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오래된 술병
거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황자들 중 주량이 센 이들은 일찍이 황제로부터 절대로 노신들을 이기지 말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황자들은 부황이 노신들의 체면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황제의 뜻대로, 황실 자제 모두가 노신들과의 대결에 패배했습니다. 이에 어사대의 관원들은 노신들이 감히 황자들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다며 고의로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노신들 몇몇은 불손한 언행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그저 연회 자리일 뿐이었으니, 총명하고 눈치가 빠른 몇몇 이들을 빼고는 모두 웃고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서막이었습니다…….”
다음부터 거북의 서술은 좀 더 두루뭉술해졌다. 그는 조정에 몸담은 사람이 아닌 데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감히 이 일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러니 춘목강에서 들을 수 있는 소식도 자연히 제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거북은 이 사건이 커질수록 이미 불길함을 느꼈으므로, 소씨 집안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고 이 일에 대해 따로 점괘를 쳐보지도 않았다. 다만 떠다니는 배에서 친밀한 이들끼리 나누는 사담을 가끔 접한 덕에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후 2, 3년 동안 늙은 거북은 악업이 몰아쳐 오는 기세가 정점에 다다랐다가, 마침내 수그러든 것을 느끼고서야 그 사건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입원 36년, 새 황제가 등극한 후 황제는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잡고, 간신들을 엄히 다스린다’는 기치 아래,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소수의 공신에게 늦게나마 명예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그해 연말에 상황(上皇)이 붕어하였다.
“이 일을 겪은 후, 저는 다른 액운이라도 불러들일까 봐 춘목강 근처 절벽의 동굴 안에서 몇 년을 전전긍긍하며 숨어 지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천둥이 치지 않더라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천둥을 불러올까 과도하게 수행을 닦지도 않았습니다.”
늙은 거북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을 멈추지 못했고, 듣던 계연도 속으로 개탄했다.
그러나 그가 동굴에 숨어든 것에 대해서 다른 요괴들은 그가 과도하게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요괴 중에서는 사람을 잡아먹고도 눈 깜짝하지 않는 자나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하늘이 분노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연은 그가 두려워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늙은 거북은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 다른 요괴들보다 수행에 있어 좀 더 멀리 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확률의 일이라도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고, 일이 벌어진 후 자신이 감내하게 될 상황에 공포를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해질녘에 시작되어 하늘이 밝아올 무렵 끝났다. 떠오르는 태양마저 이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물든 듯, 마치 새빨간 핏빛을 띠는 것 같았다.
늙은 거북은 이야기를 마친 뒤 조용히 수면에 떠 있었고, 강청어도 그런 그의 주변을 조용히 헤엄쳤다. 붉은 여우는 원래 있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속으로는 조정에서 일어나는 흉흉한 싸움에 큰 인상을 받아 약간 놀란 상태였다. 그는 심지어 윤청의 부친을 대신해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윤청이 앞으로 관직을 얻고 나서 혹 이런 위험이 닥치지 않을까 심각한 우려에 빠졌다.
어느새 하늘은 이미 밝아져 춘혜부 성문도 열린 상태였다. 먼 곳에서부터 물건을 가져오는 상인들이나 시장에 가려는 농민들이 성문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성문 앞에는 이미 그와 비슷한 목적의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계연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 풍경을 보며 한마디 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고치지 않으면 책으로 엮거나 설서 선생들이 이야기하기 어렵겠는걸…….”
이야기의 화자가 인간인지 요괴인지는 제쳐 두고, 시정(市井)도 황궁 내의 조정도 진정으로 평화롭기는 어려웠는데, 이는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계연은 사실 설서 선생들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것이 사람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든, 요괴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든 혹은 전혀 다른 의미이든 상관없었다. 오락이 부족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약간의 재미를 주는 목적 이외에도, 그에게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자그마한 이상(理想)이 있었다. 이렇게 탄식한 계연은 주변의 세 요괴를 바라보다가 오숭을 향해 말했다.
“확실히 당신은 운이 별로 좋지 않네요. 그러니 신통력을 믿고 쓸데없는 생각은 더는 하지 마세요.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따라 움직일 때마다 해를 입어왔으니까요. 그리고 기회는 아직도 있어요. 수행의 길이 끊긴 것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아요.”
“계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강신께서도 제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하.”
계연은 웃으며 세 요괴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수행의 험난함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짐승이 선도를 닦는 것이 시작부터 아주 고되다지만, 일단 어느 정도 수행을 쌓아 올리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며 날뛰는 다른 요괴들보다 훨씬 기초가 단단할 거야.”
계연은 몸을 일으킨 후 땅에 놓인 낚싯대를 바라보았다. 길이를 보니 소매에 넣기도 쉽지 않고, 이것을 들고 성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늙은 거북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여기에 놓고 떠날 때 다시 가지고 갈게요.”
늙은 거북은 당연히 이견이 없었다. 계연은 말을 마치고 성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으며 줄을 서려고 했다.
호운은 급히 뒤로 따라붙으며 최대한 계연의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기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계 선생님, 저희는 이제 객잔으로 가서 퇴실한 다음 짐을 챙겨서 떠나나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 저었다.
“정오가 지나면 다시 하루치 숙박료를 내야 하니, 일단 퇴실하고 짐을 챙길 거야. 그 후에는 원자포에 들를 것이고.”
“원자포요? 그게 어떤 곳인가요?”
계연은 소매에서 오래된 술병을 꺼내 호운에게 흔들어 보였다. 이것은 예전에 계연이 처음으로 샀던 천일춘이었다. 후에는 이 병에 다른 술들을 넣기도 했고, 심지어 용연향을 보관하기도 했었다.
“천일춘?”
“그래, 천일춘을 양조하고 판매하는 곳이야.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들르자.”
줄을 서서 성에 들어온 다음, 계연은 호운을 데리고 객잔에 가서 퇴실 절차를 밟고 보증금을 돌려받았다. 그 후에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따라 걸으며, 정오가 되기 전 원자포가 자리한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전히 같은 곳에 자리한 같은 모습의 가게였다. 그때처럼 마치 장사가 잘 안되는 듯한 모습으로 점원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한가한 때인 것 같았다.
원자포가 가장 바쁜 시기는 매년 봄으로, 새로운 술을 그때 양조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은 가을은 비교적 한가했는데 특히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이 그러했다. 술을 나르러 오는 이들이 이 시간에는 오지 않아서였다.
원자포의 주인인 탁도(卓韜)는 마침 장부를 앞에 두고 바쁘게 계산하는 중이었다. 계산을 완료하고 주판을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려놓은 그는 웃음을 입가에 띠며 장부를 덮었다.
탁씨 집안은 대대로 양조를 업으로 삼았는데, 그는 한 번도 춘혜부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술을 사는 이들에게 정해진 가격만큼 돈을 받을 뿐, 그들이 대량으로 사서 소매로 파는 것까지 관리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부(州府)에서도 원자포가 유명하고 장사가 잘되고 있으므로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그로 인해 그의 사업은 언제나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콜록! 콜록! 커흐흠…….”
원자포의 주인인 탁도는 기침을 작게 몇 번이나 했고, 그 스스로는 기침을 멈추기 힘든 듯 한참 후에야 기침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러고서 곁에 있던 토기(土器) 주전자의 입구에 입을 대고 몇 입 삼켰다. 그러자 다시 한번 터져 나오려던 기침이 가까스로 멈추었다.
근처에 있던 점원이 그를 보고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주인어른,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의원을 한 번 더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벌써 한 달이 넘게 기침을 하고 있는데요!”
“괜찮다, 괜찮아. 의원은 진작에 봤지. 풍한에 걸린 것뿐이라더구나.”
이때, 계연이 원자포 안으로 들어왔다. 계산대에 앉아있는 것은 예전과 같은 주인장이었는데, 조금 더 나이 든 모습이었다.
계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가게 안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행색을 살폈다. 이때 계연은 장안법을 사용하여 두 눈이 일반 사람들처럼 보였으므로, 겉으로는 문아한 서생 같아 보였다.
탁도는 예전에 계연에게 받은 인상이 깊었다고는 해도,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니 이제는 계연을 기억하지 못했다.
“손님, 술을 주문하시려고요?”
보통 원자포에 오는 사람들은 술을 주문하러 오는 이들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항아리의 개수나 술을 실은 수레의 개수로 계산했고, 내년에 빚을 새 술을 예약하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매로 술을 사러 오는 이들은 아주 적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단 온 손님이니 원자포에서는 거절하지 않고 팔았다.
계연은 일단 대답하지 않고 계산대로 다가가 주인장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는 풍한에 걸린 상태로, 가슴과 폐에 한기(寒氣)가 누적되어 있었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잘 쉬면 2주 정도 후에는 곧 나을 것이다.
이 정도의 병은 계연도 치료할 수 있었기에, 계연은 소매에서 술병을 꺼낼 때 살짝 손을 움직여 탁도의 폐에 쌓인 한기를 모두 몰아냈다.
그의 이 작은 동작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오히려 계연이 꺼내든 오래된 술병에 시선을 두었다.
“주인장, 제게 이곳에서 예전에 준 술병이 있는데 이 병을 가득 채우면 가격이 얼마인가요?”
탁도가 도자기로 된 술병을 자세히 살펴보니, 외관은 멀쩡했지만 부딪히거나 긁혀 떨어진 곳들이 간혹 보였다. 보아하니 여러 번 자주 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술병의 모양은 원자포에서 몇 년 전에 쓰던 것과 같았는데, 그들이 요즘 술을 담는 병은 저런 모양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오래된 술병을 들고 온 사람이라면 천일춘의 오랜 고객이라는 뜻이었으므로 탁씨는 속으로 무척 뿌듯해했다.
“가격은 그대로입니다. 그 병에는 1근(*斤: 600g)이 들어가니, 가득 채우면 가격은 8백 문(文)이 되겠군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이렇게 물었다.
“술병을 가지고 와서 1근을 사가면 모두 8백문인가요? 술병 가격으로 2백 문이나 제한다고요?”
탁도는 원래 토기 주전자로 입을 좀 축이려 했으나, 오래도록 기침이 시작되려는 기미가 없어 곧 주전자에서 손을 떼었다. 게다가 계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으므로, 그는 곧 흥미가 생겨 계연과 몇 마디 더 나누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는 아니었습니다. 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 그런 술병이 2백 문이나 나가겠습니까?”
“그럼 왜 그 가격을 받는 건가요?”
“휴, 비밀도 아니니 알려 드리지요. 예전에 어떤 고객과 좋은 관계를 맺어 보려고 술병 하나에 2백 문씩 쳐서 오래 발효된 술을 싼 가격으로 팔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점원들도 알고 우리 가게와 관계가 있는 이들은 모두 알지요. 그 후로 가게에 1근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의 술병을 가져오면 8백 문만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듣고 계연은 웃음이 나왔다.
“오호, 주인장께서는 모든 손님을 평등하게 대우하시는 거군요.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을 손해 볼 텐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돈을 벌려고 하는 장사니까요!”
탁도는 소리 내어 허허 웃었다.
“제가 무슨 문인이나 협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습니다. 게다가 대갓집이나 부잣집 사람들 아니고서야, 누가 매일매일 우리 천일춘을 마시겠습니까? 그러니 사실 가게에 술을 담으러 오는 손님들도 별로 없습니다. 또한, 그런 가격을 받는다고 저희가 나서서 알리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하하하하……!”
계연은 그의 말을 듣고 감탄한 듯이 웃으며, 소매에서 은자 2냥을 꺼냈다.
“주인장께서는 참 노련하시군요! 새 술 한 병만 사 갈게요. 여기 2냥이에요.”
‘이상하네, 이 사람 옛 술병에 술 담아 가려고 온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일단 손님이 그리 말하니, 탁도는 군말 없이 그대로 따랐다. 탁도는 계산대에서 새 술 한 병을 꺼낸 뒤, 은자의 무게를 달아보고서 계연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