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05화 (205/892)

205화. 일찍이 남겼던 서신 한 통

이때,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서책 상자 하나가 뒤집혔다. 안에 있던 벼루며 족제비털로 만든 붓 같은 내용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에고……. 이건 어느 공자님의 물건이신가요? 제가 실수로 건드렸나 봐요!”

여인은 당황한 듯 조급한 모습이었다.

“제 겁니다! 어어, 선지(*宣紙: 안휘(安徽)성의 선성(宣城)시에서 나는 서화용의 고급 종이)는 밟지 마세요!”

막휴는 다급히 그쪽으로 뛰어갔고, 윤청은 “막휴!”하고 그를 불러 세웠으나 간발의 차로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나 막휴가 여인들 곁에 다가간 후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여인은 연신 사과하며 그를 도와 다시 짐을 정리했다. 그녀는 상자 안에 들었던 막휴의 옷가지를 보다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제가 입은 옷이 모두 젖어, 춥고 불편하기 짝이 없네요. 혹시 공자께서 이 옷을 제게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아…… 음…….”

막휴는 여인의 옷이 몸에 달라붙은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결국, 그는 다시 상자를 열어 상대방에게 자신의 옷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는…… 다른 공자들께서도 저희에게 옷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두 여인도 곁에서 가냘픈 모습으로 물었다.

윤청은 돌연 무언가를 느끼고 육씨 성을 가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뇌옥생과 임흠걸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엄숙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앉아!”

이렇게 말한 윤청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환히 웃는 얼굴로 다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하지요, 제게 옷이 몇 벌 있으니 두 분께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두 여인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윤청은 반 정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일부러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숨겼다.

그는 꿇어앉은 채 곁눈질로 살짝 근처의 여인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여인의 뒤쪽 치마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언뜻 보였다. 동시에 아주 옅은 짐승 냄새가 다시 윤청의 코를 찌르자, 상자를 뒤지는 윤청의 동작이 더욱 급해졌다.

‘찾았다!’

윤청이 찾아낸 것은 서신 한 통으로, 예전에 계연이 영안현을 처음으로 떠나기 전에 윤재성에게 남긴 것이었다. 그리고 윤재성이 완주로 떠나기 전에 윤청에게 전달했는데, 아들로 하여금 계연의 서체를 모방하여 연습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기도 했지만, 이는 동시에 일종의 격려하는 의미로 준 것이기도 했다.

윤청은 그 서신을 조심스럽게 봉투에서 꺼내어 자신의 옷 안쪽에 숨겼다.

“이 옷이면 되겠습니까?”

“몸을 가리지 못할 정도의 옷만 아니면 된답니다!”

여인은 그를 놀리려는 듯 웃으며 옷을 몇 번 털었다. 그러자 서신 하나가 그 안에서 떨어졌다.

쉬익-!

한 줄기 영험하며 위협적인 기운의 빛이 서신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

세 여인은 이를 보고 몹시 놀라, 모닥불 근처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고 당황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계 선생님의 서신이 떨어졌네요. 제가 덤벙대서 이런 곳에 있는 줄도 몰랐군요!”

윤청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서신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그의 눈에는 서신에 쓰인 종이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미세한 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계연이 일찍이 남겼던 서신 한 통은 비록 법령이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그의 뜻과 신령스러운 기운이 몇 년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 서신은 평소에는 아껴 보관할 만한 묵보(*墨寶: 보배가 될 만한 좋은 글씨)였는데, 사실 이것의 특별한 점은 그 서체만이 아니었다. 왜냐면 글을 쓴 이가 범인(凡人)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종이 한 장일 뿐이었으므로, 윤청도 이것이 크게 유용할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 여인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윤청, 그 종이에서 왜 빛이 나는 거야?”

막휴는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윤청이 손에 든 종이에서 은은한 빛이 흐르는 것을 보고서 놀라 경악한 얼굴이었다. 행상인들과 다른 두 서생도 그보다는 먼 곳에 있었지만, 은은하게 그 종이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왜 그러십니까?”

윤청은 의아해하며 여인들에게 이렇게 물었고, 막휴도 여인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게,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에 있어서 저분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야. 옷은 저분들이 알아서 고르게 하고, 나랑 막 형은 어서 저기로 가자!”

윤청은 그 서신을 뇌옥생이 누워 잠을 청했던 탁자 위에 놓고, 자신의 짐에서 옷을 두 벌 꺼냈다. 막휴의 옷도 꺼내어 함께 곁에 놓았다. 그리고 한 손에 하나씩 상자를 들고 막휴에게 전달한 다음, 다시 서신을 챙겨 들고 다른 상자 두 개를 들었다. 저 여인들이 또 한 번 ‘실수로’ 이것들을 넘어뜨리지 않게 말이다.

“막휴, 우린 이제 가자.”

윤청은 막휴를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막휴는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윤청과 함께 자신들의 짐을 들고 행상인들이 있는 위치로 돌아갔다.

윤청은 원래부터 막휴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온 것이었으므로, 이제 여기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저쪽의 사람들은 모두 세 여인을 주시하다가, 이제는 윤청이 손에 든 서신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행상인들과 임흠걸, 뇌옥생은 그 종이를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종이 전체에 흐른다고 생각했던 빛은 사실 글자 하나하나에서 나오고 있었다.

윤청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휴와 함께 짐을 내려놓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방금 그 일을 겪고, 역참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행상인들은 제각각 손에 칼을 들었고, 세 서생도 윤청의 눈빛을 통해 무언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여인들은 서생들이 지펴 놓은 모닥불에서 1장(*丈: 약 3m) 정도 거리에 서서, 남자들이 앉은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불길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의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았다.

휘이…… 휘이잉……!

우르릉!

바깥에서는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고, 천둥소리도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면서 들려왔다. 역참 안에 지펴진 두 개의 모닥불은 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윤청이 서신을 들고 돌아오자, 마치 무언가가 그와 주위 사람들의 혈기를 지핀 것 같았다. 마치 같은 적을 앞에 둔 이들처럼, 사내들이 앉아있는 역참 한구석에는 양기(陽氣) 가득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세 여인은 비록 그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저들이 앉은 쪽에서 괴로울 정도로 짙은 양기를 담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뒤 세 여인은 비록 그 열기가 매우 꺼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 해를 입지는 않았으므로 이렇게 물었다.

“공자께서 손에 갖고 계신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보아하니 진귀한 물건 같은데요!”

계 선생님이 쓴 서신은 있지만 선생님이 직접 오신 것과는 다르므로, 윤청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이 서신만으로 모두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으니, 그는 곁에 앉은 이들을 잠시 살펴보다가 정신을 다잡고 여인에게 대답했다.

“별로 특별한 건 아닙니다. 집안 어르신이 보낸 서신일 뿐이지요. 제가 세심하지 못해 서신을 읽고서 잘 정리해두지 않은 모양입니다.”

윤청이 서신을 한 번 흔들자, 그 위에 흐르는 빛이 마치 파문처럼 흔들려 더없이 신비롭게 보였다.

“세 분 모두 비에 옷이 젖었으니, 어서 말리고 감기에 걸리지 않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 입으시던 옷이 다 마르면, 그것으로 갈아입고 가시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저희에게 따로 보답할 필요도 없고요.”

윤청의 말에는 서로 간섭하지 말고, 오늘 밤 아무 일 없이 지나가자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세 여인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고서 서생들이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서향(書香)이 가득 벤 옷이네. 이왕 공자들께서 우리에게 옷을 빌려주셨으니, 저분의 말대로 감기 들지 않게 어서 갈아입자!”

다른 두 사람도 그녀의 말을 듣고 웃더니, 몸을 일으켜 세워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모닥불 바깥으로는 탁자를 둘러 세우고 있었는데, 역참의 탁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그녀들이 무릎을 꿇고 옷을 갈아입었다면 탁자에 완전히 가려졌겠지만, 그들은 일부러 일어서서 옷을 벗으며 상반신의 굴곡을 드러냈다.

옷이 떨어지고 그 안의 흰 피부와 붉은색 속옷이 보이자, 저쪽에 앉은 이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들은 이것이 무언가 잘못되었고 수상쩍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윤청마저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도 물론 여인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예가 아닌 것을 알고도 쳐다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저들에 대한 경계를 놓을 수 없어 일부러 상대방의 거동을 주의해서 보는 중이었다.

“흥, 이럴 거면서 무슨 예를 지킨다고…….”

한 여인이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비웃고는, 일부러 교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그, 언니, 이 안쪽도 전부 젖었네요!”

“그럼 그것도 벗으면 되지, 호호!”

이 광경은 쳐다볼수록 더욱 환상처럼 변해 사람을 꼬여냈다. 이를 보는 적지 않은 이들은 입이 바싹 말라 침을 삼켰다.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조금 전의 그 양기를 담은 열기는 이제 매우 옅어져, 더는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윤청 그 자신은 이 환상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는데, 대신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의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풍기문란하기 짝이 없구나!”

그때 육씨 성의 노인이 돌연 이렇게 고함치더니, 장작 패는 칼로 ‘쿵쿵’ 지면을 몇 차례 때렸다. 그러자 윤청이 든 서신도 노인의 고함을 따라 두어 번 빛이 번쩍였고, 이에 많은 이들이 일시에 정신을 차렸다.

육 노인의 이 한마디와 동작이 초래한 결과는 세 여인을 분노하게 했다. 그녀들은 오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송곳니를 드러낼 듯 입가를 씰룩였다.

윤청은 세 여인이 이를 보이던 순간, 툭 튀어나온 코와 입이 그 얼굴 위로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조금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여우 요괴야!’

윤청의 마음에 이런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자 곧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방금까지는 여인들이 수상쩍었으나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윤청은 저 여인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 여인의 치마 아래에서 얼핏 보았던 움직임을 떠올려 보면, 지금도 저 탁자 아래의 하반신에는 여우 꼬리가 달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0