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31화 (131/892)

131화. 상서로운 징조

황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술을 한 입 마셨다. 그의 마음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황제는 웃는 얼굴로 설서 선생에게 말했다.

“과인도 적지 않은 서책과 사료(史料)를 본 적이 있네. 각지의 성황신들은 그곳 사람들의 천거를 받아 성황당이 세워지거나, 덕과 재능이 있던 관원이 죽은 후 추존되어지기도 하지. 선조이신 정원제(正元帝)께서 성지를 내려 성황신의 현신(現身)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성황당 안에는 흙으로 빚은 신상만 덩그러니 있을 뿐 어떤 제대로 된 신령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군.”

설서 선생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난처했다. 그는 사방으로 이야기를 수집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남들은 잘 모르는 일에 견식이 조금 있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황제의 말에 옳지 않다고 대꾸할 수도 없었으며, 감히 성황신에 대해 평가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또다시 전해지는 이야기 속의 유명한 선산(仙山)에 정말로 신선이 사는지, 강과 바다에 정말로 용궁이 있는지, 신령이나 선장(仙長) 같은 이들을 만나볼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서 선생이 아는 것이 남들보다 많고 이야기를 아무리 생동감 있게 하여도 일개 범인일 뿐이라서, 그 뒤에 이어진 대화에 황제는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황제는 드디어 그를 놓아주고 하인들에게 명해 병풍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은 후, 설서 선생에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다.

계연과 늙은 용은 원형 탁자 옆에서 병풍 뒤로 자리를 옮겨온 상태였다. 설서 선생의 등판을 보니 이렇게 추운 날에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에 응굉은 웃으며 말했다.

“귀신이나 요괴에 관한 몇몇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자는 범인들 중에서 그나마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자로군.”

황제는 설서 선생의 모호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계연과 응굉은 이 자를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떠도는 망령이 사람에게 붙는 것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라든가, 죽에 꽂은 젓가락이 선다면 죽 그릇을 등 뒤로 하여 건물 바깥으로 뿌리면 된다는 민간에서 내려오는 방법이 있다든가, 이 설서 선생의 이야기에는 재미도 있었다.

계연도 그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다만 황제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민간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득도하여 신선이 되거나 불로장생하는 방법이겠지만요!”

“허허, 이 세상에 좋은 것은 제가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인간 세상의 군왕(君王)들이란!”

늙은 용은 저 황제를 비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황제는 연회석으로 돌아가 다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주방에서는 다시 김이 풀풀 나는 새로 만든 요리들을 끊임없이 올려보냈다.

대정국에서는 새해 전야에 밤을 새우는 전통이 있어, 진왕부에서도 술과 요리와 공연이 끊이지 않게 했다. 연회 자리는 자시(*子時: 밤 11시에서 1시)까지 계속되어야 했으므로, 주방도 자시 이후까지 바쁠 예정이었다. 진왕과 황제께서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는 음식이 계속 따뜻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시(*亥時: 밤 9시에서 11시)의 끝자락이 되자 계연은 천지 간의 기운이 동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바뀌는 시점에는 확실히 다른 변화가 일어나는구나.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모두 정숙하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하인이 크게 소리쳤다. 이를 듣고 황제도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금이며 비파를 타던 이들도 연주를 멈추며 새해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계연과 응굉은 이미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계연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두 눈에도 맑은 기운이 하늘로 오르고 혼탁한 기운이 가라앉으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천지 간에 새로운 공간이 열린 것처럼, 깨끗한 기운이 구름에 닿을 듯 하늘로 오르며 새로이 장막을 열어젖히는 것 같았다.

경기부에 있는 사람들의 기운이 계속해서 상승하자, 공중에서 혼탁한 기운과 충돌하며 소용돌이쳤다.

“이것이 바로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다)이었구나!”

계연은 진심이 담긴 감탄을 내뱉었다.

응굉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천지를 살폈다. 다만 그는 평소와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정도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보고 느끼는 것과 계연이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았지만, 차마 계연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파팟! 퍼엉!

도성에서는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소리들은 더욱 커졌다. 진왕부 입구에서도 하인들이 폭죽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불꽃놀이용 폭죽이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면 경기부 상공이 지금쯤 온갖 찬란한 색채로 화려해졌을 것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천지의 변화를 관망하던 계연의 몸속은, 오행의 기운으로 더욱 활발하게 격동했다. 심지어는 이로 인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각기 다른 다섯 가지 색깔이 입과 코, 눈과 귀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 내에 있는 단로에서 삼매진화가 열기를 내뿜자, 계연이 있는 진왕부의 중정(中庭)이 봄처럼 온화해졌다.

응굉은 그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 표정이 괴이했다.

‘어쩐지 계 선생이 수부에 가기 싫어하더라니…….’

묵은해와 새해가 교체하는 순간을 이용해 수련하다니. 과연 그는 신묘한 술법을 가진 기인이었다. 늙은 용인 그조차 이런 일은 들은 적도 없었다.

계연이 뿜어내는 열기에서는 따뜻함뿐만 아니라, 진룡의 몸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무언가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가 모르는 어떤 대단한 술법인 듯했다.

이때 넝쿨검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계연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어서, 넝쿨검은 마치 계연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다. 선검은 계연을 대신해 깨끗한 기운을 포착하였고, 검체를 한 번 움직여 엷은 기운을 베어내 아래를 향해 떨어뜨렸다.

하늘 전체로 보면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이었지만, 그것이 가진 고유의 기운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바둑돌 몇 개가 나타나 있었는데, 바둑돌이 빨아들인 엷은 기운은 신속하게 계연의 체내로 들어갔다. 그 후 그 기운은 계연의 의식 세계에 있는 단로로 끌어당겨졌다.

그러자 단로 안에 있는 삼매진화는 갑작스레 산소에 닿은 불길처럼, 확 커지더니 단로에 있는 구멍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때 계연의 주위에는 열기가 더욱 강해져 응굉조차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뒤로 뗄 정도였다. 진왕부의 중정 안 화원에서는 눈과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었다.

“그야말로 춘절(春節)이구나, 음력 초하루의 봄날. 맑은 기운이 새해를 끌어당기니, 만물이 생장하는구나!”

아직도 놀라워하던 응굉은 계연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때 응굉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숙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부 중정의 화원에서는 식물들이 이 짧은 순간에 이미 땅에서 움트며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육안으로도 보이는 속도로 꽃망울이 맺히며 곧 봉오리를 터뜨릴 것 같았다.

“계 선생, 이게 대체……?”

응굉은 경악하여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왕부의 음식을 나르던 하인이 돌연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 화원에 꽃이 폈어! 화원에 꽃이……! 정말로…… 어엇!”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뒤를 따르던 하인이 등롱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정원 전체가 푸르게 뒤덮여 있었는데, 그중에 빨간 꽃망울도 여러 개 피어 있었다.

“정말이네!”

“진짜로 꽃이 폈어!”

“이건 하늘에서 내린 징조야, 아주 상서로운 징조임이 틀림없어!”

하인들이 내는 큰 소리가 연회장 안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여러 명의 소리가 섞여 안에서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왕부의 하인들이 이런 날에 소란을 떠는 것을 듣고, 진왕은 부황이 불쾌해할까 봐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죄를 묻기도 전에, 왕부의 관사가 뛰어 들어와 바깥의 소동에 대해 연회장에 있는 주인들에게 고했다.

원덕제는 이를 듣고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초대받은 다른 손님들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고, 관사는 확신에 차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 진왕 전하께 아룁니다. 틀림없는 일입니다. 문을 열고 나가 보기만 하시면 바로 아실 것입니다. 만약 제 말에 거짓이 있다면, 소생의 목을 치십시오!”

“좋다! 나가서 보자꾸나!”

황제와 손님들 모두 기대에 차서 몸을 일으켰다.

“황상, 이것만이라도 걸치십시오!”

황후는 하인의 손에서 황제의 외투를 받아 건넸고, 황제는 급히 이를 걸치며 연회장의 대문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감히 황제보다 앞서갈 수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

왕부의 하인들은 등롱을 들고 길을 안내했고, 그 뒤를 따라가는 손님들은 금세 중정의 화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화원을 살펴보니 과연 눈과 얼음이 모두 녹아 신록이 푸르른 상태였으며, 붉은 꽃들이 향기를 내뿜으며 피어 있었다.

“정말이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황제는 놀란 가운데 감정이 격해져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주변의 초대받은 이들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폐하, 이는 길조(吉兆)임이 분명합니다!”

“확실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오늘 이 연회에 오게 되어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축하드립니다, 진왕 전하!”

“하늘이 우리 대정국을 보우(保佑)하시는구나!”

축하 소리 중에 황제는 무언가 떠오른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돌연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대정국의 원덕 황제이다. 만약 신인(神人)이 이 자리에 있다면, 현신하여 모습을 보이기를 청하노라. 그리한다면 과인이 반드시 사당을 짓고 자네를 책봉하여, 평생 백성들이 올리는 향불을 누리게 해주겠다.”

황제와 거의 지척인 거리에 있던 계연과 응굉은 이를 듣고 당황했다. 응굉은 허허 웃으며 계연을 보았고, 계연은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응 선생님, 인제 그만 갑시다. 여기는 이제 더 볼 것이 없겠네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윤재성의 곁을 지날 때 손가락을 구부려 그를 툭 쳤다. 약간 남아있던 맑은 기운이 그의 이마로 들어가며, 윤재성의 호연정기가 밝게 빛났다.

윤재성은 원래도 화원의 변화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돌연 깨끗한 온천수에 몸이 씻긴 듯 정신이 맑아지고 상쾌해졌다.

호연정기가 용솟음치며 그의 눈에 흐릿하게나마 두 사람이 떠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의 뒷모습이 낯익었다.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때는, 왕부의 건물들만이 보일 뿐 어떤 뒷모습도 남지 않았다.

“계 선생님이셨나……?”

그와 가까이 있던 이목서는 혼잣말을 듣고 윤재성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는 비범하고 올곧은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연이어 고함을 쳤으나, 당연히 그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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