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74화 (174/892)

174화. 또 다른 길

“진 의원님, 또 뵙네요!”

진자주는 이미 계연의 생김새를 잊었지만, 그의 두 눈을 보니 계연이 누군지 떠올랐다.

“당신은……! 당신은 눈이 분명 멀었음에도 주변을 볼 수 있었던 강호에서 온 고수 아니오? 신선이셨습니까?”

계연은 그에게 공수하여 읍하며 대답했다.

“진 의원께서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일생을 의술에 바쳐 사람들을 구하신 덕분인지, 집 밖에서는 토지신께서 친히 의원님의 저택을 돌보고 계시고 저승에서 온 관리 여섯이 집 안까지 의원님을 맞이하러 오셨네요. 심지어 이 중에는 덕승부 주간 순시관 좌우 정사(正使)도 계시니, 범인(凡人)들 중에서는 정말로 정중한 대접을 받고 가시는 거예요. 저승에서도 의원님을 위해 자리를 준비해 놓았겠죠?”

계연의 마지막 말은 주간 순시관을 향해 묻는 말이었으므로, 관리도 성실히 답했다.

“그것은 판관 나리와 성황신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진 공의 덕행으로 보아 분명 저승의 관리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계연이 물었던 저승의 견해를 대변하는 말은 아니었기에, 주간 순시관도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진 공은 평생 선의를 베푼 의원이니 저승에서의 수명도 이승처럼 백 세에 가까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승에서 몇 년간 안온한 생활을 보내며 자손들의 공양을 받다가, 혼백이 단단히 실체를 갖추면 주부(*主簿: 관리 밑에서 업무를 보조하는 보좌관)의 관직을 받습니다. 동시에 귀신으로서의 술법을 전수받습니다. 24개 기관장의 자리 중 비는 자리가 생기면, 그 자리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답은 계연이 알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진자주도 들을 수 있도록 물은 것이었다. 주간 순시관이 말을 마친 뒤, 계연은 진자주에게 물었다.

“진 의원님, 저승의 관직을 받게 되면 자손을 돌볼 수도 있고, 귀신의 몸으로 오래 사실 수도 있을 거예요. 게다가 의원님의 덕행으로 볼 때, 마을 사람들이 의원님을 위해 사당을 세워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한신(閑神)이 되실 수도 있는 거고요.”

한신은 수선자들이 쓰는 말이었는데, 산천이나 강, 토지 등의 정신(正神)이나 성황신 등 저승의 신령을 일컫는 말도 아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나고 죽은 무장(武將)을 기리는 동시에, 삿된 기운을 누를 수 있기를 바라며 장군묘를 세우기도 한다. 진자주와 같은 신의라면, 더러운 기운과 전염병을 막아 주기를 기원하는 사당을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길 빌며 누군가가 세워줄 수도 있었다.

계연은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춘 뒤, 저승의 관리들을 한 번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의원님의 혼백이 아직도 깨끗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을 보니 제가 보기에는 다른 길도 있습니다. 향불의 힘이 왕성하고 도력이 높은 물의 정신(正神)의 도움이 있으면, 귀신의 몸을 음(陰)에서 양(陽)으로 바꿀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햇볕을 받아도 타지 않고, 음기나 추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요. 진법(眞法)을 닦고 신령한 도를 닦을 수도 있지요. 진정한 육체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실체를 갖게 될 거예요.”

계연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일찍이 문가에 서 있었던 토지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장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혹 계유신(界遊神)입니까?”

계유신은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신령이었는데, 온갖 곳을 돌아다녀도 땅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고, 사당의 향불을 받으며, 동시에 이승에 있는 가족들의 공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왕조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불문(佛門)의 명왕(明王)보다도 신기한 존재였다. 악신(*岳神: 산신(山神)을 뜻함)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법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토지신께서는 참으로 아는 것이 많으시군요. 그러나 계유신이 되려면 지금 진 의원님의 상황으로는 너무 까마득하네요.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한번 기대해 볼 만하지요.”

계연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토지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계유신이 어디 그리 쉽게 될 수 있는 것이던가? 저 선장이 방금 한 말은, “맞습니다, 바로 계유신을 일컫는 것이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 그러나 계유신이 되려면 천지(天地)의 도움과 기연(機緣)이 전부 필요하거늘, 어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토지신은 어떻게 이 혼란스러운 기분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약간 횡설수설했다.

토지신은 꽤 견식이 넓은 자였기 때문에, 계연의 가벼운 몇 마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감히 이런 일에 관해 허풍을 떠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 선장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게다가 산악(山岳)신이 비록 교대로 이어진다지만, 산악 진신(眞神)이 된 자들도 분명 있었다. 대정국에는 없었지만, 천하가 이렇게 크니 분명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도(神道)를 닦는 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계유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딘가에 계유신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이는 마치 신도를 닦는 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 선도를 닦는 고인이 나타나, 토지신 앞에서 방금 죽은 혼백에게 다른 길이 하나 더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게 바로 계유신이 한번 되어보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보다는 수행하여 계유신이 될 수 있도록 시도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토지신은 그야말로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토지신의 당혹한 목소리를 듣고 계연은 설명을 덧붙였다.

“토지신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계유신이 되려는 자는 하늘과 땅의 도움과 기연이 모두 필요하다고 해요. 그러니 어렵지 않다고 할 수 없지요.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첫 시작입니다. 제가 앞으로 설명할 다음 단계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계연은 <통명책>에서 읽은 저자의 가설을 떠올렸다.

“물의 신(神)의 힘을 빌리면 음기를 양기로 바꿀 수 있다고 해요. 그러나 신령의 도력이 높아야 하는 데다, 소모되는 향불의 힘도 짐작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물의 신 한 분께만 부탁하면 신도를 닦으며 쌓은 원기(元氣)가 크게 상할 테니, 이 일을 흔쾌히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다행히 계연은 부탁할 수 있는 물의 신을 두 명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둘은 대정국에서 가장 큰 강과 그다음으로 큰 강의 신(神)들이었다.

“사실 물의 신들의 도움을 얻는 것보다 진 의원님 같은 분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요. 하지만 이 점을 여러분께 확실히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군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계연은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관리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토지신은 아직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계연은 진자주의 생각이 더욱 중요했으므로, 이들을 굳이 이해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망연한 표정의 진자주를 바라보았다.

“진 의원님께서도 저와 토지신의 대화를 들으셨겠지요? 계유신이 될 기회가 의원님께 왔어요. 비록 실패할 가능성이 작지 않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유신이 되지 않더라도, 의원님은 얻는 것만 있을 뿐 조금의 손해도 없을 거예요. 혼백도 무사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만약 동의하신다면, 제가 함께 덕승부 저승으로 가서 상황을 설명할게요. 참, 물론 진 의원님께서 저승의 관리가 되어 안온하게 자손들을 돌보고 공양을 받길 원하신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선택의 기회를 진자주에게 넘겨주었다. 진자주의 혼백을 데려가려던 덕승부 저승에는, 진자주가 곧 계유신이 될 사람이라고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는 저승 전체가 뒤집힐 정도로 큰일이 되겠지만,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만 된다면 감히 그의 혼백을 놔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전에 호쾌한 성격이었던 진자주는 현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귀신들이고, 구면인 계연과도 사실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별안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 그게…… 저는…….”

진자주의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서, 참지 못한 토지신은 지팡이를 꼭 쥔 채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지팡이로 그를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인 듯했다.

그러나 계연은 감히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의 진의(眞僞)와 상관없이, 토지신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진위에 관해서는, 함께 덕승부 저승으로 가면 곧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진 공, 진 공!”

아무래도 참을 수 없었던지, 토지신이 방 안으로 들어와 진자주를 향해 말했다.

“진 공께서 만약 망설여진다면 저승으로 간 후에 다시 결정하십시오. 성황신께서 함께 계신 곳이라면, 이 일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절대로 지금 이렇게 거절하면 안 됩니다. 비록 실낱같을 가능성이더라도 이는 천하의 모든 귀신이 부러워하고 시기할 만한 기연입니다. 만약 요행으로라도 성공한다면, 공께서는 천하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일단 이 자리에서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덕원현 토지신당은 진자주도 생전에 자주 갔던 곳이었다. 그 안에서 봤던 신상(神像)과 같은 모습을 한 토지신을 보자, 계연이나 저승의 관리들보다도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토지신의 말을 듣고 진자주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계연을 향해 공수했다.

“선장께서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가족들이 저를 위해 장례를 준비하고 있고, 저도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저승에 도착한 후에 대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자신이 그의 대답을 조금 재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토지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친히 진 의원님과 함께해 주시고, 이 일의 이해(利害)관계에 대해 저 대신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가볼 테니, 덕승부 저승에서 다시 뵙도록 하지요!”

계연은 말을 마치고 바깥을 향해 나갔다.

“그…… 선장께서는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토지신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계연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강의 정신(正神)들께 도움을 부탁하러 가야지요. 나중에 시간도 아낄 겸 해서요.”

진자주가 무슨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계연은 자신 있었다. 노인은 일평생 의술을 행하여 신의(神醫)라고 불렸던 총명한 사람이니, 당연히 이것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기회인지만 알게 된다면 거절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대답한 계연은 곧바로 진자주의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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