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99화 (199/892)

199화. 처음부터 그걸 쓰지

자신이 곤경에 빠진 것을 눈치챈 노인은 마음이 급해져 산신을 향해 애걸복걸했다.

“홍(洪) 산신께서 이렇게 저를 못 본 체하실 수는 없습니다! 산신석을 부수면 있는 힘껏 도와주겠다고 분명 그리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산신은 거대한 머리를 아래쪽의 노인을 향해 숙이고서, 마치 종소리처럼 깊고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방금 그 일격으로 너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방금 그 검세에도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니, 이미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준 것이 아니냐? 나는 이미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 설마하니 내가 고작 너를 위해 법체를 잃고 그간 쌓은 수행을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냐?”

산신은 멀리 구름 위에 선 계연을 향해, 광풍이 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팔을 움직였다. 계연은 그 동작에 조금 놀랐지만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산신은 그저 그를 향해 두 손을 앞에 모아 부딪혔을 뿐이었다.

쿵…….

두 손이 서로 부딪히는 충격에 흙먼지가 흩날렸다. 산신은 거대한 두 팔로 공수하는 자세를 취했다.

“연추산 산신 홍성연(洪盛延), 조금 전 선장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계연도 산신을 향해 공수했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비록 이는 예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여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숨어있는 누군가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계연과 서로 예를 갖춘 뒤, 산신은 거대한 몸체를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의 발걸음에 주변의 산맥들이 진동했고, 고작 세 걸음 만에 산신과 노인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노인은 이제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홍 산신! 홍성연! 가지 마시오! 어찌 이리……!”

선검의 검광이 번쩍이며 노인을 베었고, 울부짖던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어졌다. 그의 신체는 겉으로 보기에 어떤 손상도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땅에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계연은 선검을 공중에 떠올라 있던 검집 안으로 보냈고, 이에 따라 하늘을 뒤덮던 검의는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는 다시 커다란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계연이 서 있던 연추산의 구역에도 다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노인이 체명부로 목숨을 구해 도망치고 나서, 그것을 눈치챈 계연은 넝쿨검으로 노인의 신체와 혼백을 제외한, 노인의 정신력과 마음에 큰 타격을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을 뒤덮는 검세를 끌어낼 수 있게 된 계연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방금 계연은 직접 손에 검을 쥐고 노인을 베었다. 계연의 법력과 의지가 넝쿨검의 위세와 합쳐져, 죽지 않을 정도로만 노인의 정신과 혼을 베어냈다.

이렇게 선검을 사용하려면 법안을 모두 열어 정교하게 검을 조종해야만 했다. 그래서 계연은 검의를 위주로 검기는 그보다 약하게 하여, 자신의 법력으로 넝쿨검을 움직였다. 조금만 더 세게 움직였다면, 노인의 혼이 소멸했을 것이다. 넝쿨검 그 자체로는 이렇게 섬세한 조종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베었다면 노인의 온몸이 갈라져 내렸을 것이다.

심신이 모두 고갈된 노인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신을 집중해 법력을 운용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수선자들에게는 매우 드물게도 완전한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졌다.

산신은 계연과 땅 위의 노인을 보고서 그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후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그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이곳에 더 남아있기도 불편했다. 그는 거대한 두 발로 주변의 산맥을 진동시키며 떠났다. 눈보라를 뚫고 수십 보를 걸어간 산신은 한 골짜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거대한 몸체로 천천히 바닥에 앉고 나서, 산봉우리에 몸을 기댔다.

쿠궁……. 우르르르……!

산맥과 땅이 떨리며 산신의 몸 대부분이 산봉우리에 스며들 듯이 합쳐졌다. 그 외에 남은 부분은 거대한 돌로 되어있어, 보기에는 일반적인 기암괴석처럼 보였다. 계연이 법안을 열어 살펴보아도ㅠ 산신의 몸과 합쳐진 구역에서는 신령한 빛이나 어떤 특이한 점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산세와 결합한 산신이구나. 연추산 산신은 대단한 실력을 갖춘 게 틀림없어!’

계연은 전처럼 그대로 공중에 서서, 법안을 모두 열고 아래로 널리 뻗은 추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기(妖氣)와 또 다른 특이한 기운이 먼 곳에 숨어있는 것이 보였지만, 계연은 더는 무언가를 쫓아가 일을 파헤칠 생각이 없었다.

방금 자신이 선검을 조종하여 하늘을 뒤덮는 검세를 보였으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천기각에서 퍼진 소문은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아, 대정국을 주목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 대정국의 북쪽 땅이 그러했다.

대정국의 대부분 국경이 다른 국가와 닿아 있다지만, 전체적인 나라의 위치는 동토(東土)의 운주 남쪽이었다. 북쪽 지방은 대정국 사람들에게 있어 춥고 척박한 곳이었지만, 사실 대륙 전체로 놓고 보자면 대정국의 북쪽이야말로 이 땅의 중심에 있었다.

‘저 노인처럼 천수(天數)를 거슬러 사술을 닦는 이들이 또 있을 게 분명해. 그러니 이번 일로 그런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야!’

계연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구름을 몰아 노인의 곁으로 내려섰다.

방금의 격돌 때문에 이 부근에는 작은 산봉우리 하나가 무너지고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많았다. 노인은 원래 하얀 눈 위에 누워있었는데, 산신의 거대한 몸이 걸어가면서 주변에 쌓여 있던 눈을 흩어 놓아 이미 눈 속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만약 지금 그를 이대로 놔둔다면, 얼마 있지 않아 그대로 얼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지만, 몸을 움직이려면 깨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계연은 무릎을 꿇고 앉아, 강호 사람들이 쓰는 방법으로 노인의 온몸의 혈을 모두 막았다.

막 몸을 일으키려던 계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가, 눈을 녹여 검지로 ‘정(*定: 고정하다)’ 자를 쓰고 노인의 몸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서 몸을 일으킨 계연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산신이 떠난 방향을 향해 다시 한번 공수했다.

“산신께 만남을 청합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계연이 생각하기에 산신은 그새 땅 밑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기보다는, 그저 나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에 계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발을 가볍게 들어 땅을 밟았다. 동시에 미미한 법력을 운용해 구신술을 펼쳤다.

“연추산 산신 홍성연께 잠시 이야기를 청합니다!”

계연이 구신술을 시작하자 계연의 발밑에 옅은 파문이 일어났다. 산신은 곧바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상대가 사용하는 법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억지로 자신을 불러내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곧 계연의 근처에 노란빛이 옅게 감돌더니, 암석 하나가 눈 쌓인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부서졌다. 그러자 계연의 눈앞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돌멩이처럼 회갈색을 띤 장포를 입은 남자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홍성연이 선장을 뵙습니다!”

산신은 복잡한 심경으로 계연을 향해 인사하며 생각했다.

‘그런 술법을 부릴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걸 쓰면 되지 않나?’

산신이 정중하게 공수하자 계연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똑같이 공수하며 읍했다. 산신의 인사가 끝나자 그는 즉시 입을 열었다.

“홍 산신께서 부디 양해해 주세요. 제가 만남을 청했지만, 대답이 없으셔서 구신술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연은 최대한 진솔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거북하고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산신이 나중에 계연에게 무언가 불만을 품게 될 수도 있었다.

연추산 산신이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계연은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홍 산신께서는 천기각에서 친 점괘에 관한 소문을 아시나요?”

산신은 땅 위에 누워있는 노인을 한 번 쳐다보더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선장께서는 이자가 그 소문을 듣고 왔다고 여기십니까?”

계연은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정국은 현재 안정기이니 허무맹랑하고 삿된 동기를 가진 이들이 있어도 최대한 그 기운의 흐름에 순응할 겁니다. 저자처럼 구자귀모와 같은 사술을 수행하다가는 잘못하면 큰 화를 입을 테니까요.”

산신은 두 눈이 실명한 듯한 수선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당신이 바로 그 ‘큰 화’가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계연은 땅 위에 엎어진 사람을 잠시 쳐다보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아마 천기각의 소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을 확률이 높아요. 누군가 대정국의 상황을 탐색하려고 이자를 앞잡이로 내세운 거지요.”

계연의 추측을 들은 산신은 눈썹을 찌푸리며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자는 60년이 넘는 세월 간 이 연추산에 머물며 자신을 도와 많은 일을 해주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도 귀중한 산신석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 돌아올 때는 음험하고 더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수행법을 찾아오더니, 돌연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해 자신도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솔직히 향불의 힘을 바탕으로 두지 않은 신령에게는 저 노인이 무슨 술법을 닦든 간에, 연추산에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다지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수많은 술법에는 그것만의 특별한 점이 있으니, 그가 닦는 술법에도 무언가 남다른 점이 있겠거니 하고 여겼다.

만약 구신술로 자신을 불러낸 이 선장이 저 노인에 대한 일을 캐물었다면 이러한 사정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겠지만, 산신은 핑계를 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던 산신은 결국 입을 열어 묻고 말았다.

“그렇다면 선장께서는 제게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계연은 다시 한번 산신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사실 제가 산신께 조금 무리한 부탁을 드리려고요.”

계연은 예를 올린 후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끊임없이 이어진 연추산의 산맥이 계연의 시야에 보였다.

“천기각의 소문은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 없지만, 이를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만약 대정국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뿐이라면 무방하지만, 저렇게 쥐새끼처럼 더러운 짓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야말로 괘씸한 일이지요.”

사실 저 도인의 법력은 결코 낮잡아 볼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넝쿨검이 없었다면, 계연은 저자와 맞붙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계연은 저 노인을 쥐새끼라고 깎아내리면서도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계연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연추산은 대정국의 북쪽 국경이라, 보통 사람들에게는 넘기 힘든 천연의 장벽이지요. 수행을 닦은 이들도 그리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산맥이고요. 홍 산신께서 만약 시간이 나신다면 주의 깊게 살펴보시다가 수상한 자들을 발견하면 좀 일깨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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