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운이 바뀌는 시기
계연이 새 술이 담긴 술병을 받아 들고서 떠나는 순간, 탁도는 손님이 계산대에 놔둔 오래된 술병을 발견하고서 크게 소리쳤다.
“손님, 술병 여기 두고 가셨는데요!”
그러자 흰옷을 입은 손님은 손을 휘휘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주인장께 드릴게요!”
탁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다시 한번 깨진 술병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이 술병을 가지고 뭘 한단 말인가? 원자포에서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이 이런 술병이었다.
탁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을 때, 막 입구를 나서던 하얀 인영(人影)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 빨리 사라지다니?’
탁도는 얼른 계산대를 돌아 나와 문 앞으로 가서 좌우를 살펴보았다. 거리 저 멀리까지 살펴보았는데도 아까 그 손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계산대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계산대 옆에 있던 점원이 웃으며 물었다.
“주인어른, 이 술병은 어찌할깝쇼?”
“어쩌긴 뭘 어째, 버려야지.”
점원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술병을 들어 아래위를 살펴보다가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은은한 향기가 넘실대며 쏟아져 나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주인어른, 이거…… 정말 버리는 겁니까?”
점원은 열심히 코를 킁킁대며 병 안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그러면서 병을 손에 꼭 쥐고 망설이며 물었다.
그러자 탁도는 점원의 손에서 술병을 채 간 다음, 계산대 위의 마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술병을 흔들며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대고서 안쪽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텅 비어 있었지만 물기가 조금 남아있었다. 병에 대고 다시 냄새를 맡아보니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리고 마개로 입구를 막자 향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주인 탁도가 다시 술병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자, 확실히 새는 곳은 없는지 더는 어떤 향기도 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관찰하는 동안, 점원 몇몇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인어른, 이 병에 뭐가 들어있었기에 이렇게 향기로운 걸까요?”
탁도는 어딘가에 부딪혀 자잘하게 움푹 파인 흔적이 있는 술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것 없는 술병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이것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점원의 물음을 듣고 그는 마음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으나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무슨 향료 같은 걸 넣었던 거겠지…….”
탁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문 근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듯했다. 한번 이런 의문이 들자, 그는 더는 그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모양의 술병과 이상한 손님. 예전의 그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향료를 담았던 게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술을 담아 갔겠지.”
“그럼 이거 버려?”
“안 버리면 그걸로 뭐 할 건데. 씻어서 술 담게? 우리 가게에 술병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방금 그 향기를 맡으니 왠지 모르게 배가 고파졌어!”
계산대 주변에서는 점원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자포는 한가한 시간 동안에는 점원들에게 그리 까다로운 규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중 한 점원이 씻어서 술을 담자는 말을 하자, 어째서인지 탁도의 마음이 요동쳤다.
“됐다, 됐어. 모두 나가봐라. 이제 오시(午時)가 다 되어가니, 너희들은 주루에 가서 식사를 예약하고 와. 그리고 너희 둘은 맞은편 전병 가게에서 가서 튀긴 전병을 좀 사오는 게 좋겠다.”
“오늘은 요리 안 해 먹는 겁니까?”
주인장 탁도는 그 물음에 짜증이 난 듯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좋은 밥 먹자는데 그것도 싫은가 보지? 그럼 요리해 먹고!”
“아, 아뇨! 말실수했습니다!”
“맞아요, 이놈이 말을 잘못했네요! 너 이놈, 매를 벌지!”
“그럼 여태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느냐?”
“지금 가겠습니다요!”
“바로 가겠습니다!”
점원 몇몇은 급하게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돈은 주인이 내고 그들은 요리나 주문하고 오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줄을 설 필요도 없었는데, 여러 주루에서는 원자포의 주문을 가장 먼저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곁들일 술은 당연히 살 필요도 없었다.
점원들을 쫓아낸 후, 탁도는 몸을 돌려 등 뒤에 있던 수납장 아래쪽에서 천일춘 한 단지를 들어 올렸다. 그 후 계연이 주었던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낡은 술병에서 다시 향기가 뿜어 나오자, 탁도는 술병에 급히 깔때기를 꽂고 국자로 천일춘을 조금 떠서 조심스레 그 안에 부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는데, 술이 술병에 들어가는 순간 향기가 단번에 사라진 것이다. 마치 사방에 퍼져 있던 향기가 다시 술병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술을 다 붓고서 깔때기를 뺀 후, 탁도는 입구에 코를 대고 다시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자 안에 들어있는 천일춘에서 새로 담근 술보다 더욱 짙은 향기가 났다. 그러나 이 술병에서 처음에 났던 은은하고 잊을 수 없는 향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술병을 몇 번 흔들자 안에서 술이 찰랑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한번 코를 대고 냄새를 맡자, 천일춘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탁도는 잔을 하나 가져와 꽤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맛을 보지는 않았다.
그는 술병 안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맨 처음에 맡았던 은은한 향기를 떠올렸다. 속으로는 사실 한 입쯤 마셔보고 싶었으나, 그의 이성이 이런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 가게의 점원들이 차례로 돌아왔다. 이에 탁도는 술병의 마개로 입구를 막고, 계산대 안쪽에 잠시 숨겨 두었다.
뒤이어 주루에 음식을 주문하러 간 점원이 찬합을 들고 돌아왔고, 원자포의 모든 이들은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오후에는 술을 옮기고 배달해 주거나 대금을 받는 등, 일이 밀려들어 점차 바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늦은 저녁이 되어 원자포의 영업이 끝날 즈음이 되자, 점원들은 점포를 청소했다. 주인 탁도는 마지막 장부의 계산을 완료한 상태였다.
“어? 주인어른, 그러고 보니 기침이 나으셨네요?”
이렇게 물은 점원은 마침 탁도가 먹는 탕약이 담긴 주전자를 가져가 씻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주전자의 무게가 꽤 무거웠고, 이에 뚜껑을 열어보니 약이 반이나 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난 며칠간, 이 시간쯤이면 탕약은 거의 한 방울도 남지 않았었다.
점원이 이렇게 묻자, 탁도도 그제야 자신이 꽤 오랫동안 기침을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러네요, 오늘 오후 내내 주인어른께서 기침하는 걸 못 들었어요.”
“어!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오전에 내가 주인어른께 의원을 한 번 더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었는데, 어찌 오후가 되더니 대번에 나으셨나 보네?”
탁도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자신이 기침했을 때가 오전에 장부 계산을 끝냈을 시점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는…….’
탁도는 계산대 밑에 숨겨 둔 오래된 술병을 떠올렸다. 오후 내내 상쾌했던 기분이었던 그는, 지금에서야 심장이 쿵쿵 뛰며 급격히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거 정말 대단한 물건인 거 아냐?’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자, 계연은 다시 성 밖 남쪽의 춘목강 기슭으로 돌아갔다. 늙은 거북은 과연 수면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낚싯대가 젖지 않도록 어수술을 이용하여 낚싯대를 보호해 둔 채였다.
이 시각에는 강변에 행인이 없었기 때문에, 거북은 거리낌 없이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앞발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음, 고마워요!”
계연이 이렇게 답한 뒤 공중으로 손을 뻗자, 거북의 등 위에 놓여있던 낚싯대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늙은 거북은 계 선생 근처에 여우가 없는 것을 보고서, 그가 곧 떠나리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계연은 그의 예상과 달리 어젯밤 앉았던 자리에 다시 한번 앉았다.
강청어는 이때 강변에 없었는데, 호연은 윤청에게 작별인사하는 것을 계연에게 허락받고 윤청을 만나러 간 참이었다. 그래서 버드나무 주변에는 오로지 계연과 늙은 거북 단 둘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거북을 약간 긴장하게 했다.
계연은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 중 한 그루의 버드나무에 농구공보다 큰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계연 일행이 춘혜부에 도착한 첫날 밤, 늙은 거북이 한에 사무쳐 씹어 먹은 곳이었다. 이에 계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다음, 강물 위의 거북을 바라보았다.
“그날 호운에게 <소요유>의 내용을 물었었죠?”
계연의 평온한 어조에서 화가 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거북은 내심 찔렸는지 초조해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네…….”
사실은 몇 마디 해명을 하고 싶었으나, 괜히 변명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오숭은 짧게 대답만 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계 선생은 그를 꾸짖거나 화를 낼 조짐이 없어 보였다. 이에 오숭은 은근히 기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계연은 거북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거북이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늙은 거북은 용기를 끌어 올려 계연의 희뿌연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소요유>의 내용을 듣고 싶은가요?”
듣고 싶었던 말이 계연의 입에서 나오자, 늙은 거북은 애써 자제하고 있던 충동을 누르지 못하고 거친 물거품을 만들어내며 재차 몸을 숙였다.
“네! 듣고 싶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거북은 물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땅 위에서와 달리 보통 사람들처럼 몸의 각도를 쉽게 구부릴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움직이면서 수면에 일어나는 파동이 무척 클 뿐이었다.
“좋아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절을 올리다가는, 저 멀리에 있는 배들이 전부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올 거예요.”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었다. 비록 주위에 행인들은 없었지만, 강에는 아직도 유람선들이 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이곳에서 계속 물이 파도처럼 넘실댄다면, 적지 않은 이들의 이목을 끌 것이다.
거북은 즉시 동작을 멈추고 수면 위에 조용히 떠서 기다렸다. 동시에 계연이 혹여 “당신은 듣고 싶겠지만, 나는 별로 말해 줄 생각이 없군요”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북은 정말로 자신의 운이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적막이 지난 후였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신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계연은 자신이 시작할 거라는 낌새도 주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물에 떠 있는 거북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서,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계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시에 계연의 의식 세계의 영향으로, 이들 주변의 현실 세계가 모호해졌다. 마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늙은 거북은 마치 자신이 거인이 된 계 선생님과 함께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거북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굽어보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이 크기가 몇천 리나 된다는 곤이나 붕이 된 듯, 천 리나 되는 거리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며 거북은 온몸을 관통하는 강렬한 전율을 느꼈으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계연이 뱉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모두 기억에 새겨 넣었다.
선생이 말하는 속도는 그들 주위로 흘러가는 시간과 약간의 격차가 있었던 것 같았다. 분명히 선생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었다. 그러나 <소요유>의 마지막 문장인 “……와서 해칠 자도 없으니, 쓰임새가 없다 하여 어찌 근심하겠는가?(物無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라는 부분을 선생이 읊었을 때, 거북이 돌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있었다.
계연은 여기에서 이야기를 멈추었고, 늙은 거북은 전율 속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연은 거북의 모습을 보더니, 의식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정말 유용한 방법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최소한 도(道)를 말할 때는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효과가 지난번 우규산에서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육 산군은 요괴 중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척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 이 늙은 거북보다 크게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오숭 당신은 오랫동안 집착하는 마음이 커진 상태예요. 사실 이 <소요유>는 당신의 상황에 더 잘 어울리는 가르침이에요. 그러니 이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시간이 나는 대로 나벽청과 함께 이곳으로 와서 윤청이 읽어주는 내용을 듣는 것도 좋을 거예요.”
계연은 말을 마치고 낚싯대를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발밑에 구름을 일으켜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갔다.
늙은 거북이 정신을 차렸을 때, 계연은 이미 저 멀리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오숭은 다급히 기슭으로 기어올라, 계연이 떠나가는 방향으로 거듭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저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해주신 가르침도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앞의 몇 마디에는 기쁨과 감격이, 계연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이 되어 튀어나온 말미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운이 바뀌는 날이 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