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33화 (133/892)

133화. 설서 선생

새해 첫날의 경기부 곳곳은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계연도 홑겹의 옷만 입을 수는 없었기에, 최소한 다른 이들이 보기에 따뜻해 보이도록 입었다.

응굉이 돌아간 후 계연도 윤재성을 방해할 계획은 없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이 자주 가던 기원으로 발을 옮겼다.

기원이 자리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새해 첫날에도 평상시처럼 영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추위 때문에 문을 닫은 채였지만, 기원의 바깥에는 ‘영업 중’이라는 푯말이 걸려있었다.

계연이 기원 안으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아보자, 기원 안에는 점원 몇 명만 지키고 있을 뿐 바둑을 두러 온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기원의 주인장도 오지 않아 한 점원이 주인 대리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원 안에 있던 점원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계연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최근에 자신이 계속 빌붙어 사는 누각에 가서 잠이나 좀 청할 생각이었다.

그 누각의 주인은 초(楚)씨 가문으로, 누각의 위치가 황성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들 가문에는 조정 관원은 없었다.

계연이 머무는 서각은 마치 장식으로 지어 놓은 것처럼, 계연이 머무는 동안 하인이 단 두 번 청소하러 왔을 뿐이었다. 초씨 집안 사람들은 아무도 서각에 들어오지 않았고, 책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기만 했다.

물론 서각이 너무 크고 서늘해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려면 다른 건물에서 머무는 것이 편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계연은 이곳에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었다. 서각의 3층에 있으면 도성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깨끗하며 고요한 서각에 보관된 장서도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계연은 수련하거나 휴식을 취하다가 남는 시간에는 서책을 보기도 했다.

이 시대에서 책은 희귀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가치 있는 책들은 여전히 진귀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백성들이나 빈한한 집안의 서생들은 지식을 얻기가 상대적으로 힘들었다.

서원이 그렇게 널리 퍼지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서책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서원에서는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보관하는 책도 많아서 공부하는 데에 훨씬 유리했다. 현시, 부시, 심지어 해시에서도 서생들의 기본 능력을 시험할 때 고전(古典)의 내용을 적도록 했는데, 만약 그 고전을 본 적조차 없다면 어찌 시험을 치르겠는가?

계연은 영녕가(永寧街)를 따라 걸으며 영기(靈氣)를 들이쉬면서, 지나는 백성들이 서로 새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막 초씨 가문의 누각이 있는 방향으로 꺾으려던 때에, 먼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죽 한 그릇과 반찬 하나, 고기만두 두 개 부탁한다. 참, 뜨거운 물 한 대야도 가져와 주려무나. 고맙다!”

“알겠어요, 왕 선생님.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마침 새벽에 만두를 좀 샀거든요.”

대화를 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진왕부에 왔던 설서 선생 왕립이었고, 맑은 목소리는 한 아이의 것이었다.

계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갔다. 그는 왼쪽으로 돌아 영녕가를 빠져나간 후 오래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대략 마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넓이로, 길 양쪽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민가였다. 담장은 모두 아주 낮아서 어깨높이를 넘지 않았다. 다만 내원의 문들이 담장보다 조금씩 높아서, 담장 안쪽의 민가들이 대부분 두세 칸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집마다 모두 춘련이나 ‘복(福)’자 같은 것을 붙여져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직도 빨간 등롱을 내건 집도 있었다. 다만 이곳에는 문신(門神)이나 조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의 신상(神像)이 붙어있는 집도 없었다.

계연은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한 민가 앞에서 멈춰 섰다. 안에서 들려오는 기척으로 볼 때 네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중 세 사람은 우측의 두 칸짜리 건물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열기와 음식 냄새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좌측의 독채 안에 홀로 있는 이가 바로 설서 선생 왕립이었다.

이자는 어젯밤 계연의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침 계연은 인연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그를 찾게 된 김에 한번 가서 그를 만나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계연은 장안법(障眼法)을 이용해 모습을 숨긴 뒤, 가볍게 담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안에서 먹 가는 소리와 약간 흥분한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계연은 이자가 현재 극도로 흥분하여 잠기운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원래대로라면 이자가 진왕부 연회에서 가장 피곤했던 사람일 텐데 이상하네. 윤 훈장님조차 피곤하여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이 사람은 어찌 아직도 정신이 또렷하지?’

왕립은 당연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룻밤의 피곤함쯤이야 어젯밤에 그가 보고 들은 것의 충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실내는 그리 크지 않아서, 안에는 왕립이 서탁(書桌)으로 삼고 있는 네모난 탁자 하나가 침상 곁에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왕립은 마침 그 탁자에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벼루에 먹이 충분히 갈리자, 배고프고 추웠던 왕립은 한 번 부르르 떤 다음 문진(文鎭)으로 종이를 잘 고정했다. 그는 붓을 들어 올려 먹물에 살짝 담근 다음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와 동시에 입으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섣달그믐 밤에 나는 이야기를 해달라 초청받아 진왕부에 방문하게 되었다. 공연한 이야기는 <신선전>으로, 그 후 황제 폐하를 뵙게 되었는데…….”

왕립의 현재 상태는 매우 또렷하여 글을 재빨리 적어 내려갔다. 그가 서둘렀기 때문에 글자는 자연히 엉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옆에 앉아 일각(一刻: 약 15분) 정도 질문을 하셨고, 내 등은 땀으로 젖었다. 귀신의 일은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쥐어짜 겨우 대답해낼 수 있었고…… 자시(子時) 전에는 왕부의 가복(家僕)이 좌중에게 정숙해 달라 알려왔다……. 연회장 바깥에서 갑자기 경탄에 찬 소리가 들려왔는데, 봄이 왔다며 기뻐하는 소리였다. 손님들이 분분히 폐하의 뒤를 쫓아서 나가보니, 중정(中庭)에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있었다…….”

여기까지 썼을 때, 추워서인지 흥분해서인지 왕립의 손에 쥔 붓이 약간 떨렸다. 그는 연이어 붓에 먹물을 적신 다음 다시 써 내려갔다.

“정원 안의 여러 나무가 봄처럼 푸르렀으며, 꽃들은 봄을 맞은 듯 붉게 만개한 모습이었다. 이에 황제께서 큰 소리로 신선이 나타나기를 청하였고, 곧 하얀 안개가 정원 가득 깔렸지만 아무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후우…….”

설서 선생은 여기까지 쓰고는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손을 비벼 따뜻한 숨을 불어넣다가, 아예 침상 위에 있던 이불을 가져와 몸에 뒤집어썼다.

똑똑똑!

“왕 선생님, 식사가 준비되어서 가져왔습니다!”

“오오! 그래, 들어오너라!”

왕립은 식사를 가져온 아이를 도와주려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찬 바람이 얼굴에 정면으로 불어와 왕립은 몸을 더욱더 웅크렸다. 바깥에는 대략 12, 13살의 남자아이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죽과 그에 곁들일 반찬 하나와 만두가 있었다.

남자아이는 왕립이 몸을 잔뜩 웅크린 것을 보고는 쟁반을 뒤엎을까 걱정되어 그에게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는 실내로 들어와서 쟁반 위의 그릇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계연도 남자아이를 따라 실내로 들어왔고, 왕립은 급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으면 실내가 조금 어두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있어서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왕 선생님, 글을 쓰고 계셨군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왕립은 침상 곁으로 돌아와서 두 손으로 빨간 꽃이 그려진 죽 그릇을 받쳐 들고 차가운 손을 녹였다. 그 후 젓가락을 들어 그릇 안의 죽을 휘저으며 후후 불고는 대답했다.

“어젯밤에 대단하신 분의 연회에 초대되어, 이야기하러 갔었단다. 접대가 융숭한 건 둘째 치고, 내가 마침 그곳에 나타난 길조를 목격하게 되었거든. 가길 정말 잘했지. 후후…….”

왕립이 열기를 뿜어내는 뜨거운 쌀죽을 몇 입 삼키자 그의 몸이 슬슬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왕 선생님이 쓰신 글이 저 문곡가의 서생들 못지않네요.”

남자아이는 호기심에 차서 종이에 엉망으로 적힌 글자를 바라보았다. 계연은 왕립의 생김새와 기운을 보니, 글자는 어떨지 몰라도 그가 재능도 있는 데다 맑은 기상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허허, 그 사람들은 모두 제대로 된 서생들인데 어찌 나랑 비교가 되겠니? 게다가 나는 나만 알아보면 되기 때문에 빨리 쓰는 게 습관이 되어있단다.”

왕립이 이렇게 대답하고는 만두를 반으로 갈랐다. 그 후, 그는 죽이 무슨 양념이라도 되는 듯 만두를 죽 그릇에 담가 휘휘 저은 후에 입으로 넣고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왕 선생님이 어젯밤 간 곳이 어디인데요? 재밌는 일이 있었으면 제게도 말씀해 주세요!”

설서 선생이 이곳에 머무른 지도 거의 반년이 되어 가기 때문에, 남자아이는 그와 꽤 가까워진 상태였다.

“말하자니 네가 못 믿을 것 같은데……. 내가 어제 초대받아 간 곳은 왕부란다. 왕부가 뭔지 아니?”

“왕부? 황제 폐하의 아들이 사는 곳 아닌가요?”

“그래, 그래. 황제 폐하의 아들이 사는 곳이지!”

왕립은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서, 젓가락을 들어 공중에 콕콕 찌르며 아이의 대답이 정확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당금의 황제 폐하도 뵈었단다!”

남자아이의 눈이 즉시 커다래졌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기셨나요? 키가 엄청나게 크고 엄청 건장하시다 하던데, 맞나요? 정말로 호랑이처럼 무서운 분인가요?”

이를 들은 왕립은 순간 멍해졌고, 계연은 웃으며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응, 키도 크고 풍채도 좋으시단다. 그분 곁에 앉으니 나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지 뭐냐. 그러나 더 재밌는 일이 뒤에 일어났단다. 시간이 자시가 되자, 왕부의 화원에서 눈과 얼음이 녹으며 온갖 꽃이 피었단다. 많은 이들이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더구나.”

남자아이는 그 장면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선생의 어조로 볼 때 그것이 아주 대단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남자아이가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을 눈치챈 왕립이 다시 바꿔 말했다.

“어떤 신선이 어젯밤에 술법을 부려, 왕부 화원의 화초들이 모두 싹을 틔웠단다. 봄, 여름, 가을에 피는 꽃들이 한순간에 만개한 거지. 아주 아름다웠단다!”

“와!”

남자아이는 몹시 놀란 후 약간 못 미더워했다.

“사실이에요? 왕 선생님이 저 속이신 거 아니죠? 아버지께서 선생님이 설서 선생이라 했는데, 듣기로는 남들을 제일 잘 속인다고…….”

이를 들은 왕립은 답답해져서 약간 울컥했다.

“네 아버지가…… 후……. 소동(小冬)아, 나 같은 설서인(說書人)들의 이야기가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니란다. 대부분은 원래 이야기를 약간 고친 거야. 어떤 일들은 과장하기도 하지만, 진실인 이야기도 있어. 예를 들어 내가 방금 한 이야기같이 말이야.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로 바꾸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겪은 사실 그대로란다!”

“아, 참! 선생님께서 발 씻을 물을 가져다드릴게요!”

머리를 긁적이던 아이는 자신이 뭔가를 깜빡한 것을 깨닫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계연도 마침 아이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왕립은 홀로 남아 식사하며 어제 일어난 일들을 다시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했다.

떠나기 전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 앞에 놓인 종이를 보던 계연은 이자가 윤 훈장님보다 더 적당하다고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