) 예술을 일컬음), 대련(*對聯: 한 쌍의 대구(對句)의 글귀를 종이나 천에 쓴 것), 서법(書法) 모두 그 서생의 실력에 따라 크게 달랐다. 그래서 시험에 참여하러 오는 이들은 노점을 열지 않더라도 이곳에 와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조정에서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관원들도 가끔 올 정도였다.
윤재성과 사옥생은 얼마간 돈이 모자랄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노점을 열었다. 다만 사옥생의 서법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그는 거리를 구경하러 다녔고, 윤재성은 글을 써주는 노점을 열었다.
본래 길이 넓지 않은 데다 주위에 찻집과 객잔 등 높은 건물이 막고 있어서, 길에는 찬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 계연과 기원의 육(陸) 사장이 길을 지날 때, 마침 윤재성의 노점을 많은 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두 노인도 이곳에 있었다.
“육 사장님, 저 노점의 주인이 제가 아는 분이에요. 계주의 해원이고 실력이 대단하지요. 중요한 것은…….”
여기까지 말한 계연은 피식 웃었다.
“저도 계주 사람이라 저 윤 해원과는 아는 사이입니다. 저분은 호연정기를 가졌기 때문에, 그가 쓴 춘련에는 맑은 기운이 서려 있지요. 집에 깃든 더러운 기운을 씻어내 준답니다.”
“그런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그럼 저는 반드시 저분께 대련 몇 개를 써 달라고 부탁드려야겠네요.”
육 사장은 웃으며 계연을 따라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까워지자, 계연은 윤 훈장님을 방해하지 않도록 약간의 술법을 발휘해 인파의 바깥쪽에 섰다. 반면 육 사장은 오히려 노점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좋은 글입니다!”
“대단하군요, 정말 잘 쓴 글입니다.”
“백 마리 새가 봄을 알리며 세월이 바뀜을 기뻐하고, 용 떼는 상서로운 징조를 보이며 새로운 세기가 온 것을 맞이하네(白鳥鳴春堪喜人間換歲, 群龍獻瑞逢世紀更新)…… 뛰어난 글이오!”
“이 서생은 누구십니까?”
“보나 마나 대단한 분이시겠죠!”
“선생, 제게도 한 부만 써주십시오. 값은 원하시는 대로 내겠습니다!”
윤재성은 붓을 거둔 후 먹물을 불어 말렸다. 저릿한 팔을 문지르던 그는 어느새 자신의 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여러분, 잠시만요. 한 분씩 와주세요, 한 분씩!
“내 차례요, 내 차례! 선생, 크게 복(福) 자 몇 개만 써주십시오.”
“좋습니다!”
윤재성은 더 큰 털붓으로 바꿔 든 후에 붉은 사각형 종이를 마름모꼴로 돌려 커다란 ‘복’ 자를 썼다. 서체가 부드러웠으나 힘이 깃들어 있어, 큰 글씨로 보자 그의 서법이 어떤 수준인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정말 잘 쓴 글자로군!”
“정말 감사합니다!”
윤재성은 그를 향해 웃다가, 계연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글자를 부탁한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집에 돌아가 글자를 붙일 때 대문 말고 다른 문에는 글자를 거꾸로(倒) 붙이세요.”
“거꾸로 붙이라고요?”
“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복이 온다(*福到: 도(倒: 거꾸로 되다)와 도(到: 도착하다)는 발음이 같다.)’는 뜻이 되겠구먼?”
모인 인파 중에는 학식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아 즉시 그 숨겨진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많은 이들이 뜻을 깨닫고 이를 칭송했다.
윤재성의 장사가 한창 잘되고 있을 때, 계연은 또 다른 벗을 마주쳤다. 화려한 옷을 입은 늙은 용이 문곡가의 다른 방향에서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순간 계연을 향해 공수했고, 곧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내 춘위(*春闈: 봄에 치르는 과거 시험으로 회시(會試)를 뜻함) 전까지는 계 선생이 반드시 경기부에 있을 거라는 걸 알았지! 윤재성이라는 자를 찾으면 선생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네!”
계연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늙은 용은 섣달그믐날에 통천강에서 가족들과 명절을 보내지 않고 자신은 왜 찾아왔단 말인가?
계연이 다른 쪽을 바라보자 그곳엔 마침 장원 나루터에서 본 ‘3공자’가 있었다. 보아하니 그도 윤재성을 찾아온 듯했는데, 한 하인이 그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곧장 윤 훈장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이들이 비록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계연은 속으로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마작(*麻雀: 네 사람이 136개의 패를 가지고 여러 모양으로 짝짓기를 하여 승패를 겨루는 게임)을 쳐도 되겠네!’
그러나 저 3공자의 일은 계연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윤 훈장 스스로 응대하게 둘 생각이었다.
계연은 인파에서부터 몇 걸음 멀어져서 가까이 다가온 늙은 용에게 말없이 공수하며 그를 맞이했다.
늙은 용은 계연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다시 한번 계연에게 인사하고는 그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길모퉁이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인파에 둘러싸인 윤재성의 노점을 향해 있었다.
“계 선생께서는 춘위가 끝난 후에 경기부를 떠날 예정이시오?”
해시(解試)의 계방처럼, 대정국에서는 도성에서 보는 과거시험을 춘위라고 불렀다. 원래는 회시만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요즘에는 전시도 함께 일컬었다.
계연은 이제 윤재성의 노점에 가까이 다가선 ‘3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인파를 쫓아내려 하지는 않고 흥이 오른 얼굴로 사람들 곁에 서서 윤 훈장이 글을 쓰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늙은 용의 질문을 듣고 계연은 답은 하지 않고 ‘3공자’를 가리키며 반문했다.
“응 선생께서는 혹 새로 온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응굉은 계연이 가리키는 자를 바라보았다. 그자에게서는 호방한 기운이 느껴졌으며 기세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익힌 자들을 주변에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자세히 관찰하니 그의 몸에서 솟구치는 기운에서 자색(紫色)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보아하니 황족이나 종친인 것 같소만?”
“맞습니다. 저자는 바깥에 나올 때 스스로를 ‘3공자’라고 불러요. 실제로는 ‘진왕(晋王)’이라고 불리며 당금 대정국 황제의 셋째 아들입니다.”
“오, 황제의 셋째 아들이로군.”
늙은 용은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통천강이 경기부에 맞닿아 있기는 했지만, 대정국 왕조의 흥망성쇠는 그에게 어떤 의의도 없었다. 그보다는 윤재성이 더욱 늙은 용의 주의를 끌었다.
계연은 응굉을 향해 말했다.
“대정국에서는 주로 적장자(嫡長子)를 태자로 세우지만, 당금의 황제는 기력이 왕성하고 성격이 강해 아직도 태자를 세우지 않았지요. 게다가 황제는 나이 많은 장자를 눈에 거슬려한다고 합니다.”
늙은 용은 약간 흥미가 생겼다.
“계 선생께서는 저 진왕이라는 자가 미래에 태자, 더 나아가 황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보십니까?”
“하하, 그저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재능과 역량이 너무 드러나 있어, 후계 다툼을 시작한다면 도처에 위기가 숨어있겠네요.”
늙은 용은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의 좋은 벗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끔은 그조차 계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세상 만물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가, 또 어떨 때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계 선생,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로 속세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날이지요. 저와 같은 이들에게도 오늘은 의미 있는 날입니다. 이 늙은이를 따라 수부(水府)로 가서 이야기나 나누지 않겠습니까? 물론 윤 해원을 데리고 오셔도 됩니다. 저 서생은 꽤 괜찮은 자 같더군요.”
계연은 진지한 얼굴을 한 응굉을 보고서 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생(儒生)의 뜻은 사직에 있으니, 윤 훈장님은 속세를 벗어난 것과 너무 많이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도 이 일에 관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저 진왕이라는 자가 어째서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갈 준비는 안 하고, 윤 훈장님을 왜 찾아왔는지 궁금해서요. 참, 그러고 보니 황제는 저녁에 연회를 여는 것을 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계연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반대로 늙은 용을 초대했다.
“오늘 같은 날에 수부로 가서 먹고 마시는 건 좀 심심할 것 같은데요. 응 선생께서도 오늘 저와 함께 인간 세상의 명절을 경험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성의 기상이 어떠한지도 볼 수 있고, 신년이 될 때는 분명 볼만한 것이 있을 거예요.”
응굉은 듣자마자 웃음 지었다. 무슨 일을 하든 함께하는 사람이 중요한 법이다. 예전이라면 그도 이런 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계연이 궁금해하는 것을 보니 그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왕 계 선생께서 흥이 오른 것 같으니 이 늙은이도 함께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계연은 윤재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하고, 미소를 지으며 늙은 용과 함께 그의 노점에 가까이 다가갔다. 다만 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지다가 허공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