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감상에 젖은 한 사람
“계 선생님께서 요청하신 그 산악 칙봉 부적을 한 번 보게 해달라는 부탁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다른 분들께 고해도 사실 그리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전에 선례가 없었으니까요.”
계연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일도 응굉이 산악 부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일시에 생겨난 호기심이었다. 던져봐야 기회도 오는 거니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구 선생님. 차 드시지요!”
계연은 찻주전자를 들어 구풍 대신 찻잔을 채웠다. 그는 한담을 나누듯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꿔, 구풍과 천기각의 소문에 대한 견해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이 뒤에 나눌 대화가 계연에게는 본론이었다. 그는 반응을 잘 조절하며, 각 선문이며 선도를 닦는 다른 곳들의 상황을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이는 천기각의 소문에 대한 각 선문의 견해를 옥회산이 얼마나 아는지를 묻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호기심을 가장하여 각 선문의 사정에 대해 캐묻는 것이었다. 구풍이 전하는 많은 소식에는 심지어 늙은 용조차도 모르는 내용이 있었다.
구풍은 당연히 각 선문의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계 선생과의 관계를 친밀히 할 겸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다만 그가 약간 이상하다고 여겼던 것은, 계 선생님이 이런 소식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 선생이 이런 각 선문의 사정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듯 보이자, 말하는 구풍도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재미있는 화제를 골라 이야기했고, 계연이 궁금해하는 자세한 내부 사정도 알려주었다.
사실 수선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다지만, 어떤 일들에 있어서는 범인(凡人)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예를 들어 어떤 선문들 간에는 신체 내의 천지와 법력의 수련 방면에 대한 관점이 달라, 수차례의 토론과 말싸움을 거친 끝에 몸싸움이 일어날 뻔하여, 지금까지도 서로 언짢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계연도 흥미롭게 들었을 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구풍조차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수선자들이 아무리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 하여도 이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었다. 관심을 두는 일들이 범인들과는 다른 것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과 소문들은 늙은 용에게서는 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연은 바둑을 옆으로 밀어 놓고, 온종일 구풍에게서 여러 소식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로써 그는 정통 수선자들이 사는 세계에 대해 더욱 직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천기각의 소문으로부터 시작됐던 이야기가 계연에 의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정보는 ‘그 일’에 대해 알기 위한 것이었다. 계연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정에 나타난 대성(大盛)의 기운’에 대한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8할은 나를 일컫는 것 같은데!’
그는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계연의 자신감이 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정말로 늙은 용이 농담처럼 했던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계연처럼 온화한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구풍은 이제 자신이 계 선생과 많이 친밀해졌다는 착각이 들었다.
구풍은 일종의 목적을 가지고서 자신이 어떻게 입산하게 되었는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수행한 과정,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이야기한 뒤 탐색하듯이 물었다.
“계 선생님, 선생께서는 어쩌다가 여기 동토 운주의 외진 곳까지 오게 되신 겁니까? 저는 물론 선생께서 기운이나 도연(道緣)에 관한 헛소리를 듣고 오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점괘가 나오기 전부터 여기에 계셨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를 모르니 헛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희 옥회산 중에도 사실 몇몇 분들이 그리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구풍의 말을 듣고 계연이 느낀 첫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왜냐면 사실 그 기운과 도연에 관한 점괘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맞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세상에서 그 점괘와 가장 큰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구풍의 질문을 듣고 계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비록 아무 곳이나 이름을 댈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생각에도 황당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곳에 대해 캐묻거나 거짓말을 들켜 곤란하게 될 위험이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구풍이 믿든 안 믿든 그건 그의 사정이었다.
“사실 저는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제 고향이 바로 이곳 대정국의 땅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이 세상에 대한 견문이 적은지에 대해서는……. 하하, 게을러서일 수도 있고, 이전까진 흥미가 없어서일 수도 있지요. 어쩌면 너무 오랜 꿈을 꾸었거나…….”
오늘 구풍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계연은 이 세계를 좀 더 완벽하게 이해했다. 구풍의 이야기에서 느끼는 바가 많기도 했는데, 특히 그의 어린 시절부터 선문에 들기까지의 과정을 들으며 큰 감정의 기복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던 구풍이었으나, 이야기할수록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곤 했다. 이에 계연도 속으로 개탄을 금치 못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이 뒤바뀌었구나…….’
이때 계연은 눈빛에 초점이 없는 상태로 흰 바둑돌을 쥐고 있었는데, 마치 앞에 놓인 바둑판을 바라보는 듯도 했고, 맨 처음 산속의 그 바둑판에 놓인 천지의 대세를 보고 있는 듯도 했다.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지난 생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계연의 이런 감정의 변화는 특이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의식 속 산 아래 종횡으로 놓여 있던 바둑판이, 몸 밖의 기운과 융합하여 거안소각을 둘러싼 주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마치 이곳만 영안현의 밖에 따로 존재하는 듯, 또는 진정으로 천지와 융합한 듯도 했다.
구풍은 오른손으로 아직도 찻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는 탁자 밑에서 왼손으로는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그의 영이 주위의 기운과 교감하여 주변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주변이 왜 아득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구풍이 듣기에 계연은 말을 확실히 끝맺지 않은 상태였다. 계연이 미처 하지 못한 남은 말은 그가 풍기는 이런 기운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찰나, 구풍은 세기(世紀)가 교차하고 강산이 변화하는 것을 살짝 엿본 듯했다. 동시에 그 거대한 압력이 그를 덮쳐왔다. 그의 마음은 전율에 휩싸였고, 오랫동안 흘리지 않은 식은땀마저 나는 듯했다.
그는 더는 깊이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타닥!
계연은 자신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것을 알아차리고는 흰 바둑돌을 놓았다. 돌이 바둑판에 내려앉는 맑은소리가 이 모든 변화를 중단시켰다. 주위 풍경도 그대로였고, 날씨도 그대로 여름날이었다.
천지에 관한 비밀이 방금 자신도 모르게 조금 새어 나왔다. 구풍처럼 영이 맑고 기운이 예민한 수선자는 분명 조금 느꼈을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라 다행이었다. 물론 이보다 수십 배 기운이 더 강했더라도, 자신이 천기누설의 벌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구풍은 정신이 무너지거나 앞으로의 수행에 큰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과 나 같은 수사들도 근본은 사람이라, 나이가 드니 감상에 빠지는 일이 잦네요. 구 선생께 추태를 보였습니다!”
계연은 이런 말로 억지스럽게 상황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구풍은 다른 말이 하고 싶었으나, 방금처럼 여유롭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저 연이어 ‘아닙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 자신도 2백 년 가깝게 수행해 왔지만, 이렇게 신기하고 두려운 ‘감상’에 빠져본 적은 없었다.
눈앞의 계연은 아직도 죽간을 쥐고 바둑돌을 내려놓고 있었고, 어떤 법력이나 신비한 빛도 뿜어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구풍이 느끼는 무형의 압박감은 이전보다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그로 인해 그는 더는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계 선생님, 저 왔어요!”
“저도 왔어요!”
이때 윤청과 호운의 목소리가 연이어 바깥에서 들려오고, 대문이 활짝 열렸다. 곧이어 사람과 여우 하나가 거안소각으로 뛰어들었다.
“어? 손님이 계시네…….”
윤청은 구풍을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붉은 여우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우는 마치 계연의 정신법(*定身法: 상대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술법)에 당해 온몸이 굳은 것처럼 보였다. 저 여우가 방금 안쪽에서 다른 냄새는 안 난다고 했었는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구 선생께서도 급히 돌아가셔야 할 듯하니, 식사를 청하진 않겠습니다. 오늘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계연은 구풍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구풍은 마치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킨 뒤 계연에게 공수했다.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계 선생님과 한담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부적을 한 번 빌려보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돌아가서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에 계연도 그에게 공수한 뒤, 구풍을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부디 저 대신 위씨 부자에게 안부를 물어주세요. 아, 예전에 만났던 선생의 사질(師侄)인 의의에게도요.”
“계 선생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선생님 댁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에게 인사했고, 구풍은 그제야 거안소각을 떠났다.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이니만큼, 구풍도 바로 하늘로 사라지지는 않고 보통 사람처럼 거리를 거닐다가 성을 나선 뒤에야 바람을 부려 옥회산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서 구풍이 알게 된 중요한 소식은 상당히 많았다. 용왕이 옥회산과의 원한을 내려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결실을 얻은 셈이지만, 구풍은 오늘 만난 계 선생의 존재 자체가 결코 보통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바람이 불어오자, 구풍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머리카락도 함께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는 바람을 조절하지 않고서 불어오는 대로 맞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아직도 영안현의 거안소각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도력이 높고 오묘한 진선(眞仙)이구나! 계 선생께서 그리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구풍은 하늘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부리는 바람도 어느새 약간 산만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는 망상에 잠기지 않고, 법력을 운용해 멀리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