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왕부(王府)의 가족 연회
이때는 문곡가의 다른 서생들도 모두 윤재성의 노점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윤재성은 확실히 뛰어난 재주를 갖추고 있어 그가 쓴 춘련은 서법이 출중할 뿐 아니라, 대구가 서로 잘 들어맞고 뜻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다른 서생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쪽에 서 있던 사옥생은 어느새 전문적으로 돈을 받고 거슬러주는 일만 하고 있었다.
다만 글을 많이 썼더니 손목이 시큰해져서, 윤재성은 이미 몇 번이나 손목을 주물러댔다. 다행히 둘러싼 이들 중 진짜로 글을 사기 원하는 이들은 더는 많지 않았다.
“얼음과 눈이 녹으니 강산은 다시 온갖 빛깔로 뒤덮이고, 겨울 가고 봄이 오니 신주(*神州: 옛 중국, 중원(中原)을 가리킴)는 또다시 온갖 자태를 드러내네(氷消雪化江山又呈五光十色, 冬去春來神州再現百態千姿).”
“정말 잘 쓴 글이야!”
“그러게나 말일세. 듣자 하니 이 자가 계주의 해원으로, 이름은 윤재성이라고 하더군.”
“정말인가? 어쩐지!”
누가 소문을 낸 건지는 몰라도 윤재성은 노점을 연 지 이틀 만에 유명해졌고, 오늘은 특히 인파가 더욱 몰렸다.
대련을 한 부 쓰고나서 잠시간 아무도 글을 부탁해오지 않았다. 그때 곁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3공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윤 해원, 아직 나를 기억하는가?”
주변의 하인들이 소리 없이 인파를 멀리 떨어뜨렸다. 노점을 둘러싸고 있던 서생들도 그들에 의해 멀리 내쫓겼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이들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고 뭐라고 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용기 있는 몇몇만이 구시렁거릴 뿐이었다.
“왜 사람을 쫓아낸단 말이오?”
“그러니까! 나도 글을 부탁하러 왔소만!”
“쉬……. 조용히 하게.”
“어서 가세,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윤재성은 고개를 돌려 진왕을 바라보고 잠깐 놀랐다. 당연히 그도 이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짤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 잘됐군. 자네의 <군조론>과 <위지의>를 내 전부 읽었는데, 정말 잘 쓴 글이더군. 얼마 전에 스승께서도 내 거처에 잠시 오셨을 때 <군조론>을 보더니 어찌나 흥미를 보이시던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우리 집에서 연회를 준비했다네. 고향에서 수천 리 떨어진 이곳에서 윤 해원도 홀로 적막할 테니, 부디 내게 자네를 대접할 기회를 주겠는가?”
“저는…….”
윤재성은 그의 주위에 선 기세가 범상치 않은 이들을 보고 차마 안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윤재성은 눈으로 부지런히 사옥생을 찾았다. 그는 ‘3공자’의 하인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세. 이 노점은 사옥생이라는 자에게 대신 수습하라 일러두겠네.”
진왕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윤재성도 그저 붓을 내려놓고 사옥생에게 노점을 부탁한 뒤 두 호위를 따라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옥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의심쩍었다.
‘이거 납치 아닌가? 아이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노점을 잠시 봐 달라 부탁한 뒤, 그는 재빨리 관아에 신고하러 뛰어갔다.
* * *
윤재성은 이 연회가 왕부에서 열린다는 것과 심지어 저 ‘3공자’가 진왕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정국 황제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는데, 낮에 연회를 여는 것은 좋아했지만 저녁에는 궁궐이 조용한 것을 원했다. 때로 그는 비빈들을 데리고 가까운 아들들의 왕부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궁중의 건물과 후원이 크고 휑할 뿐 어떤 가족적인 느낌도 없다고 생각해, 몇몇 아들들의 왕부에 잠시 머무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올해 황제는 오(吳)왕부(王府)로 향했고, 진왕은 자신의 저택에서 크지 않은 규모의 연회를 열었다. 참석하는 이들 중에 무슨 왕공(王公)이나 대신(大臣)은 없었고, 전부 진왕과 가까운 사이인 자들이었다.
왕부의 화려하고 장엄한 내부는 윤재성이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끔 했다. 그도 자신과 같은 일개 계주의 해원이 어쩌다가 이런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늙은 용과 함께 그를 따라온 계연에게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하인들의 “전하를 뵙습니다.” 하는 인사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고, 윤재성은 갓 상경한 시골 사내처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고 따라가기만 했다.
“이분이 바로 윤 해원이군!”
큰 목소리가 왕부 안에서 들려와 윤재성은 깜짝 놀랐다. 진왕은 이미 이쪽을 향해 오는 그자를 향해 공수하고 있었다.
“스승님, 이쪽이 바로 윤 해원입니다. 이름은 윤재성이라 하고 계주에서 온 이번 대 문인들의 거두(巨頭)이지요.”
“당치 않습니다!”
윤재성은 자신에 대한 과찬을 듣고 땀이 삐질 솟았다.
“윤 해원, 이 분이 바로 내 스승님일세. 황자소사(皇子少師)를 맡고 계시고 존함은 이목서(李目書)라고 하네.”
유학자의 옷차림을 한 노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진왕은 윤재성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이를 듣고 윤재성은 급히 인사를 올렸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하하하, 예를 거두시게. 내 일전에 <군조론>과 <위지의>를 읽고서 윤 해원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네! 그때 내가 진왕 전하께 이런 재능을 가진 자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금방 빼앗길 테니 말일세.”
이를 들은 윤재성은 등에서 또다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황자들의 파벌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마당에 더는 내려올 수가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진왕은 자신의 스승과 윤재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곧 왕부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관례에 따라 밤이 되기 전에 입궁하여 부황을 초대해야 하는 상징적인 절차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는 잠시 윤 해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지요. 저는 곧 입궁해야 합니다.”
“진왕께서는 괘념치 말고 어서 가십시오. 윤 해원은 제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접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이를 들은 진왕은 웃으며 자리를 떴고, 윤재성은 그 곁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윤 해원께서는 긴장할 필요 없소. 오늘은 왕부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은 이 중에 조정 관원들은 없으니 말일세. 진왕 전하께서는 해원의 재주를 아끼셔서 몸소 초대해 오신 거라네. 잠시 후 연회에서는 내 옆에 앉으면 되겠군!”
“감사합니다, 이 대인. 사실 제가 지금 등이 다 땀으로 덮였습니다.”
윤재성의 진솔하고 재치 있는 대답에 이목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쪽으로 오시게, 일단 편청(偏廳)으로 가서 <군조론> 얘기나 나누세.”
“이 대인께서 먼저 걸음을 옮기시지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윤재성도 이제 조금 순응한 상태였다.
계연과 늙은 용은 진왕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윤재성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모습을 드러내 구해주려 하지는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응굉은 웃으며 말했다.
“윤 훈장이 꽤 환영받는 손님인 듯하오. 하지만 그가 가진 호연정기도 이런 장소에서는 잘 먹히지 않는 것 같군!”
이목서는 관원의 신분으로 그를 내리누르려고 하지 않고, 평온하게 그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윤재성은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풀고서 은연중에 자신이 품은 포부와 이상을 드러냈다.
어떤 것들은 이목서가 듣기에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윤재성의 생각은 다른 젊은 서생들과 같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지표가 명확했다. 아직은 그와 교분이 깊지 않아 가볍게 논의하고 멈췄지만, 그래도 이목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윤 해원이 가진 포부를 펼치려면, 번영한 태평성세여야만 하겠군!”
이목서는 개탄하며 말했다.
“제가 느끼기에 당금의 대정국은 성세라는 두 글자에는 아직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나, 충분히 번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이라는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또한 부강한 나라는 백성을 돌보고 편안케 할 수 있으니 서로 도와가며 성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윤재성은 예의 있게 한 마디 설명하고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왕부의 연회는 바쁘게 움직이는 아랫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두 사람은 편청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진왕과 가까운 자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줄줄이 도착했다. 이목서는 가끔 윤재성을 데리고 나가 초대받은 몇몇 이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내려갔고, 이목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곧 쌀쌀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윤재성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윤 해원, 우리 이만 연회장에 미리 가 있는 것이 어떻겠소? 바닥에는 두꺼운 융단을 깔고 난로와 따뜻한 물도 준비되어 있으니, 여기보다 훨씬 따뜻할 거요.”
“저, 진왕 전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벌써 연회 자리에 가 있어도 괜찮습니까?”
윤재성이 망설이며 한마디 했다.
“하하하……. 윤 해원, 마음 놓으시게.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연회를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초대받은 이들 중에 이미 그곳에 앉아 있는 자들도 꽤 있을걸. 모두 귀한 몸인데 이런 엄동설한에 누가 추운 곳에 있고 싶어 하겠는가?”
‘나는 별로 귀하신 몸이 아닌데.’
윤재성은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목서를 따라 연회가 열리는 대청으로 들어섰다.
진왕의 벗들 중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온 이들도 있어 그리 엄숙한 분위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진왕부의 중정(中庭) 뒤편에 있는 대청이었다. 안에는 한 사람씩 앉는 여러 개의 개인 탁자가 아니라 네다섯 개의 원형 탁자를 놓았는데, 그 모습이 꼭 평민 백성들이 섣달그믐에 여는 잔치 같았다.
원형 탁자 외에 실내의 네 모서리에는 하인들이 끊임없이 불을 돌보는 난로가 각각 놓여있었다. 작은 통풍구를 제외하고 대청의 문을 닫아걸자 실내는 매우 따뜻했다.
연회석의 앞쪽에는 그리 큰 공간을 준비해 놓지 않았는데, 대형 가무(歌舞)를 보이기에는 좁지만, 몇몇이 금을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이목서와 윤재성은 두꺼운 면으로 된 가리개를 젖히고 옆문으로 연회장에 들어왔다. 실내에 들어서자 열기가 정면으로 맞부딪혀 오며, 온몸에 서린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하하……! 이 소사(少師)!”
“이 대인 오셨습니까!”
“저희는 진작에 여기서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지요.”
“안 그래도 이 대인께서 그리 추위를 타시는데, 어찌 아직도 안 오시는지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하하하, 이제 정말 늙었나 보오. 추운 걸 견딜 수가 없으니 말이오. 윤 해원과 조용한 곳을 찾아 이야기 나누던 것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왔을 거요. 자, 여러분께 이분을 소개하겠소이다. 계주의 해원이고 재주가 아주 뛰어난 서생입니다.”
이목서가 온 것을 보고 대청에서 추위를 피하던 손님들은 모두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윤재성은 원래 조용히 그림자처럼 있다가 가려고 했으나, 이목서가 그를 놓아주지 않고 모두에게 그를 소개한 덕에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